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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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것인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루시퍼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고 돌아왔으나 지금까지의 삶은 치열함뿐이었다.
행복의 의미.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알콩달콩 살아가며 일상의 즐거움을 행복이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지닌 채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모른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출국 7일전.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8일 지났다.
치열함에서 벗어나 부모님의 품에서 꿈결처럼 보낸 시간들이었다.
즐겁고 행복했다. 아침이면 마음껏 늦잠을 잔 후 어머니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후후 불면서 먹었고 오후에는 이성일을 만나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안 후부터 아예 대놓고 편안하게 다녔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안에서 무차별적으로 적을 때려눕히는 복싱 영웅의 모습만 기억할 뿐 일상에서의 최강철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경기가 중계방송된 건 불과 3차례밖에 되지 않았고 복싱 경기 이외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으니 알아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종로에 나가 젊은이들의 거리로 들어가 맥주를 마셨고 프로 야구도 구경했다.
용산에 가서 2편짜리 영화를 보다가 당구를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본 영웅본색.
이성일은 주윤발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홍콩 느와르 영화 영웅본색을 본 후 성냥개비를 물고 다녔기 때문에 그때마다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이 자식은 벌써 6개월 전에 상영된 영화 흉내를 내면서 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 와서 놀러 다닌 것만은 아니다.
서울에 들어온 지 9일째 되던 날, 최강철은 아침부터 이성일을 불러내어 미국에서 가져온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어딜?”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성일이 의문을 나타냈으나 최강철은 무작정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성남으로 향했다.
최강철이 목적지를 성남으로 정하자 이성일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거품을 물었다.
“야, 성남에는 왜 가?”
“심심해서.”
“넌 심심하면 성남 가니? 이 자식아, 너같이 음흉한 놈이 잘도 심심해서 성남을 가겠다. 빨리 말해. 답답하게 하지 말고.”
“땅 사러.”
“얼씨구, 미친놈. 성남에 무슨 땅을 사러가!”
이성일이 펄쩍 뛰었다.
성남은 군사정권 시절 못사는 사람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형성한 곳으로 서울 사람들에게는 낙후의 대명사와 같은 곳이었다.
최강철이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건 미국에서 여러 차례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성남에 땅을 사러간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말을 던져놓고 차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도로가 엉망이라 꽤 많은 시간이 걸려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성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강철은 성남시청 앞에서 내려 주변에서 가장 커다란 복덕방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50대 남자 두 명이 바둑을 두는 것이 보였다.
손님이 찾아왔어도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눈만 들었다가 다시 바둑판에 시선을 던지며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뱉어냈다.
오랜 복덕방 세월이 손님을 알아보는 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최강철과 이성일에게서 돈 냄새를 맡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자취방 찾아?”
“아뇨, 땅을 보러 왔습니다.”
“무슨 땅?”
전혀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사내의 시선이 바둑판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최강철을 향해 다가왔다.
“분당에 땅을 사려고 하는데요, 마땅한 매물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것참, 아직 젊어 보이는데 땅을 사려는 이유가 뭔가?”
“아버지께서 충주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시다가 이번에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아… 그럼 분당에서 과수원 하시려고?”
“예, 마땅한 땅이 있을까요?”
“얼마나?”
“넓으면 넓을수록 좋습니다. 괜찮은 매물이 있으면 보여주십시오.”
“그거야 땅은 넘쳐나지. 기다려 봐. 매물을 보여줄 테니까.”
사내가 부지런히 책상으로 가더니 장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눈은 바둑판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가져온 장부에는 매물로 나온 땅들이 새까맣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씨알이 적다.
“언제 이렇게 가격이 올랐죠?”
“강남이 개발되면서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땅 주인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더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도 이런 가격으로는 팔 수 없다는 거 잘 알아. 누가 이런 촌구석의 땅을 평당 2만 원이나 주고 사겠어. 매물만 골라봐. 그러면 후려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씨익 웃는 그의 얼굴에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분당신도시계획은 89년 4월에 발표되었고 지금은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을 때였으니 그의 말대로 분당에 땅을 사려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땅을 사려는 최강철이 노다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저씨, 저는 작은 매물에는 관심 없습니다. 면적이 큰 놈으로만 보여주세요.”
“그래? 만 평 이상으로?”
“그 이상도 좋습니다.”
“알았네.”
신이 났다.
복덕방 주인은 최강철의 적극적인 태도에 고무되었던지 부지런히 장부를 넘기다가 한 곳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건 덩치가 너무 큰데…….”
“몇 평입니까?”
“30만 평짜리구만.”
“위치는요?”
“위치는 좋아. 성남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야.”
“지도에서 볼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에또… 보자, 여기구만.”
그가 벽에 걸려 있는 지도의 번지수를 확인하다가 한 곳을 짚었다.
최강철은 그의 손가락을 확인하고 속으로 웃었다.
벌써 성남을 2번이나 찾아와 미리 확인했던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부러 이곳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에는 매물을 보유한 곳 아니면 중개가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복덕방에서는 매물의 존재를 알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그가 짚은 곳은 바로 현재 분당의 중심인 서현동이었다.
“이건 누구 땅입니까?”
“김만덕이란 놈 땅이야. 지네 아버지가 죽으면서 상속을 받았는데 서울에서 살겠다면서 땅을 내놨어. 하지만 속 내용을 보면 복잡해. 내가 듣기로 그 인간 말종이 도박을 하면서 빚을 잔뜩 졌다고 하드만.”
“덩어리가 커서 누가 사기나 하겠습니까? 잘라서 팔면 모를까.”
“이놈은 어떡하든 팔아만 주면 된다고 했어. 자네가 사겠다고 하면 무조건 분할해서 팔 걸세.”
“이 땅 시세는요?”
“그거야 흥정을 해봐야지. 이 자식, 돈이 급하니까 많이 깎을 수 있을 걸세. 어떤가, 해볼 생각이 있나?”
“있습니다.”
“이제 말해봐. 도대체 얼마나 살 생각이야?”
“흥정되는 시세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오늘 중에 주인이 이곳으로 올 수 있을까요?”
“당연히 와야지. 잠깐 기다리게. 내가 연락해 볼 테니까.”
그가 미친 듯이 전화기가 있는 책상으로 뛰어갔다.
전화기를 돌리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최강철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당장에라도 나갈까 봐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다.
그는 전화를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토지 주인에게 무조건 2시간 안에 복덕방으로 튀어 오라고 닦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소파 쪽으로 다가온 그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자식, 지금 노름하고 있는 모양이야. 어쨌든 무조건 인감도장 들고 뛰어오라고 했으니까 2시까지는 올 걸세.”
“잘됐네요. 그럼 아저씨, 그동안 땅을 볼 수 있을까요?”
“봐야지, 당연히 봐야지. 잠깐 기다려. 내가 차를 끌고 올 테니까.”
차도 있는 모양이다.
하긴, 복덕방을 운영하다 보면 기동력이 생명일 테니 무조건 차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성남에서 복덕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차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기대가 무너진 건 그가 차를 가게 앞에 댔을 때였다.
저게 움직이기나 할까. 그가 가게 앞에 오래된 포드를 댔을 때 최강철과 이성일은 입을 떠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엔진 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방방거리고 있었다.
성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분당은 온통 논과 밭뿐이었고 얕은 구릉으로 뒤덮여 거대한 분지를 형성한 곳이라 차를 몰고 들어가다가 결국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여기 일대가 바로 그 땅일세.”
“어디까지죠?”
“이렇게 원을 그리면 될 거야. 아마 저기부터 반대쪽에 커다란 나무 보이지?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걸세.”
“좋군요.”
“이제 돌아갈까. 우리가 가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
“그러시죠.”
복덕방에 앉아서 주인이 타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남자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며칠 동안 밤을 샌 얼굴이었다.
그를 본 복덕방 주인의 초조했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아이고, 어서 와. 시간 맞춰서 잘 왔구먼.”
“땅 살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네. 여기 이 사람이니까 인사나 하지.”
“예?”
김만덕의 시선이 단박에 변했다.
그 역시 땅을 사러 온 최강철의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젊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복덕방 주인의 흥정이 시작된 것은 김만덕 앞에 커피가 놓인 후부터였다.
“만덕이, 이 사람은 자네가 시세만 잘 쳐주면 땅을 사겠다고 하네. 자네는 평당 15,000원에 팔아달라고 했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가격이야. 내가 저번 달에도 더 좋은 땅을 13,000원에 팔았거든.”
“내 땅은 30만 평이나 됩니다. 얼마나 살지 알아야 흥정을 하죠?”
김만덕이 최강철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은 복덕방 주인에게 했지만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최강철이었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가격을 얼마나 부르냐에 따라 결정할 생각입니다. 30만 평 전부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일어나 나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가격을 잘 생각해서 말해주세요.”
“30만 평을 전부 다 살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음… 전부 다 산다면 12,000원에 주지. 어떤가, 이 가격이?”
“말도 안 되는 가격입니다. 저는 그렇게 큰 금액을 주고는 땅을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얼마를 원하는 거야. 이 사람아, 난 15,000원에 내놨다고!”
김만덕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말끝에 힘이 없다. 그는 지금 당장 땅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지난 3달 동안 땅을 보자고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조급해질 대로 조급해진 처지였다.
기다리면 이긴다.
“10,000원이라면 살 의향이 있습니다.”
“뭐라고? 10,000원? 후려쳐도 분수가 있어야지. 무슨 땅값을 그렇게나 많이 깎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안 파실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이고, 이보게. 잠깐 기다리게.”
씩씩거리는 김만덕 대신 복덕방 주인이 일어서는 최강철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김만덕을 향해 인상을 북북 긁어댔다.
억지로 최강철을 자리에 앉힌 복덕방 주인이 대신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봐 만덕이, 자네 지금 땅값 사정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 사람아, 내가 저번 달에 13,000원에 판 건 겨우 1,000평짜리였어. 그것도 분당 쪽은 한 달 만에 판 걸세. 지금 분당 쪽에 땅을 사러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자네, 땅 팔기 싫어?”
“그래도 가격이…….”
“이 사람 놓치면 자넨 아마 땅 팔기 어려울 걸세. 그러니까 잘 판단해서 결정해.”
“너무 싸게 파는 것 같아서 그렇죠.”
“대신 자네 땅덩이리가 크잖아. 작은 땅도 아니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팔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자네가 땅 주인이니까 난 뭐라고 말 못 하겠네. 팔든 안 팔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르고 달랜다.
오랜 경험으로 복덕방 주인은 김만덕의 주저함을 야금야금 지워 버리고 있었다.
자그마치 30억이다.
1988년 1월.
이 돈이면 강남에서 빌딩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었으니 막상 땅을 팔게 되는 순간 그는 성남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김만덕이 인감도장을 내놓은 것은 복덕방 주인이 안 되겠다며 최강철의 등을 떠밀 때였다.
그때부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최강철은 전생에서 회사의 부동산을 전문으로 다뤄봤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절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3일에 걸쳐 김만덕의 땅 30만 평을 이전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중 3만 평은 이성일의 것이었다.
놈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펄쩍펄쩍 뛰었으나 최강철이 계속 설득하자 숨겨놓았던 전 재산을 꺼내 들었다.
모든 이전 절차를 끝내고 이성일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자신을 믿고 커다란 투자를 결정했으니 언제 봐도 이성일은 기특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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