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89화 (89/308)

[89]

* * *

레오나드 보삭과 로하스는 PUB에서 맥주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6년 전 스탠포드대학의 컴퓨터를 상호 연결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했다가 친해진 사이였다.

연구에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고 스탠포드대학은 연구를 중단한 채 모든 지원을 끊어버렸지만 그들은 4년간의 연구 끝에 각 단과대별로 한 대에 10만 달러가 넘는 ARPA네트워크 기기를 설치하는 대신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상호 연결하여 로컬 프로토콜(Protocol)을 접속할 수 있는 운용코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레어나드 보삭과 그의 아내인 샌디 러너가 ‘시스코 시스템즈’란 회사를 설립했으나 본격적인 사업은 1986년 시스코 최초의 멀티 프로토콜 라우터인 어드밴스드 게이트웨이 서버(AGS)를 출시하면서 시작했다.

모든 게 열악했다.

거의 6년 동안 신용카드와 융자로 연구비를 감당했기에 생활은 피폐해졌고 레이너드 보삭의 생활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지치고 힘들었다.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뭉쳐 오랜 시간을 버텨왔지만 가족 간의 불화와 심리적인 고통은 한계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어드밴스드 게이트웨이 서버(AGS)가 판매되면서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보삭,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지. 벌써 6년이 흘렀네.”

“그렇구만.”

“표정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이 있어?”

“휴우… 샌디가… 이혼을 결심한 것 같아. 어제 저녁, 집에 없길래 찾아봤더니 이게 나오더군.”

레오나드 보삭이 쓴웃음을 지으며 주섬주섬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건 이혼 신청 서류였는데 서류를 펴자 선명하게 그의 아내인 샌디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음…….”

“아이들까지 데리고 친정에 간 것 같아. 참 착한 여자였는데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야.”

그의 눈에서 흘러나온 아픔은 간절한 후회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6년 동안 연구 때문에 가정을 등한시했고 연구비와 시설 비용을 대느라 집까지 잡혀가며 융자와 신용카드를 썼기 때문에 아내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 왔다.

아내 역시 최근까지 그를 도우며 회사 일에 참여해 왔으나 3달 전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회사 일을 그만두었다.

아내는 연구와 회사 일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경제난에 시달리면서 최근 우울증까지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아내를 위로하지 못했다.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고통을 뒤로한 채 온통 일에만 매달렸다.

아내의 이혼 통보는 모든 것이 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원망하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었다.

“보삭, 어쩔 생각이야?”

“난 샌디를 사랑해. 절대 이혼은 할 수 없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우리 사정이 이 모양이니… 자네 앞에서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좋아질 거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캐서린은 믿지를 않아.”

“우리가 병신이지, 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미친 짓을 해서……. 연구나 하던 놈들이 사업을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애초부터.”

“하긴, 자네는 연구나 어울리지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긴 해.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제 수익이 올라오고 있잖아.”

“너무 후회가 돼. 너무나…….”

레오나드 보삭이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벌컥벌컥 들이키며 울분을 달랬다.

동병상련이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처지였으니 누구를 위로할 여유조차 없었다.

비록 로하스는 투자를 안 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없는 형편에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시스코에서 일하는 바람에 아내가 매일같이 잔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로하스의 입이 열린 것은 맥주를 단숨에 반이나 마신 레오나드 보삭이 서류를 접어서 자신의 품에 우겨넣을 때였다.

“보삭, 찾아가 봐. 가서 샌디에게 잘못했다고 빌어. 어쩌겠어. 설득해서 데려와야지.”

“나도 그럴 생각이야. 안 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단 말일세. 그녀 없이 산다고 생각하면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내일이라도 당장 가.”

“내일은 안 된다는 거 자네도 잘 알면서 그래. 먼 곳에서 오는데 약속을 깰 수는 없잖아.”

“아, 그 약속이 있었다는 걸 깜박했네. 그런데 그 친구가 우리를 왜 보자고 하는 거지?”

“정확한 건 말하지 않더군. 그냥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상의하고 싶다고 했을 뿐이야.”

“전화한 놈이 혹시 사기 치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그 유명한 허리케인이 왜 우릴 찾아오겠어.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해.”

“나도 처음에는 너무 이상해서 의심했는데 워낙 간곡하게 말해서 일단 오라고 한 거야. 진짜 허리케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 거절해도 되니까.”

“그런데 진짜 허리케인이 나타나면 어쩌지. 정말 그가 나타난다면 난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

“그러게나 말이다.”

정말 거대한 나라다.

같은 나라의 도시끼리도 시차가 몇 시간씩 차이가 날 정도니 미국이란 나라의 땅덩어리는 얼마나 큰 걸까?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까지 1시간가량 운전하는 동안 세 여자가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이 여행에는 황인혜까지 따라붙었는데 그녀가 델 컴퓨터와의 투자 협약서 초안을 전부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와, 뉴욕하고 다르네. 도시가 여유가 있잖아.”

“나는 샌프란시스코는 태어나서 처음이야. 그런데 정말 예쁘다. 책에서 보니까 여긴 바닷가가 정말 아름답데. 강철 씨, 우리 일 끝나고 바닷가도 구경하자.”

“너희 둘만 가지 마라. 우리도 보고 싶으니까. 언니, 우리도 같이 가요.”

“싫어. 데이트하는 데는 안 따라가. 눈꼴시어서 그 꼴을 어떻게 보니? 클로이, 그러지 말고 쟤들 데이트하면 우린 다른 데 놀러 가자.”

“안 돼요. 감시해야 해. 일하러 와서 쟤들 둘만 황홀한 시간을 보내는 걸 어떻게 봐. 그건 절대 안 돼.”

“클로이, 그러지 마. 난 네가 죤하고 데이트할 때 한 번도 안 따라갔잖아!”

정말 난리가 아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을까. 세 여자가 서로 떠들어대는 바람에 귀가 다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수다는 시내에 도착해서 약속 장소로 향하자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왔으니 이제부터는 일에 전념해야 될 시간이란 걸 우뚝 솟아 있는 빌딩들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대학을 가로질러 데일리시티로 들어간 후 보삭이 가르쳐 준 삼 층 건물을 찾은 후 근처 커피 파는 곳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아직 약속 시간은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아, 델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이 회사는 이제 겨우 수익이 생기는 회사야. 내가 미리 확인해 봤는데 작년 매출이 겨우 50만 달러였어. 그것도 순이익은 10만 달러밖에 안 돼.”

“알아. 하지만 엄청나게 유망한 회사야. 앞으로 이 회사는 퍼스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 매출액이 크게 올라갈 거야.”

“휴우, 우리 강철 씨. 뭘 믿고 이렇게 큰소린지 모르겠네.”

“하하하… 우리 회사 이름이 마이더스잖아. 그리고 내가 그 황금 손의 주인인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여긴 얼마나 투자할 생각인데?”

“그건 협의를 해봐야지. 그 사람들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무작정 왔기 때문에 협의를 해 봐야 해. 자, 들어가자. 시간 됐어.”

최강철이 먼저 움직였고 그 뒤를 여자들이 따랐다.

시스코는 건물 2, 3층을 쓰고 있었는데 낡았지만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30대 중반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들은 최강철이 들어서자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데 그 뒤로 아름다운 여자들까지 본 후에는 제대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니, 저… 허리케인, 진짜 허리케인 맞군요.”

“미스터 보삭, 반갑습니다.”

“우와, 내 눈으로 직접 허리케인을 보게 되다니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네요.”

“인사하시죠. 여기는 저의 동료들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세 명의 여자가 일제히 손을 내밀자 두 남자가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약한 법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레오나드 보삭이 부랴부랴 소파에 자리를 마련하고 커피를 가져온다며 수선을 피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건 자리가 정리되고 간략한 인사와 소개를 끝난 후부터였다.

“보삭, 전화로 간단하게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신들의 사업에 투자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계속해서 궁금했는데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허리케인, 당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나 투자를 하겠다는 겁니까?”

“당연히 알고 왔죠. 두 분이 개발한 건 컴퓨터 연결망을 구축하는 장비 아닌가요?”

“그걸 어떻게… 혹시 우리들에 대해서 조사를 했나요?”

“당연한 거죠. 투자를 하기 위해서 조사는 기본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도 알고 왔습니다. 작년 매출액이 50만 달러고 순이익은 10만 달러 정도 되더군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융자 금액이 합해서 30만 달러라는 것도 압니다. 내년 2월까지 빚을 갚지 못하면 저당 잡힌 집이 날아간다는 것도요.”

“음…….”

“원래 사업 초기는 전부 어렵게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좋은 투자자를 만나게 되면 그 어려움은 금방 사라지게 되죠. 저희 회사는 좋은 투자자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회삽니다.”

“허리케인, 개인이 투자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투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분이 대표로 있는 마이더스 CKC의 이름으로 투자가 진행될 겁니다. 마이더스 CKC는 투자 전문 회사로서 상당한 자본금을 가지고 있는 유망 기업입니다.”

“혹시 얼마를 투자하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지분에 따라서 다르죠. 먼저 묻겠습니다. 보삭, 저희에게 얼마까지 지분을 양도하실 수 있습니까?”

최강철이 되묻자 레오나드 보삭과 로하스의 눈이 급하게 부딪쳤다.

투자에 대한 상담을 목적으로 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진행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고민은 길지 않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보삭이었다.

“우리가 50%의 지분을 드리면 얼마를 투자할 수 있죠?”

“저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시스코의 현재 가치는 모든 것을 합한다 해도 100만 달러에 미치지 못합니다. 물론 기술 개발에 대한 포지션은 제외하고 산정한 것이죠. 어떻습니까, 저희 분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음…….”

잘못될 리 없었다.

그들은 시스코의 현재 가치를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100만 달러는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보삭은 이를 악물고 최강철의 말을 부정했다.

“현재 가치는 그럴지 몰라도 미래 가치는 다릅니다. 우리 시스코의 미래 가치는 무궁무진하단 말입니다. 벌써부터 기업들로부터 시스템 구축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고 있는 상태요. 그러니 현재 가치로 투자 금액을 산정하겠다면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삭은 50%의 지분에 대해서 얼마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미래 가치와 더불어 기술 개발 비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청춘을 바쳐왔단 말입니다. 그러니 300만 달러 정도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봐, 보삭… 그건 너무……!”

“가만히 있어!”

로하스가 듣고 있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급히 입을 열자 보삭이 손을 치켜들어 완강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곧장 최강철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후 답변을 강요했다.

하지만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비껴냈다.

“미스터 보삭, 당신의 뜻이 어떤 건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알고 계셔야 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투자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자선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나는 그 금액에서 한 푼도 내릴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대신 뭡니까?”

“경영권을 내드리지요. 50%의 지분과 경영권이라면 괜찮은 조건 아닙니까?”

“그럼 당신은 어쩌시려고요.”

“경영은 당신네 쪽에서 하고 나는 기술 담당 부사장 자리를 맡겠습니다. 계속 고민해 왔지만 아무래도 경영은 나와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 회사를 키우든 말아먹든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 내가 부사장 자리를 맡아서 기술적인 부분들을 해결하면서 돕겠습니다.”

“음… 300만 달러는 너무 큽니다. 경영권을 넘기신다니 55%를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면 투자를 하겠습니다.”

시스코의 미래 가치를 감안한다면 300만 달러란 금액으로 경영권과 지분의 55%를 확보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배짱을 부린 건 그들의 태도에서 약세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확신을 하고 있는 자와 의심을 가진 자의 싸움은 언제나 확신을 가진 자의 승리로 끝나는 법이다.

결국 보삭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상했던 것처럼 레오나드 보삭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300만 달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큰 협상이 끝나자 최강철은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섰고, 대신 미녀 삼총사가 나서서 투자 협약에 관한 세부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지영과 황인혜는 델 컴퓨터에 지분을 투자하면서 세부적인 업무 내용에 빠삭했고 클로이 역시 마이다스에서 기업 투자 관리을 전담했기 때문에 실무적인 부분에 능통했다.

최강철은 세부 내용 협의를 그녀들에게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져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지분을 확보해서 수익을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왔는데 레오나드 보삭은 아예 경영권까지 넘기겠다고 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에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판단이 들었다.

좋다.

새로운 패턴의 투자였으나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스코를 장악하는 건 전문 경영인을 앞장세우고 어둠 속에서 세계를 움직여 나가는 그림자 경영의 첫 출발이었으니 기꺼이 그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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