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제14장 나의 길
최강철은 짐을 싸면서 윤성호와 이성일을 바라봤다.
두 사람 역시 정신없이 짐을 싸고 있었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줄 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사면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한국에 가자는 말을 처음 했을 때 두 사람은 최강철을 바라보며 오직 두 눈만 끔벅거렸다.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럼블 측에서는 4월에 방어전을 잡아놨는데 누나 결혼 때문에 갑자기 서울에 다녀오자는 말을 하자 입이 떠억 벌어졌다.
결혼식 때문에 가야 한다는데 반대를 하기도 그렇고, 시합을 앞두고 있으니 찬성을 하면서 펄쩍펄쩍 좋아할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귀국이 결정되자 그때부터 정신없이 뉴욕 시내를 들락거렸다.
도전자가 그리 강한 상대가 아니었고 다녀와서 훈련해도 충분하다는 최강철의 설득에 금방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 쌌어요?”
“거의 다 했다. 그런데 넌 무슨 짐이 그렇게 간단해?”
“하하… 그래도 명색이 챔피언인데 짐 보따리 잔뜩 들고 돌아다니면 창피하잖아요.”
“선물은?”
“관장님, 선물은 말이죠. 작고 비싼 거로 하는 겁니다. 그렇게 덩치만 크면 받은 사람이 안 좋아해요.”
“얼씨구, 그래서 넌 작고 비싼 거로 샀냐?”
“그럼요. 보석 덩어리만 잔뜩 실어놨습니다.”
“웃기고 있네.”
“자, 이제 다 쌌으면 출발하시죠. 성일아, 가방 터지겠다. 이 자식아, 옷이나 이런 건 조금 빼!”
“이거 다 미제야. 서울에서는 전부 다 수입품이란 뜻이지. 크크… 서울 가서 패셔너블하게 입고 돌아댕길 거니까 나 말리지 마.”
“패션 좋아하고 있네. 네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나보고 들어달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 그땐 콱 죽여 버릴 거야.”
최강철은 슈퍼스타다.
비록 복싱 팬들에게 절대 지지를 받고 있는 WBA나 WBC가 아니라 IBF챔피언이었지만 인기로 따진다면 그쪽 챔피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력 있는 챔피언이었다.
그랬기에 럼블 측에서는 최강철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철저하게 관리했다.
일행이 공항으로 향할 때 톰슨이 직접 나와 경호원들을 배치해서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을 보면 그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최강철이 공항에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복싱 팬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아니다, 복싱 팬들뿐만 아니라 기자들까지 몰려들었기 때문에 비행기 시간에 맞춰 최대한 늦게 들어갔는데도 공항이 금방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니까 왜 짐을 바리바리 싸서 그 고생이야.
윤성호와 이성일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출국 게이트를 통과했으나 거기서도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벌 떼처럼 달려왔기에 면세점에서 선물을 추가로 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평온은 비행기에 몸을 실은 후에 간신히 찾아왔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비행기가 대한항공이었기 때문인지 최강철이 나타나자 승무원은 물론이고 승객들까지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는데 그들은 마치 전쟁터의 영웅처럼 그를 대했다.
참, 인생역전이다.
갈 때는 이코노미에서 몸을 구겨가며 고생스럽게 갔는데 돌아갈 때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편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출세했다는 게 몸으로 실감 났다.
“강철아, 그거 버튼 눌러봐. 이거 의자가 젖혀져.”
“조용히 좀 해, 촌놈아.”
이성일이 의자의 이것저것을 만지며 떠들어대자 최강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놈은 태어날 때부터 고상하고는 거리가 먼 놈이다.
아름다운 스튜어디스가 통로를 따라 다가온 것은 비행기가 이륙해서 고도를 확보한 후였다.
“뭐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뭐가 있죠?”
“음료수가 있고 와인이나 술도 있어요.”
“그럼 와인 한 잔 주세요.”
“예, 그런데 저… 사인 한 장 해주시면 안 돼요?”
부탁을 해 오는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승객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을 텐데도 그녀는 용기를 내어 최강철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
부드럽게 웃어준 후 그녀가 내민 노트를 받아 들었다.
“혹시 이 노트, 일기장입니까?”
“아뇨… 일기장은 아니고… 그냥 생각날 때마다.”
“알겠네요. 저도 그러거든요. 그런데 이름이 뭐죠?”
“강소연입니다.”
최강철은 거침없이 사인을 한 후 마지막에 그녀의 이름을 함께 적었다.
이왕 서비스를 하려면 기억이 남은 수 있도록 화끈하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돌아가자 옆에 있던 이성일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강철아,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감회가 새롭지 않냐?”
“그러네. 우리나라 말이 참 정겨워.”
“하아, 5년 만이야. 정말 시간 빠르게 지나갔다.”
“인마, 네가 정색을 하니까 이상하잖아. 표정 풀어, 철학자처럼 그러고 있으면 불안하다고.”
“흐흐… 그런가?”
“네 매력은 푼수처럼 떠들 때 빛난다. 그러니까 절대 그런 표정 짓지 마.”
“관장님은 벌써 자네. 어제부터 집에 돌아간다고 좋아하더니 피곤했나 봐.”
“넌 안 피곤해?”
“피곤하다기보다는 가슴이 마구 뛰어. 부모님과 가족들을 볼 생각하니까 너무 설렌다.”
“혹시 관장님, 인혜 누나 관련해서 뭐라고 안 하디?”
“능구렁이라서 말을 잘 안 해.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어야지.”
“벌써 사귄 지 오래됐는데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몇 번 물어봤다가 신경질 부려서 더 이상 안 물어본다. 나이가 한두 개냐. 관장님이 알아서 하겠지.”
“야, 이놈들아. 사람 옆에 두고 뒷담화 까는 거 아니다. 이것들이 틈만 나면 내 욕을 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윤 관장이 가자미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눈만 옆으로 뜬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는데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가 있었다.
최강철이 입을 연 것은 그가 다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잠귀 밝으시네. 관장님,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인혜 누나, 어쩔 겁니까?”
“뭘?”
“프러포즈 안 할 거냐고요?”
“프러포즈는 무슨…….”
“혹시 했다가 차인 건 아니죠? 아니지… 그럴 리는 없는데?”
“잠이나 자라. 우리 일은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이 오지랖 넓은 놈아.”
오랜 비행을 끝내고 기내 방송을 통해 곧 착륙한다는 소리가 들리자 최강철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이성일이 튀어 와서 얼굴을 옆으로 내민 것도 그때였다.
“강철아, 서울이다!”
“서울이 저렇게 예뻤나?”
“정말 예쁘네. 오늘따라 햇살도 좋아서 마치 그림처럼 보인다. 아… 부모님이 나오신다고 했는데 그동안 잘 계셨는지 모르겠어.”
이성일이 말끝을 흐리자 최강철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내면서 손을 흔들던 어머니의 슬픔과 아버지의 걱정 어린 시선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자 이성일의 말처럼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의 그리움이 올라왔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5년이란 긴 시간 동안 미국에서 보낸 것은 모두 전생처럼 비참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인해서였다.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부모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훈련 기간 동안 서지영을 보고 싶어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리움이었고 슬픔이었다.
드디어 착륙한 후 비행기에서 내려 출국 게이트를 향할 때 공항 직원이 급하게 다가왔다.
“최강철 선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말입니까?”
“윗선에서 최강철 선수를 특별하게 모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간단한 입국심사만 마치시고 나가실 수 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VIP 대접을 해주겠다는 뜻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사람들 속에 섞이면 고생깨나 하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대우를 해주겠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VIP용 게이트를 통과해서 빠져나온 건 그리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많은 기자가 그가 나오는 경로에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신문 기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국까지 가세해서 대형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리포터들이 그의 입국을 생중계하는 중이었다.
“지금 최강철 선수가 게이트를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김포공항에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포토 라인에 섰다.
럼블 측에서 공항 쪽에 경호원들을 배치했으나 그냥 빠져나가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기자와 팬들이 몰려 있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한 후에야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을 만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최강철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승용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강철아!”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기다린 끝에 공항으로 나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가슴에 끌어당겼는데 눈물을 펑펑 쏟아내셨다.
따뜻하다.
그 누구의 품보다 어머니의 가슴은 따뜻하고 넓었다.
“엄마, 어디 봐요. 어디 아픈 데는 없죠?”
“이 무심한 놈아, 얼매나… 보고 싶었는데……. 얼매나…….”
한참을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격정을 단박에 떼놓기에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기쁨이 너무나 컸다.
그랬기에 어머니를 안은 채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웃고 계셨지만 울고 계신 것처럼 보였고, 누나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향해 함박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느라고 고생혔다.”
“예, 아버지.”
5년이란 시간 동안 아버지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던 주름살이 훨씬 더 많아졌다.
가슴이 아팠으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청초했던 누나들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어 그를 반겨주고 있었는데 예전에 비해 훨씬 성숙하게 느껴졌다.
5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어 버렸구나.
집으로 들어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는 순간, 참고 참았던 격정이 터지며 눈물이 왈칵 새어 나왔다.
그동안의 외로움과 고생이 부모님의 얼굴을 뵙게 되자 봇물처럼 터져 버린 것이다.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아들의 등을 그저 두들겨 주시기만 했다.
어떤 말로도 아들의 눈물을 막지 못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눈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격정으로 인해 눈물을 보였지만 지금은 해후의 기쁨을 나눠야 하는 자리였지 슬퍼할 자리가 아니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 들었다.
준비했던 시계를 꺼내 앞으로 내밀자 아버지의 표정이 급하게 변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기 때문이다.
“이거 비싼 거 아니냐?”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요. 얼마 안 하는 거니까 차고 다니세요.”
“어디 거여?”
“스위스에서 만든 롤렉스란 시계예요. 두 분이서 같이 차고 다니시라고 한 쌍을 가져왔으니까 꼭 차고 다니세요.”
“아무래도 비싸 보이는데…….”
최우용이 시계를 이리저리 만져가며 중얼거렸으나 최강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해준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시계를 장롱 속에 숨겨놓고 절대 꺼내지 않으실 테니 말이다.
누나들에게는 미리 준비해 온 핸드백을 선물했다.
예쁜 가방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최강숙이 자리에서 거의 반 자나 튀어 올랐다.
“어머, 너무 예쁘다!”
“마음에 들어?”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마음에 안 들어? 너무나 좋아. 강철아, 고마워.”
“너 돈 많이 썼겠다. 이거 비싼 거 아니니?”
“응, 비싼 거야.”
막내 누나에 이어 이번에 결혼하는 둘째 누나까지 나서자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부모님들에게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지만 누나들에게는 사실대로 말해주고 싶었다.
“얼만데?”
“우리나라 돈으로 50만 원 줬어.”
“허억, 정말이야? 아니… 이게 뭔데 그렇게 비싸!”
누나들이 최강철의 말에 기절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월급이 겨우 30만 원에 불과했는데 핸드백 가격이 50만 원이란 말을 듣게 되자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내 여자 친구가 그러는데 그게 여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가방이래.”
“그러니까 어떤 거길래 가방 하나에 50만 원이나 해!”
“샤넬이야.”
“샤넬!”
아마도 누나들은 처음 들어봤을지 모른다.
시장에서 파는 천 원짜리 가방만 들고 다녔던 그녀들이 어찌 세계적인 명품 가방 샤넬을 알겠는가.
그럼에도 최강철은 즐거웠다.
핸드백을 품에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누나들의 모습에서 행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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