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뉴욕으로 돌아온 것은 일정보다 5일이 더 걸린 12일 만이었다.
MS와의 계약을 마치고 서류를 챙겨 비행기를 탈 때까지의 피 말리는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긴장된 시간들이었다.
모든 계약을 끝내고 빌 게이츠와 악수를 한 후 여유 있게 회의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으나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최강철은 서지영을 끌어안고 만세를 불렀다.
이제 몇 년 후부터 그에게는 이 계약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받지 않았다.
MS에서 했던 수많은 불법과 비양심에 비하면 자신이 한 짓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현재에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기술을 선점한 것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아니었으니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도 이런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악마에게 영혼마저 저당 잡힌 인생인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끄러울까.
이렇게 번 돈으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짓이라도 할 의향이 있었다.
* * *
최강철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윤성호와 이성일이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는데 못마땅한 기운이 철철 흘러넘쳤다.
“신혼여행 잘 다녀왔냐?”
“신혼여행이라뇨?”
“지영이하고 둘이서 여행 갔잖아. 그게 신혼여행이지 뭐야!”
윤성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시합을 앞두고 훈련을 뒤로 미룬 채 여행을 간 것도 못마땅한데 약속한 기간까지 어기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일 때문에 가는 거라고 말했잖아요. 늦은 건 일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에요. 인혜 누나가 전화한다고 했는데 안 했어요?”
“인혜 씨도 거기에 있었어?”
“그럼요.”
“좋다, 일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복싱 선수면 복싱 선수답게 살면 안 되겠냐. 돈 벌 거면 복싱 때려치우고 사업을 해, 인마!”
“화 나셨어요?”
“이 자식아, 시합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어. 난 네 코치고 훈련을 시켜야 하는 사람이야. 선수가 훈련할 생각 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면 넌 어떨 것 같냐?”
“관장님, 일도 끝났으니 이제부터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화 푸세요.”
“휴우… 정말이지?”
“그럼요.”
“알았어, 피곤할 테니까 들어가서 씻고 쉬어. 모레부터 훈련 들어갈 거니까 각오하고.”
“알았습니다.”
윤성호가 등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대신 이성일이 슬쩍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윤성호와 달리 사근사근했는데 말리는 시누이를 연상시켰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왜 약속 시간을 안 지켜.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관장님 많이 기다렸냐?”
“우리 관장님 좀생이잖아. 네가 안 오니까 매일 안절부절못했어.”
“하아… 하긴, 그 성격이 어디 가겠냐.”
“강철아, 도대체 거기 가서 뭐 한 거야. 인마, 뭘 하러 가는지 얘기라도 해주고 가야 덜 궁금하지.”
“말하면 뭐해. 맨날 골치 아픈 건 말하지 말라던 놈이 별소릴 다하네.”
“크크… 그랬나. 어쨌든 좋았겠다.”
“뭐가?”
“지영 씨하고 보름 동안이나 같이 지냈잖아. 조심은 했지?”
“뭘 조심해?”
“실수해서 애라도 가지면 젊은 나이에 장가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어. 더군다나 너한테 그런 일 생기면 관장님하고 나는 칼 물고 죽어야 해. 그러니까 항상 조심하라고.”
“에라, 이 미친놈아!”
최강철의 왼손이 번개같이 움직여 이성일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하지만 이성일은 이미 더킹을 하면서 뒤로 빠졌기 때문에 최강철의 왼손은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대단한 놈이다.
세계 챔피언의 기습까지 알아채고 도망친 놈의 순발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훌륭했다.
* * *
최강철의 1차 방어전 상대 존 하인스는 북미 랭킹에도 없는 이류급 선수였다.
그럼에도 그가 IBF 랭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선수 수급이 어려운 IBF쪽에서 어느 정도 경력만 있으면 마구 랭킹에 올려놨기 때문이다.
18승 12패.
거기다 KO승은 8번밖에 없었고 12번의 패배 중에는 7번이나 캔버스에 쓰러진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펀치력이나 맷집도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복서로서는 생명력이 다해가는 34살의 나이였고 이미 결혼해서 가정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두 달이란 시간 동안 최강철은 여유를 두면서 자신의 무기들을 점검해 나갔다.
언제부턴가 일주일 정도만 강화 운동을 하면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체력이 충전되기 때문에 미친 듯이 훈련할 이유가 없었다.
제프 카터 없이 혼자 분석실로 들어간 이성일은 일주일 만에 나타났는데, 존 하인스에 대한 모든 자료를 분석해서 내놨다.
예상한 것처럼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선수들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성일조차도 긴장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철저하게 스케줄을 짜놓고 최강철을 괴롭혔다.
어떤 상대라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으면 불의의 일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모든 언론은 최강철을 주목했다.
그의 연속 KO승이 계속될 것이냐는 것과 이번 경기가 끝난 후 양대 기구의 챔피언들과 통합 타이틀전 성사가 주요 이슈였다.
수많은 기자가 그의 연습 장면을 지켜보며 매일 기사를 내보냈고, 한국 측에서는 벌써 일주일 전부터 방송국과 기자들이 날아와 그를 취재하는 중이었다.
존 하인스는 공식 인터뷰 장소에서 이길 수 있다며 큰소리를 쳤으나 목소리에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수준이 최강철에게 못 미친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시합 당일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경기장은 최강철의 홈 링인 메디슨 스퀘어가든이었다.
빅 이벤트가 아니었음에도 허리케인을 열광하는 복싱 팬들로 가득 찬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메인이벤트가 시작된다는 사회자의 안내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자 진행 요원이 출전해 달라는 사인을 보내 왔다.
윤 관장의 입이 불쑥 열린 것은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강철아.”
“예.”
“너는 처음 데뷔할 때 어떤 마음으로 링에 올랐냐?”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랬다. 그럼 네 상대인 존 하인스는 어떤 생각으로 오를 것 같냐.”
“…….”
“그놈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복싱 인생을 살아왔을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그 친구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할 거야. 사람의 인생에서 마지막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압니다.”
“절대 얕보지 마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놈은 언제나 괴력을 발휘하는 법이야.”
“그러겠습니다.”
“나는 최근 들어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그리고 네가 현실에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어. 우리 꿈은 이게 다가 아니잖아. 강철아, 우리 꿈이 뭐냐?”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그래, 진정한 챔피언. 누구나 우러러보는 그런 챔피언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우리 꿈이 이뤄진 게 아니야. 알았어?”
“새겨듣겠습니다.”
“맹수는 사슴을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절대 서두르지도 얕보지도 말아라. 그렇다고 너무 신중하란 뜻은 아니니까 잘해주기 바란다.”
“예.”
윤성호의 말을 들으며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이 사람, 자신에게는 선물과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조금의 자만심과 조금의 안일함이 눈에 보였던 게 분명했다.
그래, 맞다.
자신의 꿈은 IBF 챔피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가 약자라는 생각과 벌여놓은 사업에 대한 성과로 인해 잠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관장님.
나는 허리케인 최강철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인생을 살아가는 미친놈이란 말입니다.
최강철이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광란의 현장으로 변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관중들은 그가 링에 올라가 손을 번쩍 치켜들 때까지 연호를 멈추지 않았는데 전부 자리에서 기립해서 열렬한 박수로 그를 맞아들였다.
그들이 이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링에 설 때마다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달궈놓는 최강철의 경기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전사의 피가 살아 움직인다.
링에서 상대와 마주칠 때마다 최강철의 눈에서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고 무서운 투지로 적을 압박하며 무차별적으로 때려 부쉈으니 관중들은 그에게서 간절하게 원하던 자신의 꿈을 봤을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장군이 되어 전장을 누비는 영웅이 되는 꿈 말이다.
최강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코너로 들어와 마우스피스를 물었다.
링에 오르자 모든 것이 사라졌고 오직 상대방만 눈으로 들어왔다.
윤성호의 말처럼 존 하인스의 눈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져 있었고 오직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전사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좋다.
그래야지.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야.
링에 오르는 순간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진정한 복서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어떻게 싸워왔는지 모르나 지금의 그 모습이라면 결과와 상관없이 존경받을 복서로 충분하다.
공이 울리자 링의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가볍게 주먹을 부딪친 후부터 존 하인스는 무차별적으로 펀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펀치를 피하면서 그의 눈을 봤다.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존 하인스는 자신의 몸이 재가 될 때까지 장렬하게 싸우다가 산화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펀치의 각도가 둔하다. 펀치의 스피드도 스텝의 유연성도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자들보다 확연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가 던지는 주먹 하나하나에는 자신의 혼이 담겨 있어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만큼 날카로웠다.
위잉, 위잉.
방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방적인 공격.
최강철이 물러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몸으로 부딪쳐 오며 펀치를 날렸다.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의 눈에 담겨 있는 승리의 갈망이 너무나 처연하게 보였다.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당신은 어떤 이유로 이렇듯 승리를 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것이냐.
1라운드 내내 그의 주먹을 피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갔다.
스피드를 맞춰주었고 그의 돌진을 허락하며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배려다.
당신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준 작은 배려니 이것을 동정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관중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1라운드 내내 존 하인스가 일방적으로 최강철을 몰아붙이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은 너무 놀라 미처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기 때문이다.
“이 자식아, 너 미쳤어!”
“왜요?”
“왜 맞아주는 거냐? 사이드로 빠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간을 보는 겁니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 본 거예요. 이제 끝낼 테니 그만 침 튀기세요. 얼굴에서 냄새 난단 말입니다.”
“우와, 이 미친놈… 잡혀주면 위험해. 공격을 하든지 뒤로 물러나란 말이야. 이 자식아, 시합이 장난이냐? 제대로 하지 않으면 타월 던질 거니까 알아서 해!”
윤성호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링의 중앙으로 나왔다.
존 하인스는 1라운드의 돌진이 먹혔다고 생각했던지 2라운드에 들어와서도 맹렬하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최강철은 황소처럼 돌진해 온 존 하인스의 몸통을 어깨로 들이박으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고는 번개같이 좌우 숏 훅으로 복부를 때린 후 좌측으로 한 발 비켜나며 거리를 확보했다.
존 하인스의 눈이 당황함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줄곧 밀리기만 하던 최강철의 몸은 마치 콘크리트 벽을 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번개처럼 터진 그의 양 훅에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이 오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최강철의 눈에서 푸른 섬광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콰앙!
거리를 확보한 최강철의 스트레이트가 번개처럼 존 하인스의 얼굴을 직격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존 하인스의 전진은 끝났다.
비틀.
존 하인스는 단 한 번의 강력한 반격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끝이다.
최강철은 뒤로 물러서는 그를 따라 들어가며 전매특허인 콤비네이션 펀치를 무려 20발이나 터뜨렸다.
가딩의 의미는 없다.
그의 콤비네이션 펀치는 아무리 강한 가딩도 때려 부수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자들이 그랬고 존 하인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2라운드 1분 13초.
최강철이 존 하인스를 꺾고 1차 방어선에 성공한 시간은 불과 4분 13초가 걸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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