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마크 브릴랜드, 전쟁을 선택하다!>
토머스가 쓴 기사는 예상처럼 전미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직접 기자와의 인터뷰를 거쳐 토해낸 마크 브릴랜드의 전의는 너무 단단하고 강해서 결코 돌이켜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기사에서 한 말은 간단했으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 어릴 적 허리케인에게 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된 WBA 챔피언이다. 최강철은 그동안 이류 선수들과 싸워왔으나 나는 프로에 들어와 강력한 적수들과 싸우며 연승 가도를 달려왔다. 그의 가소로운 도전을 나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복싱 팬들에게 말할 게 있다. 나는 두려움을 모른다. 막상 시합이 벌어지면 나는 철저하게 허리케인을 망가뜨릴 것이다. 두려움은 허리케인의 몫이 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둔다.
* * *
대일물산의 김영호와 류광일은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당구장으로 들어왔다.
요즘은 당구 치는 재미로 산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며 떠들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만땅으로 쌓이고 있었다.
최근 들어 무역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들 회사인 대일물산도 매출액을 높게 잡아놓고 직원들을 닦달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싸고 물건 털 시간도 없었다.
야근은 밥 먹 듯했고 마누라의 잔소리가 점점 심해졌지만 가끔 이렇게 시간이 나면 당구장을 찾았다.
당장 나부터 살아야 했다.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었고 기껏해야 게임비 내기에 불과해서 당구장을 찾는 건 웃고 떠드는 게 목적이었다.
“야, 빠킹이야.”
“왜 인마!”
“이 자식아, 그건 드리볼이잖아. 누가 공을 두 번 맞히래.”
“어이구, 눈도 좋아. 그건 또 어떻게 봤대.”
“내 눈이 당구 칠 땐 가자미눈으로 변한다. 안 보는 거 같지만 다 본다고.”
류광일이 큐대에 초크를 바르며 싱글싱글 웃었다.
자식이, 어디서 속일라고.
‘겐뻬이’라고 부른다. 둘씩 짝지어 편먹고 하는 게임의 일본식 표현이다.
4명 다 점수가 100점밖에 되지 않아서 기본 빠킹이 시합 내내 10개 이상은 나오기 때문에 한 번 게임을 하는 데 1시간씩은 걸린다.
더군다나 수준에 맞지 않게 쿠션 2개와 가락구까지 1개를 쳐야 했으니 어떤 날은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냥 나오는 날도 많았다.
시끌벅적.
뭐든 하수들은 경기의 질적 수준에 신경 쓰기보다 승패에 더 신경을 쓴다.
특히, 당구는 이빨겐세이가 점수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양쪽 팀은 상대방이 공을 칠 때마다 마구 방해를 하며 낄낄댔다.
“야, 이 자식들아. 쫌 떨어져서 떠들어. 큐대에 걸리잖아.”
“그러지 뭐. 그런데 광일아, 어머니 잘 계시냐. 저번에 류마티스 관절염 걸리셨다고 하던데 전화는 드렸어?”
“에잇, 증말 치사해서 당구 못 치겠네. 너 저리 안 가!”
“그러니까 누가 하나만 치라고 했지 두개나 치라고 했냐? 그만 치고 이제 나와.”
삑사리다.
옆에서 신경을 잔뜩 건드렸기 때문에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엉뚱한 곳으로 공이 날아가자 김영호가 낄낄대며 류광일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신중하게 큐대를 잡고 공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공을 치지 못했다.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류광일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야, 김 대리 최강철이 나온다!”
“시끄러워. 네가 그런다고 내가 못 칠 것 같아?”
“진짜야, 인마!”
당구대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류광일과 직원들이 총알처럼 텔레비전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기에 공을 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던 김영호가 눈만 돌려 텔레비전을 봤다.
정말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최강철의 경기 영상이 나오고 있었는데 앵커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후다닥.
김영호가 큐대를 집어 던지고 텔레비전으로 뛰어갔다. 당구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마크 브릴랜드가 최강철 선수와의 시합에 응한다는 소식입니다. 외신에 따르면 마크 브릴랜드는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언제든지 최강철 선수와 시합할 의향이 있다면서 승리를 자신했다고 합니다. 시합이 성사된다면 최강철 선수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통합 타이틀전을 치르게 되는데…….
텔레비전 앞에는 당구를 치고 있던 손님들이 전부 몰려들었기 때문에 30명이 넘었다.
뉴스가 끝났는데도 그들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고 마구 떠들기 시작해서 당구장이 금방 시장 통처럼 변해 버렸다.
그들은 이미 당구 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야, 류 대리. 그럼 통합 타이틀전이 벌어진다는 거지?”
“넌 뉴스를 주둥이로 들었냐? 지금 저건 마크 브릴랜드가 싸우겠다는 인터뷰를 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냐?”
“아이고, 김 대리야. 넌 지금 이 나이까지 그 머리 가지고 직장 생활 잘도 했다. 인마, 둘이 싸운다고 해서 싸워지면 얼마나 좋겠냐.”
“그럼 뭔데?”
“WBA가 허락을 해야 돼. 그리고 시합이 결정되려면 프로 모터들끼리 조율도 해야 되고. 아마, 시합 날이 정해지려면 시간깨나 걸릴 거다.”
“아니, 씨발. 뭐가 그리 복잡해? 그냥 싸우면 되지. 기다리기 힘드니까 그냥 싸우라고 해. 내가 만 원 낼 테니까.”
“어이구, 이 단순한 자식. 내가 너 때문에 그나마 세상 즐겁게 산다.”
* * *
WBA가 통합 타이틀전을 승인한 것은 스포츠라인이 마크 브릴랜드의 기사를 터뜨린 후 꼭 10일이 지났을 때였다.
버틸 수가 없었다.
복싱 팬들의 항의 전화로 인해 업무를 볼 수 없었고 언론에서는 연일 시합을 승인하라는 압박을 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꿋꿋하게 원칙을 사수하던 WBA는 결국 백기들 들고 말았다.
복싱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결국 항복을 한 WBA 회장인 실비오 베를루스는 웰터급 통합 타이틀전을 승인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그동안 통합 타이틀전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복싱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재 IBF에는 마구잡이로 수준 이하의 챔피언을 양산하고 있어 복싱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웰터급 챔피언인 허리케인 최강철은 그런 범주를 뛰어넘는 뛰어난 복서이기에 이번에 한해서 통합 타이틀전을 승인코자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WBA는 복싱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IBF가 제대로 된 챔피언을 배출할 때까지 이런 시합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돈 킹이 텍사스로 날아간 것은 WBA에서 통합 타이틀전을 승인한다는 발표가 있고 난 다음 날이었다.
이날을 기다려왔다.
그동안 얼마나 애를 태우며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언론을 부추기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고 WBA 회장은 물론이고 실무자들까지 당근과 채찍전략을 번갈아가며 쓰느라 한 달 동안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성질 급한 최강철이 IBF 타이틀을 벗어던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마크 브릴랜드의 프로모터인 밥 애런을 만나 세부 일정을 상의하는 것뿐이었다.
밥 애런에게 전화하자 놈은 거만한 태도를 여지없이 드러냈지만 방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역시 장사꾼이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놈이었으니 거대한 흐름에 편승해서 거액을 움켜쥘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약속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밥 애런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 돈 킹. 오느라고 고생했겠구만.”
“잘 지냈나?”
“잘 지냈을 리 없잖아. 자네 쪽에서 하도 설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나까지 싸잡아 욕을 잔뜩 얻어먹었더니 배가 불러죽겠어. 자넨 아직 죽지 않았더구만. 하는 짓이 다이내믹해.”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이런 게 우리 일 아니겠어?”
“밥부터 먹을까?”
이놈이 미쳤나. 왜 이렇게 사근거리는 거야.
물론 이 자리는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으니 어쩔 수 없이 나왔다 하더라도 밥 애런의 태도는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싱싱한 스테이크를 먹으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먹을 때는 가급적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짓인데 소화가 되지 않는 무거운 이야기로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망칠 이유가 없다.
본론이 시작된 것은 식사를 끝내고 커피가 나왔을 때였다.
“밥, 할 거지?”
“뭘?”
“알면서 왜 그래, 선수들끼리.”
“푸하하! 돈 킹, 내가 응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말해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과 마크 브릴랜드를 붙일 이유가 없어. 나를 설득시킬 정도의 이유가 있다면 생각해 보지.”
“이유야 많지. 우린 돈을 벌 수 있잖나. 그만한 이유가 또 있겠어?”
“브릴랜드의 상품성은 뛰어난 놈이야. 우린 2차나 3차 방어전에서 듀란과의 시합을 생각하고 있어. 그런 빅 이벤트를 앞두고 왜 모험을 해야 하지? 나는 브릴랜드가 듀란마저 꺾으면 헌즈하고도 붙일 생각이야. 어때, 내 계획이?”
“쯧쯧… 장난 치고 있구만. 이봐, 밥. 난 백전노장이야. 이 세계에서 벌써 20년이나 굴러먹은 사람이라고. 브릴랜드가 상품성이 뛰어나다고 누가 그러든가. 브릴랜드와 듀란, 브릴랜드와 헌즈. 좋아, 돈은 될 거야. 하지만 코 묻은 돈에 불과하다는 데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어. 왜 그런지는 자네도 잘 알 텐데?”
“크크크…….”
밥 애런이 이를 드러내며 이상한 웃음을 흘려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수긍한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돈 킹 역시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상품성으로 따지면 허리케인을 따라올 놈이 없다. 어차피 듀란이나 헌즈 다 네 선수들이잖아. 이번 시합에서 허리케인이 이기면 진짜 빅 이벤트가 생길 거야. 브릴랜드가 걔들과 싸우는 것보다 허리케인이 싸우는 게 몇 배는 더 파괴력이 있어. 우리 자꾸 빙빙 돌면서 헛바퀴 돌지 말자고. 자네도 그걸 알기 때문에 나온 거잖아!”
“역시 돈 킹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를 미워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단 말이지.”
“우리, 진짜 돈을 만져보자고. 어때?”
“조건이 맞으면. 말해봐. 나에게 뭘 줄 텐가?”
“똥줄은 내가 타니까 자네가 하자는 대로 하겠네.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이야. 허리케인이 이번에 이기면 다음부터 이런 제안은 없을 테니 마음껏 말해봐.”
“모든 이익은 2 대 1. 물론 내가 2고 자네가 1이야. 시합에 관한 모든 일도 자네 쪽에서 처리하는 조건일세.”
“개런티는?”
“개런티도 마찬가지야. 브릴랜드가 최강철의 두 배를 받는다. 챔피언이 더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밥, 장난치지 마. 나와 관련된 건 다 양보해도 그건 안 돼. 최강철이 도전자지만 브릴랜드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 이 경기의 흥행은 허리케인 때문에 대박이 터질 거다. 그런데 왜 허리케인이 개런티를 적게 받는단 말이냐.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그것만은 안 돼.”
“그럼 자네 이익분에서 더 주든가. 그러면 되잖아.”
“자네 정말 이럴 거야!”
“두 놈의 개런티를 얼마로 책정할 건지는 계산해 보면 금방 나와. 정해진 금액 가지고 두 놈이 나눠 먹는 거지. 그리고 나는 브릴랜드에게 그 돈이 더 가기를 바란다네. 자네가 허리케인을 응원하는 것처럼 나는 브릴랜드를 응원한단 말일세. 그놈은 지금까지 나에게 돈을 벌어다 준 놈이야. 그런데 내가 왜 자네 선수를 생각해 줘야 한단 말인가?”
“시합을 하지 말자는 거냐?”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이봐, 돈 킹.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으면 좋겠어. 다른 건 모두 여론 가지고 풀어낼 수 있었지만 개런티 때문에 시합이 성사되지 못하는 건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다네.”
“으…….”
“줄 때 그냥 받아먹어.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모든 게 나한테 달려 있다는 거 잘 알잖아. 욕심 부리다가 아무것도 못 하면 전부 자네 손해야. 자네가 IBF에 코 꿰인 거 내가 모를 것 같나. 그럼에도 내가 자네 요청을 받아들여 준 건 우리 두 사람이 동반자 관계이기 때문일세.”
“허리케인은 자존심이 센 놈이야. 결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가서 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으면 자존심을 죽이라고. 물론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밥, 허리케인이 질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브릴랜드의 아웃복싱을 잡을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그럼 우리 또 내기 한번 할까. 300만 달러. 콜?”
“지금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실무자나 보내. 세부 계약을 해야 되니까. 내기는 그다음에 생각해 보지. 밥도 다 먹고 할 이야기도 다 했으니 그만 일어나세. 난 요새 이상하게 이른 잠이 온다네. 아무래도 늙어서 그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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