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 *
집에는 성공한 자식이 하나만 있어도 가세가 바뀌게 된다.
최강철은 부모님께 집을 사드린 것에 이어 2년 전 큰형에게 구미에 있는 아파트를 선물했고 큰누나에게도 괜찮은 아파트를 사줬다.
이번에 시집을 가는 둘째 누나의 신혼살림과 아파트를 장만해 준 것도 바로 그였다.
번 돈을 아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시 사는 삶에서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절실했기에 최강철은 틈이 날 때마다 가족들을 돌봤다.
사람의 인연은 질겨서 둘째 누나의 남편은 바뀌지 않고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반가웠다.
술을 좋아해서 그렇지 더없이 착해서 둘째 누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매형은 동사무소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흘렀다.
가족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가난이 최강철로 인해 벗겨지자 그들의 얼굴에는 시름이 걷혀졌고 대신 햇살 같은 미소가 가득 찼다.
둘째 형이 없다.
장기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최근 발령된 비상으로 인해 휴가조차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최강철이 철원을 찾아간 것은 둘째 누나의 결혼식을 3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면회를 신청하고 한참을 기다리자 멀리서 둘째 형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형, 오랜만이네.”
“우하하… 최강철. 세계 챔피언 내 동생 맞지?”
“왜 이래, 쑥스럽게.”
커다랗게 떠드는 최강덕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둘째 형은 여전하다.
사람의 시선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고 진중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지 못한 게 눈으로 보였다.
형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몰렸으나 최강철은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형의 팔을 끌어냈다.
“비상이라도 잠시 나갈 수 있지. 집이 어디야?”
“왜?”
“형네 집 좀 구경하자.”
“돼지우리 구경해서 뭐 하게. 사는 꼴이 엉망이라서 볼 것도 없어.”
“그래도 가. 어떻게 사는지 봐야겠어.”
무작정 앞장섰다.
외출을 끊을 필요도 없었다.
둘째 형이 사는 곳은 부대에서 불과 1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 앞에서 형의 발걸음이 멈췄을 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여기다.
그가 전생에 아버지와 함께 형을 면회 왔을 때 본 곳이 여기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떤 여자가 눈곱을 떼면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은 묵묵히 여자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전생에 형수라 불리었던 여자다.
둘째 형의 삶이 완전하게 망가진 것은 이 여자의 영향이 가장 컸다.
게으르고 욕심이 많았으며 성격도 엉망이라 가족들과의 관계를 모두 해쳐서 결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 간 사람이었다.
방은 엉망이었다.
불과 5평밖에 되지 않은 방은 이불이 그대로 깔려 있었고 옷가지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방 좀 치우라니까!”
둘째 형이 소리를 지르자 여자가 잠깐 눈을 치켜뜨더니 최강철을 확인하고 슬금슬금 이불을 한쪽으로 치웠다.
여자는 아직도 최강철이 누군지 모른다.
형은 1년 전부터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거를 시작했기 때문에 인사를 한 적도 없었다.
“인사해. 내 동생이야. 세계 챔피언!”
“안녕하세요.”
형은 이 사람의 어디가 좋았던 걸까.
군에 있으면서 외로움에 시달려 어쩔 수 없이 만났다면 모를까, 여자로서의 매력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뚱뚱한 몸매, 뺑덕어멈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난 여드름 자국, 심술이 덕지덕지 담겨 있는 입술.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가 타 온 커피를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형과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형은 얼마 안 있으면 제대를 하겠다고 한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사회에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운 것도 없었고 특별한 기술조차 없는 형이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기에는 많은 고난이 닥칠 것이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집안 이야기를 전해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비상이라며. 너무 오래 자리 비우면 안 되니까 그만 들어가 봐.”
“애들이 나 여기 있는 줄 아니까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부르러 올 거야.”
“그래도 들어가. 군인이 자리를 비우면 되겠어? 나도 바빠서 이제 가봐야 해.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거든.”
“어, 그래? 그래서 지금 갈 거야?”
“응.”
“어이, 참. 여기까지 왔는데 형제끼리 소주도 한잔 못 하고 아쉽네. 오랜만에 봤는데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서운한 거 아니냐?”
“곧 다시 볼 텐데, 뭐.”
“하긴 챔피언이 오죽 바쁘겠어. 알았다. 바쁘다고 하니까 일어서자.”
배웅하겠다는 형을 억지로 떼어내 부대로 돌려보냈다.
가는 척하다가 다시 되돌아온 건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게 보였다.
“잠깐 저와 이야기 좀 하실까요?”
“무슨… 말씀을…….”
여자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후 곧바로 눈빛을 세우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형이 좋습니까?”
“예?”
“형이 좋냐고 물었습니다.”
“좋으니까… 같이 살죠.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금방 말한 것처럼 형은 제대를 할 겁니다. 그러면 사회에 나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될 거예요. 형은 아무런 기술도 없고 성격도 진중하지 못해서 직업을 찾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사는 게 힘들어질 텐데 견딜 수 있겠어요?”
“그건… 전 반대하고 있어요. 군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제대를 해요?”
“이렇게 계속 살고 싶어요?”
“난 좋아요. 일단 먹고사는 걱정이 없잖아요.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까 군대처럼 좋은 직장도 없어요.”
“휴우…….”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생충이 따로 없다. 못난 형에 들러붙어 고혈을 빨아먹고 있으니 이 여자는 염치조차 없는 기생충이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긴 한숨을 끊어내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 이 통장에 2천만 원이 들어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이걸 왜…….”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무슨 뜻으로 통장을 내놨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그녀의 탐욕스러운 눈은 벌써 통장에 찍힌 돈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통장은 제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장이 들어 있으니까 언제든지 빼서 쓸 수 있어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이곳을 나간다면 이 돈은 당신 것이 될 겁니다. 다시는 형을 찾지 않겠다는 조건이죠. 어때요,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형이 나를 다시 찾으면요? 내가 안 찾더라도 형이 나를 찾아올 텐데요?”
“그래서 이 돈을 드리는 거 아니겠어요. 형이 찾든 당신이 찾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돈은 회수될 겁니다. 나는 경찰에 당신이 도둑질을 해서 제 통장과 도장을 훔쳐갔다고 말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마 오랜 기간을 유치장에서 지내게 되겠죠.”
“아…….”
“결정하세요. 짐을 싸서 이 돈을 가지고 떠나든가 아니면 이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평생을 사시든가 결정하세요. 저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죠? 나중에 딴소리 하지 않을 거죠?”
“물론입니다. 세계 챔피언이란 제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갈게요.”
그녀가 통장을 가슴에 품더니 부랴부랴 가방을 꺼내서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게을렀던 여자의 몸놀림이 눈부시도록 빨랐다.
먼저 방을 빠져나와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떠날 것이다.
형의 월급은 35만 원에 불과했으니 2천만 원은 거의 5년 치 월급이다. 웬만한 시골에서는 번듯한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에 욕심 많은 그녀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뒤집어지는 게 보였다.
사람의 인연은 무서운 것이라 가급적 관여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여자만은 안 된다.
이것으로 인해 형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녀만 아니라면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랴부랴 도망치듯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연으로 그렇게 많은 슬픔이 찾아왔었단 말인가.
그녀로 인해 울부짖던 어머니의 눈물, 그리고 아버지의 절망, 둘째 형의 비참한 죽음.
이 악연을 여기서 끊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
* * *
누나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치러졌다.
가까운 친지들이 참석했고 복싱 관계자들과 기자들, 심지어 지역구 국회의원과 정치인들까지 몰려왔기 때문에 식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신랑, 신부로 인해 참석한 하객보다 최강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가 배는 많았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정당의 김정수가 보좌관들을 옆에 끼고 다가온 것은 식이 무사히 끝나고 가족사진까지 찍고 난 후였다.
그들은 거드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최강철을 향해 웃으며 다가왔는데 먼저 알은척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권위 의식이 철저하게 몸에 밴 자들이었다.
모른 체했다.
미리 어떤 놈이 와서 국회의원이 나중에 찾아올 거라 언질을 했지만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안녕하신가. 반갑소. 나는 영등포 국회의원 김정수요.”
“아, 예.”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그러시죠.”
그냥 무시하고 싶었으나 옆에 서 있던 보좌관들이 둘러싸듯 위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들에게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괜한 소란을 피워 누나의 결혼식을 망치는 게 싫었을 뿐이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김정수가 여유 있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최강철 선수는 국민들의 영웅입니다. 나는 최 선수가 국민들의 사기를 올려준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소.”
“저는 제 할 일만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 민정당은 수권정당으로서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최강철 선수 같은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며칠 있다가 영등포 지역 주민들에게 의원 보고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거기에 최강철 선수가 참석해 주면 좋겠어요. 최 선수가 참석해 주면 지역 주민들이 무척 좋아할 텐데 물론 가능하시겠지?”
이런 신발 끈을 봤나.
어쩐지 보좌관을 잔뜩 데리고 온 것이 이상했다.
이자는 자신을 이용해서 금년 4월에 벌어지는 총선에 써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본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세상 물정 모르는 복싱 선수라고 판단했을 테니 영웅 어쩌고 칭찬 몇 마디 해주면 발딱 넘어올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네 생각이고…….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데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저는 복싱 선수지 정치인이 아닙니다. 정치는 정치하시는 분들이 하셔야죠. 저 같은 복싱 선수가 뭐 하러 의원 보고회장에 간단 말입니까?”
“최 선수는 영등포 출신이잖소? 그러니까 지역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소?”
“인사는 의원님이 하십시오. 저는 복싱이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최 선수, 그러지 말고 갑시다. 나를 도와주면 내가 나중에 크게 보답하겠소.”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자, 그럼… 더 용무가 없으면 전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계속 보면 토가 나올 것 같은 상판대기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서서 대화를 듣고 있던 놈 중의 하나가 그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이 자식의 상판대기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김정수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콧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을 쏟아냈기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는데 딱 봐도 주먹으로 먹고사는 놈이란 느낌이 들었다.
정치인이 주먹을 쓰는 놈을 데리고 다녀?
“이봐, 최강철. 좋은 말로 할 때 듣지그래. 어디서 감히 현역 국회의원님 앞에서 먼저 일어나겠다는 거야? 죽고 싶어!”
“아, 이 사람아. 살살해. 세계 챔피언을 그렇게 다루면 되겠어?”
얼씨구, 놀고들 있다.
한 놈은 위협을 하고 한 놈은 어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놈의 손을 가볍게 털어내면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이 개새끼들은 내가 아직도 누군지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주먹깨나 쓴 모양인데 다시 한번 내 몸에 손대면 죽어. 믿지 못하겠으면 시험해 봐도 좋아.”
“아니, 이 씨발 놈이…….”
덩치가 쌍욕을 했지만 이미 기가 죽었다.
최강철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르며 놈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건달이라 해도 이런 놈은 단 한 방에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다.
최강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 것은 뒤쪽에서 김정수가 헛기침을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국회의원 어르신, 계속 나를 협박하면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이 봐, 그게 아니고…….”
“지금 밖에는 나를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는 기자들이 최소 30명은 될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협박한다면 밖에 있는 기자들에게 전부 까발릴 테니까 내일 아침 뉴스에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올 겁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계속해 보시고.”
총선이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더니 우습게도 여러 정당에서 찾아와 선거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출마 후보자와 사진을 같이 찍은 다음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한마디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가차 없이 그들의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현재의 정치 수준이 이렇듯 쓰레기다.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복싱 선수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겠다는 발상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저급스러운 행동이란 말인가.
정치는 정치답게.
국민들의 존경 속에서 국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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