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 * *
샤워를 마치고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빠져나오자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군중들의 숫자는 많았다.
그들은 연신 허리케인을 외치며 그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기 때문에 10분 가까이 움직이지 못했다.
윤성호와 이성일, 그리고 럼블 측에서 보내온 경호원들이 아니었다면 더 오래 붙잡혀 있었을 것이다.
더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은 군중들에게 둘러 사인 그의 모습을 정신없이 찍어댔는데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을 멈추고 빠져나가자 호텔까지 쫓아오는 소란을 피웠다.
호텔로 돌아온 후 최강철은 축하 파티를 하자는 윤성호와 이성일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길게 흐르다가 갑자기 딸깍하며 통화가 이루어지며 그리웠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강철입니다.”
-아이구… 장한 내 새끼구나!
“아버지, 저 챔피언 먹었어요.”
-그려그려. 장허다. 정말 잘했어. 근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예, 말짱해요.”
-고생했다, 고생혔어. 그동안 통화를 못 해서 애비가 궁금해 죽을 뻔했어, 이놈아.
“예, 어머니도 잘 계시죠?”
-그럼, 잘 있지. 잠깐만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잠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 후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걱정부터 늘어놓았다.
-많이 맞았는데 얼굴 안 부었냐. 이빨은 괜찮은겨?
“그럼요. 저보다 그 친구가 걱정이죠. 제가 훨씬 많이 때려잖아요.”
-강철아, 화면에서 보니까 많이 말랐던데 뭐 좀 제대로 먹어, 이눔아!
“저, 잘 먹어요. 시합 때문에 체중 조절 해서 그렇지 평소에는 밥도 두 공기씩 먹는걸요. 아마 그 모습 보면 살 빼라고 할 정도로 퉁퉁하다니까요.”
-너는 살 좀 쪄도 된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먹어.
“알았어요.”
-그런데 언제 오냐? 세 달 후면 강희 결혼식 있는데 그땐 올 수 있는겨?
“가야죠. 그렇지 않아도 이번 시합 끝나면 집에 가려고 했어요. 우리 예쁜 엄마 얼굴 보고 싶어서 힘들었거든요.”
-정말… 정말이지?
“예, 꼭 갈게요. 가서 새로 생기는 매형 얼굴도 봐야죠.”
-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와야 헌다. 엄마는… 니가 너무 보고 싶어…….
* * *
돈을 번 이후 6개월 전에 집을 이사했다.
서지영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말부의 고급 주택이었다.
월세가 3천 달러나 되는 곳이었지만 고급으로 지어진 2층 주택으로 넓은 정원이 있었고 이스트리버까지 보여 경치가 좋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레드불스와 회사가 가깝다는 이유였다.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최강철이 사는 집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서지영을 비롯한 미녀 3총사와 황인혜, 레드불스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마크, 피터 등이었다.
오늘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최강철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축하 파티를 하기 위함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즐겼다.
손님들은 최강철과 가장 밀접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그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서지영이 다가온 것은 최강철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일행들과 떨어져 잠시 잔디밭 중앙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강철 씨, 왜 나와 있어?”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얼굴에서 열이 오르네. 바람 쐬러 잠시 나온 거야.”
“그렇구나. 어쩐지 계속 마시더라. 클로이 그 계집애, 주지 말라니까 자꾸 줘서…….”
“하하하… 괜찮아.”
“나, 강철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나왔어.”
“뭔데?”
“언제까지 복싱을 할 거야?”
“그건 왜 묻지?”
“너무 걱정되고 불안해서. 강철 씨는 이제 엄청난 부자잖아. 델 컴퓨터도 대박을 터뜨렸고 시스코도 지금 난리가 아니야. 더군다나 주식하고 지금까지의 이익금만 따져도 1,100만 달러가 넘어. 그런데 왜 복싱을 해.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이제 복싱 그만하면 안 돼?”
“지영 씨, 내가 복싱을 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목적이 달라졌어.”
“뭔데?”
“하나는 내가 복싱을 하면서 즐겁다는 것이야.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고 나를 기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
“강철 씨가 즐겁다는 것은 알아듣겠는데 뒤에 이유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혹시 명예나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넓게 생각하면 비슷하겠네.”
“나는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돼. 나에게는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 다가올 테니까.”
“아… 난 잘 모르겠어. 시합을 볼 때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 저러다가 다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시합에 지고 좌절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늘 불안해.”
“알아, 그 마음.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허리케인이잖아.”
“하아…….”
부드러운 눈길.
처음부터 설득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챔피언에 오른 사람에게 복싱을 그만두라고 말한다는 건 어쩌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철부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강철이 이제 복싱을 그만두길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각의 링 위에서 짐승처럼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최강철의 부드러운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이 남자의 시선은 마치 솜사탕처럼 그의 걱정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마법을 부린다.
“시합이 끝났으니까 우리 할 일이 있어.”
“할 일?”
“그래, 내가 조만간 큰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이제 그 일을 해야 해.”
“그게 뭔데?”
“우린 다음 주에 시카고로 갈 거야. 그러니까 지영 씨가 여행 갈 준비를 해줘.”
“강철 씨랑 나랑 둘만?”
“응.”
“어머… 어쩌면 좋아.”
“왜, 같은 방에서 자자고 할까 봐 겁나?”
“아니… 그건 아니고…….”
서지영이 떠듬거리며 말을 흐렸다.
키스까지는 자주 했지만 아직 그들은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귄 지 1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직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는 최강철의 행동 때문에 머릿속에는 고민이 잔뜩 싸여 있는 상태였다.
클로이와 수잔은 시간이 날 때마다 최강철을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며 성화를 부렸다.
자존심 때문에 물건이 다쳤는데도 모른 채 방치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며 무조건 병원부터 데려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녀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물건이 제대로 서는 남자라면 무조건 한 달 이내에 덮칠 수밖에 없도록 조물주가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한국의 정서가 어떻고, 최강철의 성격이 진중해서 그런 걸 거라며 거품을 물었으나 속으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둘이서만 시카고로 여행을 가자고 하니 가슴이 저절로 떨려왔다.
그녀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기 때문에 시카고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단박에 선물 투자를 머릿속에서 떠올렸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강철이 그녀를 이번 기회에 어떻게 대할 것이냐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최강철의 얼굴에는 슬쩍 긴장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우린 선물에 투자할 거라고. 이제 그 시기가 왔어.”
“시카고에 가자고 했을 때 예상하고 있었어. 그런데 강철 씨, 얼마를 투자할 생각이야?”
“지금 보증 증거금이 15%니까 우리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지?”
“그건 계산을 해봐야 해.”
“그래, 계산해 봐. 우린 풀 베팅을 할 거니까.”
“뭐라고? 말도 안 돼!”
서지영의 홍조가 들어 있던 얼굴이 단박에 하얗게 변했다.
지금 마이더스 CKC에서 보유하고 있는 자금은 1,100만 달러란 거금이 있었으니 풀 베팅 금액은 대충 계산해도 7천만 달러 이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이런 무모한 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강철 씨… 농담이지?”
“아니, 농담 같은 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나는 이번 12월 선물에 풀 베팅을 할 생각이야.”
“왜, 도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잘못하면 힘들게 번 돈을 한 번에 날릴 수도 있어. 난 절대 못 해. 죽어도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더군다나 우린 풀 베팅을 하게 되면 실패했을 때 추가 증거금조차 낼 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파산이라고!”
“지영 씨, 내가 마이더스의 손이란 거 아직도 안 믿는구나?”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강철 씨,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선물 투자의 기본은 제로섬 게임이다.
특정 기간의 정해진 시간에 석유나 농산물, 달러의 가치, 또는 주가 지수의 가격이 오를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를 놓고 머니 게임을 하는 것이 바로 선물 투자였다.
선물 투자의 기본 원칙은 오른다에 거는 사람과 떨어진다에 거는 사람이 동일 거래 계약을 체결했을 때 시장이 이루어지는데 자칫하면 엄청난 이익과 손해를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개인이 선물 시장에 뛰어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가 지수에 투자했을 때의 기본 계약금이 클 뿐만 아니라 만약 내기에서 질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에 오른다고 확신한 사람들은 매수 포지션을, 떨어진다 데 거는 사람은 매도 포지션에 투자를 하는데, 주가 지수의 등락에 따라 이익과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칫하면 파산을 할 수도 있었다.
보증 증거금 15%만 내면 거의 7배에 달하는 베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선물 투자의 위험성 중에 하나였다.
웬만한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던 서지영이 절대 안 된다며 반대를 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강철의 태도는 완강할 뿐이었다.
“지영 씨, 날 믿고 여행 갈 준비나 완벽하게 해줘. 호텔방은 하나만 잡아. 우린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돈을 아껴야 되지 않겠어?”
최강철의 기억에 미국 경제를 파탄시킨 블랙 먼데이는 1987년 10월에 벌어졌다.
일자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선물 투자는 정확한 일자가 필요 없었다.
3월, 6월, 9월, 12월의 셋째 주 목요일이 기준일이었고 블랙 먼데이의 여파는 상당 기간 미국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으니 선물 투자는 최강철에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었다.
태풍이 불어 닥치기 전의 바다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정도의 추억을 준다.
지금의 미국 주식 시장이 그랬다.
연초부터 30% 이상 오른 주식 시장은 장밋빛 미래에 젖어 있었고 실제로도 경기 전망은 온통 화려한 청사진뿐이었다.
그랬기에 12월의 선물 옵션은 매수 계약에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시장 형성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최강철은 치밀하게 움직였다.
매일 매수 계약의 숫자를 확인하며 일주일에 걸쳐 야금야금 매도 포지션 계약을 주문하며 균형을 맞춰 나갔다.
서지영은 그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며 좌불안석을 하지 못했다.
겁이 났다.
한순간의 실수로 1,100만 달러란 거금을 날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일주일 내내 그녀를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다.
설마설마하면서 지켜보던 서지영은 끝내 최강철이 매도 포지션으로 모든 돈을 걸고 빠져나오자 다리에 남이 있던 힘이 모두 빠져나가 비틀대며 휘청거렸다.
미쳤다.
이런 상승장에서 매도 포지션에 풀 베팅을 했으니 눈앞이 깜깜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지영 씨, 왜 그래?”
“나 좀 부축해 줘. 힘이 하나도 없어.”
“사인이란 사인은 혼자 다 해놓고 이러시면 곤란하죠. 천하의 서지영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네. 여자는 여잔가 봐.”
“나… 정말 무서워.”
최강철의 품에 안긴 서지영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델 컴퓨터와 시스코란 신생 기업에 투자해서 완벽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회사가 본격적으로 커 나갈 시기에 최강철이 무모한 투자를 해놨으니 암담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인을 거부하며 버텼다.
마이다스 CKC의 대표이사로서 무조건 안 된다며 이를 악물고 반대를 했으나 최강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결국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최강철이 던진 말 때문이다.
“지영 씨, 끝내 사인을 거부하면 난 마이다스의 유한 주주 자격으로 은행에 가게 될 거야. 설마 나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겠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마이다스에 들어 있는 돈은 거의 최강철의 자금이었으니 그가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녀가 두려움 속에서 결국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일처리를 끝내고 그녀를 가슴에 안은 최강철의 입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동안의 두려움을 한순간에 씻어내 버리는 무한한 달콤함이었다.
“이제 모든 일을 끝냈으니까 나는 지금부터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갈 거야. 그리고 와인을 마신 후 잠자리에 들고 싶어. 지영 씨와 함께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