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 * *
아침이 되자 윤성호와 이성일이 방으로 찾아왔다.
그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바짝 날이 서 있는데 흰소리를 자주 하던 이성일마저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윤성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직되어 있었다.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위해 최강철을 따라 이역만리 머나먼 이곳 미국 땅에 와서 5년이란 시간을 보낸 후 결국 오늘 꿈을 이루는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말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강철아, 잘 잤어?”
“예.”
“혹시 잠을 설친 건 아니지?”
“아닙니다. 푹 잤어요. 관장님도 제가 심장이 튼튼하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럼, 잘 알지. 밥 먹으러 가자.”
“그런데 관장님, 어제 저녁에 어디 갔었어요?”
“내가 어딜 가?”
“방에 가봤더니 없던데요. 혹시 우리 약속 어기고 인혜 누나 만난 건 아니죠?”
“얘가 무슨. 넌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보이니?”
“사랑 앞에서 의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어디 가서 뭐 했습니까?”
“야, 인마. 하도 답답해서 맥주 한잔하고 왔다, 호텔 바에서.”
“거짓말.”
“아이고,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런데. 내가 중요한 시합 앞두고 설마 그런 짓을 했겠냐.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짓이 뭔데요?”
“아, 그게… 에라이!”
어느새 잔뜩 경직되어 있던 윤성호가 손을 번쩍 들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최강철이 말도 안 되는 수작질로 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들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이놈은 대단하다.
나보다 지가 더 긴장해야 정상인데 이럴 때마다 오히려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었으니 정말 심장하나는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일행이 호텔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으며 알은척을 했다.
“허리케인, 파이팅! 난 당신의 팬입니다. 오늘 시합 꼭 이겨주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반겨준다.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그의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온 복싱 팬들이었기에 최강철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물론 프레드 아두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최강철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최고급 호텔답게 아침에 마련된 뷔페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이성일과 윤성호는 긴장하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접시에 음식을 잔뜩 담아 와서 맛있게 먹어댔다.
하여간 먹는 것 하나는 죽여준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최강철이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실 때였다.
“허리케인, 죄송하지만 사진을 같이 찍어주실 수 있나요?”
처음에는 중년 부부였고 그다음에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다가왔다.
그러자 그들을 필두로 거의 20여 명의 사람이 사진을 찍길 원했는데 그중에는 호텔 종업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웃으며 반겨주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서비스쯤이야 언제든지 해줄 수 있다.
* * *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
피터와 샘은 어제 뉴욕으로 날아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무른 후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메디슨 스퀘어가든으로 들어왔다.
복싱 광팬답게 그들은 오픈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경기장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 후 분위기를 살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가 경기장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물밀듯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최강철의 경기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WBA타이틀전의 예매표를 취소하고 부랴부랴 이 경기를 예매했지만 좌석은 2층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IBF 타이틀전 최초로 전 좌석 매진이 되었다는 뉴스를 봤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이런 젠장, 링이 권투 글러브만 하게 보이는구만.”
“샘, 이것도 어디냐. 지금 이 경기를 예매하지 못해서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단다. 그리고 글러브보다는 크지. 이 정도면 충분해. 마음 같아서는 저 앞에 VIP석에 앉고 싶다만 우리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잖아.”
“쩝, 복싱 구경 제대로 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 어라… 저기 브루스 윌리스 들어온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무슨 일인가 확인하던 피터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브루스 윌리스는 다이하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탑 배우였고 미국 국민들이 호감도 1순위에 뽑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브루스 윌리스의 출연은 서막에 불과했다.
시합 시간이 다가오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주인공 빌리 크리스탈과 맥 라이언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들어왔고 불세출의 복싱 영웅 슈가레이 레너드가 나타났다.
계속 이어지는 스타들의 입장에 관중들은 연신 박수를 보내며 그들을 환영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
“왜?”
“저런 스타들이 왜 여길 나타나는 거지? WBA 쪽으로 안 가고?”
“넌 그래서 아직도 멀었다는 거야. 돈 킹은 이런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냐. 내가 알기로 톱스타들한테 VIP 입장권을 100장이나 뿌렸단다.”
“그거 진짜냐?”
“돈 킹의 사업 수단이 그래. 화제를 뿌려서 흥행에 성공시키는 데는 귀재거든.”
“그런데 나한테는 왜 안 보내.”
“어이구, 지랄한다.”
“최강철 인기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스타들이 몰려드는 거 보면.”
“돈 킹이 입장권 뿌려서 그렇다며?”
“야, 생각 좀 하고 살자. WBA를 주관한 밥 애런은 가만있었겠냐. 그놈도 무지막지하잖아. 모르긴 몰라도 돈 킹 버금가게 입장권을 뿌렸을 거다. 스타들이 여기로 몰리는 건 마크 브릴랜드보다 최강철의 인기가 더 많다는 뜻이야.”
“하긴, 최강철 복싱 스타일은 끝내주지. 그래서 우리도 여기에 와 있는 거 아니겠어. 난 최강철 그놈이 시합하는 걸 볼 때마다 슈퍼맨이 생각나. 이상하게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처럼 보인다니까.”
“거기서 슈퍼맨이 왜 나와. 나이 잔뜩 처먹고 아직도 슈퍼맨이 네 우상이냐?”
“우상은 아니고 가장 좋아하는 놈이기는 하지.”
* * *
이종엽과 윤근모는 마이크를 잠시 내려놓고 앞에 놓인 물병을 들었다.
그들은 3일 전에 넘어와 위성중계를 준비했는데 그동안 정신없이 움직이며 두 선수의 프로필과 주요 시합에 대한 분석 자료를 정리했고 최강철의 인터뷰를 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도 그들의 앞에는 5통의 물병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한 통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박이다.
최강철의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80만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무려 40개의 광고가 유치되어 오히려 이익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그들이 잠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건 광고가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 위원님, 이 경기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 복싱이란 게 워낙 의외성이 있는 거라서 말이야. 더군다나 둘 다 정상급이잖아. 잘못 맞으면 가는 거지, 뭐.”
“그래도 최강철이 이기지 않겠어요?”
“나도 그러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KO승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이겨줬으면 좋겠다.”
“여기 와서 보니까 최강철의 인기가 정말 하늘을 찌를 것 같아요. 국내에서도 그러더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어요.”
“최강철의 복싱 스타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게 돼. 그런 게 국적을 넘어서 인기를 만들어낸 비결이지 않을까.”
“휴우… 떨리는데요. 오픈 게임이 전부 끝났으니 곧 시작하겠군요.”
“벌써 나오는구만. 저기 저 사람이 IBF회장 로버드 리야. 그 옆이 부회장이고. 돈 킹도 보이네.”
“그렇군요. 이제 본 게임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종엽은 링으로 사람들이 속속 올라가는 장면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광고가 끝났다는 PD의 사인이 들어왔다.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여기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입니다. 드디어 조금 후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 허리케인 최강철 선수와 프레드 아두의 IBF 세계 타이틀전이 벌어지겠습니다. 최강철 선수는 83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17전 전승 KO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챔피언인 프레드 아두는 36승 2패, 25KO승을 기록하고 있는 강펀치의 소유자들입니다. 아, 화면에서 최강철 선수의 모습이 잡히고 있습니다. 이제 출전을 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는 모습입니다. 최강철 선수 반드시 이겨주기를 바랍니다… 문을 나서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가 드디어 챔피언을 탈환하기 위해 당당히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 * *
“또 오줌 마려워요?”
“아니.”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말 시키지 마. 지금 표정 관리 중이야. 카메라가 내 모습을 잡고 있잖아. 최고로 멋있게 보여야지. 우리 부모님이 지금 이 모습을 보실 텐데.”
“어이구, 성일아. 너도 그래서 잔뜩 폼 잡고 있는 거냐?”
“아니, 난 원래 표정이 이래. 조금은 도도하고 조금은 날카롭잖아.”
“네가?”
“응.”
“이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이성일의 대답을 들은 최강철의 입에서 하품이 터져 나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인정을 하지.
지금 그들의 앞과 뒤에는 2대의 카메라가 따라오며 촬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복싱 경기는 언제나 도전자가 먼저 출전한다.
따라서 최강철은 프레드 아두보다 먼저 복도를 따라 경기장으로 들어섰는데 문이 열리는 순간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이미 뒤따라온 카메라에서 찍은 최강철의 모습을 장내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전광판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얼마나 커다란 함성이었는지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자 2만 명을 수용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이 관중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손을 번쩍 들어 그들의 성원에 응답하며 당당하게 걸어 링으로 들어가자 다시 한번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관장님도 손 한번 번쩍 드시지 그래요.”
“나도?”
“그래요. 그래야 멋있게 보일 거 아닙니까?”
“너, 시합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맞아볼래!”
“하하하…….”
“강철아, 나 긴장 안 했어. 오줌도 안 마렵고. 그러니까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제부터 집중해.”
“알겠습니다.”
“준비한 전략대로 나간다. 하지만 불리해지면 상황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거 잊지 마. 저놈 어떤 전략을 수립해서 나왔는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윤성호가 눈을 들어 반대쪽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는 프레드 아두가 입장하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당당했고 관중들의 함성에 반응하는 모습도 여유가 있었다.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옆에서 수건으로 최강철의 목덜미를 주무르던 이성일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놈은 레프트 잽에 이어서 무조건 레프트 보디가 따라 나온다고 봐야 해.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라서 쉽게 고치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라이트 훅. 대부분 저놈의 라이트 훅에 쓰러졌다는 거 잊지 마.”
“알고 있어.”
“저놈 패링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도 좋아. 절대 거리를 줘서는 안 돼. 알았지?”
“그래.”
이성일의 말을 들으면서 최강철이 자기 코너에서 가볍게 펄쩍펄쩍 뛰었다.
프레드 아두는 관중들의 함성을 받으며 링에 올라와 있었는데 사각의 링을 한 바퀴 돌면서 자신 있게 주먹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최강철의 코너 쪽에 오면서 글러브 낀 주먹을 내밀어 서 있던 최강철의 주먹을 건드리며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저번에 보니까 내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너는 온실 속의 화초가 맞다. 초식동물이란 말도 맞고. 그러니까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덤비지 말고 잘 도망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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