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 * *
“강철아, 난 한국이 좋다. 여기 와서 지내보니까 막 천국처럼 느껴져. 너는 안 그래?”
“하하… 한국 여자들 보니까 좋아서 그래, 인마.”
“넌 내가 카사노바로 보이니?”
“그럴 리가. 너같이 못생긴 카사노바가 어디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가끔가다 못생긴 카사노바도 있어. 물론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겠지만. 알뜰살뜰 저금해 놓은 돈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허탈해서 죽을 지경이야. 강철아, 나 깡통 차면 먹여 살릴 거지?”
“미친놈.”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냐?”
“학교.”
“서울대?”
“응. 오랜만에 캠퍼스나 보려고.”
“휴우… 인마, 그거 봐서 뭐 해. 가슴만 아프지.”
최강철이 말을 하자 이성일이 눈치를 보면서 긴 한숨을 흘렸다.
미국에서의 5년. 젊은 청춘을 그곳에서 보내고 나니 이제 한국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돌아올 수 없는 형편이란 것이 그런 감정을 더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강철의 얼굴에는 전혀 가슴 아픈 표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난 내년에 복학할 생각이야.”
“복학?”
“그래, 금년에 통합 타이틀전을 따내면 한국으로 돌아올 거다.”
“우와, 그 말 진짜냐?”
“왜 싫어?”
“그럼 미국 일은 어떡하고. 거기에 일을 많이 벌여놨잖아.”
“방학 때 가서 하면 돼. 우린 영주권을 얻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어. 더군다나 챔피언이 되면 이제 미친 듯이 싸우지 않아도 된다. 1년에 2번 정도 방어전을 치르면 충분하니까 문제없을 거야.”
“좋네, 좋아. 그런데 군대는 어쩌지? 나는 아직 신체검사도 못 받았는데 걱정이네.”
“이 자식아, 걱정도 팔자다. 평발은 군대 면제야. 돌아와서 신체검사 받고 면제받으면 아무런 문제 없어. 부모님께 감사해라. 너 같은 싸가지를 평발로 태어나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이냐.”
“그래도 혹시 갈 수 있잖아. 우리나라는 없는 놈들한테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시킨다니까. 검사관이 평발 아니라고 우기면 난 군대에 끌려갈 수도 있어.”
“아이고… 지랄아. 버스 왔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타기나 해.”
버스를 타고 서울대에서 내려 캠퍼스를 걸었다.
넓은 캠퍼스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잔디밭을 휩쓸며 지나갔고 교내를 가득 채운 격문과 대자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대학의 낭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대학의 낭만보다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 경영대 건물로 들어서서 강의실을 바라보았다.
뉴욕대나 펜실베이니아대와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한참 동안 서서 빈 강의실을 바라보다가 문을 나서 돌아 나올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뒤에서 그를 부른 사람은 경영대 학과장인 윤문호 교수였는데 꽤나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 최강철 군 아닌가?”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구만. 자네, 내 사무실에 가서 커피 한잔할 텐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강철이 정중하게 대답하고 이성일한테 양해를 얻은 후 그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여전히 똑같은 구조다.
책들로 가득 덮여 있는 그의 사무실은 정갈함과 거리가 멀었다.
윤문호 교수는 직접 커피를 타 왔는데 한쪽에 놓여 있는 커피포트와 찻잔들은 낡아서 당장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자네 시합을 봤네. 정말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나는 자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네. 세계 챔피언까지 올랐으니 정말 대단해. 암, 대단하고말고.”
“교수님, 자꾸 그러시니까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강철 군,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인가. 학교는 포기한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내년쯤 복학할 생각입니다.”
“아니, 이 사람아. 세계 챔피언은 어쩌고?”
“공부를 하면서 복싱도 같이할 생각입니다. 5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언제나 제 뿌리는 한국이란 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복싱으로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학업을 마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허…….”
윤문호 교수의 얼굴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사람의 인생은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었고 최강철은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며 복싱으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에 당연히 학업을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5년 전, 그가 휴학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만류를 했었던 건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할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최강철이 세계 챔피언이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훌륭한 인재라는 의미가 뭔가.
훌륭한 인재라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최강철은 이미 그에 대한 자격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혼란이 왔다.
“정말 가능하겠나? 학교에 다니게 되면 많은 제약이 따를 걸세. 자네의 복싱 인생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단 말일세.”
“교수님이 도와주시면 문제 없을 거예요. 하하… 제가 공부를 못해서 낙제하게 되면 교수님이 성적을 올려주십시오.”
“예끼, 이 사람아!”
* * *
최강철은 정치인들의 요청은 물론이고 방송국의 출연 요청까지 단칼에 거절했다.
방송국에서는 그와 친분이 있는 복싱 협회의 유광호와 스포츠서울의 김도환, 심지어는 아버지와 친했던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어떡하든 최강철을 텔레비전에 출연시키려 했으나 끝내 고사를 하고 나가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텔레비전에 나가서 광대처럼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시기가 아니었다.
출국 당일.
공항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수많은 사람이 따라왔다.
유광호를 비롯한 복싱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기자들과 팬들까지 공항은 온통 그의 출국 소식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똑같은 질문.
출국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은 벌써 12번도 넘게 대답했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정중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고 포토 라인에 서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요함은 인터뷰가 모두 끝났음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인사하는 장면까지 주변에 몰려들어 찍어댔기 때문에 이별의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엄마, 다녀올게요.”
“그려, 몸 건강 잘 챙겨. 알았지?”
“예.”
걱정하는 어머니의 품에 잠시 안겼다가 떨어져 나오자 아버지가 천천히 다가오셨다.
그런 후 아들의 몸을 끌어당겼다.
“강철아, 난 널 믿는다. 어디서든 잘할 거라고 믿어.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결코 좌절하면 안 된다. 너한테는 우리가 있으니까 너무 혼자 애쓰지 마. 그리고…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거라.”
“예, 아버지.”
아버지의 따스한 말이 꿈결처럼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제어하며 아버지의 앙상한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가족들과 헤어져 출국 게이트로 향했다.
기자들과 팬들은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따라왔는데 꼭 여왕벌을 쫓는 벌 무리와 비슷했다.
* * *
3개월 후로 예정되어 있는 IBF세계 타이틀 1차 방어전의 상대는 랭킹 6위에 올라 있는 존 하인스로 18승 12패의 전적을 가진 이류급 선수였다.
IBF랭킹에 등록된 상당수가 이런 선수들이다.
아직 IBF는 선수 수급이 원활치 않았기 때문에 허리케인과 맞상대할 선수를 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피지컬이 완성된 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보유한 이상 이런 선수를 상대로 몇 달 동안 훈련을 한다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언론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었다.
1차 방어전이 끝나면 허리케인이 WBA나 WBC 쪽에 통합 타이틀전을 요구할 거란 예상을 하며 그들은 시합 날짜가 다가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재밌는 일이다.
이류급 선수와 방어전을 치를 뿐인데도 언론이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만큼 최강철의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 블랙 먼데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시는 여전히 침체에 허덕이고 있었다.
과도한 낙폭으로 인해 잠깐 상승장을 연출하기도 했으나 동력을 잃어버린 주식 시장은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가 투자한 델 컴퓨터와 시스코는 주식 시장과 상관없이 독수리처럼 창공을 비상하는 중이었다.
하루가 다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매출을 볼 때마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회사의 발전은 엄청났다.
뉴욕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최강철이 서지영에게 여행을 제안한 것은 집으로 돌아온 지 3일이 지났을 때였다.
“지영 씨, 워싱턴 가봤어?”
“워싱턴 어디?”
“레드먼드.”
“아니, 거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거길 갔다 와야 해. 한 일주일 일정으로.”
“강철 씨, 시합 잡혔다면서 훈련 안 해도 돼?”
“갔다 와서 천천히 시작할 거야. 나와 붙는 선수가 조금 약하거든.”
“그래도… 윤 관장님이 화낼 텐데. 그분한테는 이야기한 거야?”
“걱정하지 마. 했으니까.”
최강철은 그녀의 질문을 받은 후 빙그레 웃었다.
윤성호의 성화가 얼마나 대단하지 그녀조차 알 정도니 잔소리꾼이란 별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서지영의 표정은 여전히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거긴 왜 가… 혹시……?”
“사람 만나러.”
“어떤 사람을 만나는 건데. 또 투자하려고 사람 만나는 거야?”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서지영이 펄쩍 뛰어올랐다.
벌써 이렇게 불쑥 여행을 가자고 한 게 세 번째다.
최강철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할 때마다 기업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녀는 벌써부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아냐. 그냥 놀러 가는 거야. 우린 돈도 없는데 무슨 투자를 해.”
“거짓말, 사람 만나러 간다고 그랬잖아. 갑자기 놀러 간다고 하면 내가 믿을 것 같아. 빨리 말해줘.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빌 게이츠라고 들어봤어?”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 사람이 누구야?”
“컴퓨터 운영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지. 지영 씨가 쓰고 있는 DOS프로그램을 그 사람이 만든 거야.”
“아하, 마이크로 소프트?”
“이제 알아듣네.”
“그런데 그 사람을 뭐 하러 만나러 가. 거기는 이미 나스닥에 주식까지 상장한 회사잖아.”
“그냥, 얼굴 좀 익혀놓으려고. 그 사람을 알아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히잉, 난 도대체 모르겠어. 강철 씨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단 말이야.”
“하하하… 그냥 즐겁게 여행 한다고 생각하면 돼. 우린 오붓하게 여행 다닌 적이 별로 없잖아.”
* * *
빌 게이츠는 사장실에서 폴 앨런, 스티브 발머와 함께 회의를 했다.
1987년 나스닥에 주식이 상장되면서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던 그들 세 사람은 억만장자의 대열에 올랐으나 일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현재 빌 게이츠의 나이는 32살.
한참 일할 나이였고 그는 살아오면서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기에 아침이 되면 회사에서 개발하는 제품들에 대하여 추진 일정을 체크했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주식이 상장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현재 상황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비지코프사가 GUI 방식의 운영체제를 내놨고 GEM(Graphics Environment Manager)을 디지털 리서치사가 출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가 확실한 지배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싸늘하게 식은 커피를 들어 올린 것은 주요 사안에 대하여 의견을 전부 나눈 후였다.
집중력이 좋다.
그는 일을 할 때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기에 비서가 가져다 준 커피는 언제나 싸늘하게 식은 후에야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시장 상황을 계속 살피면서 대응하자고.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윈도우가 개발에 성공하면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어. 이게 우리의 지상 과제야.”
“그런데 쉽지는 않구만. 워낙 새로운 포맷의 운영체제라 할 일이 너무 많아. 난관에 부딪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구만.”
“서두를 필요는 없어.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최대한 서둘러서 완성해야 경쟁 회사들을 따돌릴 수 있어. 하여간 연구원들을 독려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성과가 나올 거야. 회의 끝났으면 나가봐도 되지?”
말을 마친 폴 애런이 스티브 발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빌 게이츠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애런 잠깐만!”
“왜?”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는데 어제 허리케인한테서 전화가 왔어. 알지, 허리케인?”
“복싱 선수?”
“그래, 그 허리케인.”
“하하… 거짓말. 허리케인이 왜 자네한테 전화를 해?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진짜야. 워싱턴에 왔다면서 나를 만나고 싶대.”
“그 거짓말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래서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어.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했는데 자네 어때? 약속 없으면 같이 가. 자네는 허리케인의 광팬이잖아.”
“정말 그렇다면 무조건 가야지. 허리케인하고 밥 먹을 수 있는 기횐데 약속이 문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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