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10화 (110/308)

[110]

* * *

“어서 오세요. 커피 한잔하시렵니까?”

“주게. 어디 허리케인이 타주는 커피를 먹어보는 영광을 누려보세.”

최강철의 말을 들은 돈 킹이 양쪽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옆에 있던 톰슨과 윤성호, 이성일은 놀란 눈으로 최강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직접 커피를 타주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돈 킹이 뉴욕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텍사스에서 밥 애런을 만난 후 10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원칙적인 합의를 봤다는 연락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렸는데 실무적인 협상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최강철이 5잔의 커피를 타 와 응접실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자 모인 사람들이 하나씩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돈 킹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향을 음미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 빠른 최강철이 모를 리 없다.

그랬기에 입을 연 것은 그가 먼저였다.

“돈 킹, 뭡니까? 시합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닐세, 세부적인 건 전부 결정되었어. 그런데 말이야…….”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껄끄러운 건 나중에 말하시고 궁금한 것부터 해결합시다. 시합은 언제로 결정되었습니까?”

“11월 1일.”

“장소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라스베이거스일세. 그곳이 아니면 안 된다는구만.”

“앞으로 4달이 남았군요. 자, 그럼 이제 껄끄러운 걸 말씀해 보시죠. 얼굴이 어두운 이유가 뭡니까?”

“밥 애런, 그 자식은 이번 시합에 대한 주도권이 지들한테 있다고 생각해. 시합 준비에 대한 건 모두 우리 쪽에 시키면서 이익은 두 배를 먹겠다고 한단 말이지.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어차피 우리가 도전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요?”

“문제는 자네의 개런티야. 그놈은 자네 개런티를 브릴랜드의 절반만 주겠다고 우긴단 말이지.”

“그게 얼맙니까?”

“250만 달러.”

“브릴랜드는 500만 달러를 받는다는 말이군요.”

“내가 안 된다고 버텼지만 요지부동이었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합을 진행시키지 않겠다고 지랄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돈 킹이 말을 하면서 최강철의 눈치를 봤다.

그동안 그가 봐온 허리케인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불안했다.

벌써부터 옆에 있던 윤성호와 이성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지만 돈 킹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비켜 최강철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여기서 최강철이 화를 내거나 시합을 안 하겠다고 버티면 꽤나 난감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강철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WBA 챔피언이란 프리미엄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돈 킹,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내가 브릴랜드의 절반밖에 안 되는 개런티를 받으며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 있나. 자네의 인기는 브릴랜드를 능가하고 있어. 동등한 조건이었다면 나는 자네가 훨씬 많은 개런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요. 난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른 때라면 당신이 가져가는 이익에서 내 몫을 더 달라고 하겠지만 이번에는 깨끗하게 포기하죠. 그러나 이번뿐입니다. 내가 챔피언이 된 후에도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시합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반드시 허리케인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공식 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기자가 몰려들었다.

돈 킹과 밥 애런이 주도한 기자회견은 6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열렸는데 전국의 기자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인사인해를 이루었다.

‘금년 11월 1일. 최강철과 마크 브릴랜드. WBA, IBF 통합 타이틀전 확정’.

발표 내용은 간단했으나 기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이 끝났다.

드디어 허리케인 최강철과 링의 마술사 마크 브릴랜드의 경기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오는 순간 기자들은 모두 환성을 터뜨렸다.

기자들은 WBA에서 승인을 했어도 경기가 쉽게 치러질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쪽 프로모션의 조율 과정은 빨라도 몇 달은 걸리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러진 빅 이벤트들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후 게임이 확정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 걸렸는데 이번 경기는 불과 3개월 만에 경기 일정까지 나왔으니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정도로 빨랐다.

“토머스, 저 인간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가 들은 정보에 따르면 돈 킹이 전부 양보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협상할 필요조차 없었단다.”

“돈 킹 같은 짠돌이가 왜?”

“자세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

“하아,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도대체 뭐야?”

“돈 킹은 허리케인이 이번 경기에서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그래서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미래에 들어올 천문학적인 돈을 생각한 거겠지.”

“그럼 밥 애런은. 그걸 뻔히 알면서 순순히 응하지는 않았을 텐데?”

“밥 애런은 무조건 콜할 수밖에 없는 경기였어. 외부로는 WBA의 승인이 어쩌고 하면서 응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지만 전혀 손해 보지 않는 일이거든. 밥 애런은 지금 황금 알을 낳는 거위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단 말이지. 저놈 입장에서 봤을 때 누가 이겨도 상관없어. 브릴랜드가 이기면 그로서 만족하고 최강철이 이기면 줄줄이 빅 이벤트들이 기다리는데 주저할 이유가 뭐겠어?”

“듣고 보니 그렇구만. 이런 젠장, 그런 상황인데 괜히 가슴 졸였잖아!”

“하하하, 샘, 괜히 가슴 졸인 건 아냐. 저자들은 우리가 계속 떠들어줬기 때문에 서두른 거라고. 안 그랬으면 내년쯤에나 허리케인이 싸우는 걸 봤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

“억울하긴. 그동안 기사 써댄 걸로 얻은 게 얼만데. 가자, 내가 저녁 살게. 오늘은 좋은 데 가서 술까지 산다.”

“뭐야, 왜 그래?”

“왜 그러긴, 허리케인과 제일 친한 너한테 아부하려고 하는 거지. 토머스, 너 허리케인한테 갈 때는 꼭 나를 데리고 가야 해. 우린 친구 사이니까 같이 먹고살자. 그래줄 거지?”

* * *

<드디어 확정. 세기의 빅 이벤트, 허리케인과 링의 마술사. 천하를 건 한판 승부를 벌이다!>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경기 확정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시합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복싱 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특히 한국의 복싱 팬들은 시합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난리가 났다.

한국 복싱의 중흥기.

유명우, 박찬영, 김용강, 문성길 등 4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면서 한국은 복싱 강국의 위상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시기였으나 최강철의 통합 타이틀전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의미 자체가 남달랐다.

한국의 세계 챔피언들은 전부 경량급으로서 복싱 팬들이 열광하는 체급들이 아니었다.

유명우가 7차 방어까지 롱런을 하며 강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나 전 세계 복싱 팬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최강철은 강호들이 득실대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19전 전승 KO승을 기록했고 특유의 인파이팅으로 시합을 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에 한국 복싱 팬들은 그의 경기에 사족을 못 쓸 정도로 흥분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많이 배웠거나 덜 배웠거나 최강철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은 공통적이었다.

최우용이 아들의 통합 타이틀전 소식을 들은 것은 오전에 일을 마치고 밥을 먹기 위해 기사 휴게실에 들렀을 때였다.

그는 개인택시 운전사들이 모이는 휴게실에 와서 항상 동료들과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가 들어서자 김 씨와 황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쟁이 터진 것처럼 다가오며 소리를 질렀다.

“형님, 강철이가 통합 타이틀전을 벌인답니다!”

“정말?”

“지금 그것 때문에 텔레비전이 난리가 났어요! 신문에서는 호외까지 던지고 있다니까요.”

“신문 어디 있어? 있으면 좀 보자.”

“여기요!”

김 씨가 옆에 있던 신문을 들고 와 넘겨주자 최우용이 정신없이 읽었다.

11월 1일. 신문에는 이제 4달 후면 최강철이 세계 최고에 오르기 위해 도전한다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자랑스러운 사진과 함께 말이다.

“우와, 형님. 축하합니다.”

“이 사람아, 이제 시합 잡힌 건데 왜 축하를 혀?”

“해보나 마나죠. 강철이는 무조건 이길 겁니다.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고요.”

“그럼요. 당연하죠. 강철이가 누군데요. 신문에서 보니까 예전에도 그놈을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길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먼.”

김 씨와 황 씨가 설레발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으나 최우용의 표정은 긴장으로 인해 밝지 않았다.

그동안 소문은 무성했으나 막상 시합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긴장으로 인해 숨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누구보다 이겨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더욱 그의 마음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형님, 혹시 강철이가 이번에는 초대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아버진데 미국에 아들 시합 구경하러 한번 가봐야죠?”

“난 안 가.”

“왜요?”

“이 사람아, 나는 강철이가 싸우는 거 텔레비전에서도 겨우겨우 봐. 그런데 거기서… 아들놈이 피 흘리며 싸우는 걸 어떻게 볼 수 있겄어…….”

* * *

최강철은 말바의 강변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봤다.

지금 세상은 그와 마크 브릴랜드의 대결이 결정되면서 난리가 나 있었으나 그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채 천천히 강변을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석양이 아름다웠다.

하늘 전체를 물들이며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을 화려하게 치장한 석양의 기적은 그의 눈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는 부드러운 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돌리자 서지영의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지영 씨를 생각했지. 이 여자한테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일까 고민 중이야.”

“어머, 그러지 마.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면 난 견디기 힘들어질 거야. 지금도 너무 매력적이라 잠을 제대로 못 자는데 더 멋있어지면 어떡해.”

“하하… 이젠 거짓말도 능수능란하시고. 회사 대표라서 그런가 더욱 노련해진 것 같아.”

“아니거든. 난 정말 강철 씨가 좋거든요.”

“우리 조금 걸을까?”

“응.”

최강철은 그녀의 손을 잡고 석양을 따라 강변을 걸어갔다.

누군가 사진을 찍었다면 한 편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을 만큼 석양 속을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강철 씨, 나 보자고 한 거 시합 때문이지?”

“눈치도 빨라지셨네요.”

“한두 번 그랬어야죠. 시합 때가 되면 언제나 그랬잖아.”

“맞아. 오늘 온 건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지영 씨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우리 관장님 성화 잘 알잖아. 훈련 들어가면 그 양반, 지영 씨를 구미호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왜?”

“구미호는 총각을 홀리니까. 더군다나 지영 씨는 너무 예뻐서 그 양반 눈에는 천년 정도 묵은 요괴 정도로 보일 거야.”

“힝, 큰일이네.”

“잘 지내고 있어. 시합 끝나면 제일 먼저 지영 씨한테 올 테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려. 알았지?”

“걱정하지 마.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 강철 씨가 올 때까지.”

“석양 참 예쁘지?”

“응.”

“그래도 지영 씨보다는 못해. 지영 씨가 여기 있으니까 석양이 주눅 들어 보이는 것 같아.”

“아휴, 가슴 떨리게 왜 그래. 하지 마, 정신이 멍해져서 쓰러질 것 같아.”

“그럼 쓰러져. 내가 안아줄게.”

서지영이 온몸을 비틀자 최강철이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후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봤다.

“예쁘네, 우리 지영 씨.”

“강철 씨도 너무 멋있어. 눈부시도록. 너무 많이 맞지 마. 잘생긴 얼굴 상처 날까 봐 걱정된단 말이야.”

“후후… 그래, 많이 맞지 않을게.”

“약속해.”

“뭘로 약속할까. 이거면 되겠어?”

최강철이 그녀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런 후 그녀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뜨거운 키스를 했다.

석양 속의 키스다. 누구나 부러워한다는.

두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키스의 달콤함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했고 석양의 아름다움조차 눈으로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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