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제13장 블랙 먼데이
최강철은 4번의 경기에서 벌어들인 대전료가 들어올 때마다 GE, IBM의 주식을 사들였다.
일종의 포트폴리오다.
코카콜라와 버크셔 해서웨이에 투자한 금액은 2년이 지난 지금 원금에서 50%나 오른 200만 달러가 되었기 때문에 단기간의 안전성을 위해 분산투자를 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대전료로 벌어들인 원금 300만 달러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380만 달러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코카콜라와 버크셔 해서웨이에 투자했던 것까지 모두 합하면 그의 주식 자산은 무려 580만 달러가 되어 있었다.
마이더스 CKC의 사무실은 뉴욕 외곽의 변두리에서 빠져나와 뉴욕 시내에 자리를 잡았는데 사무실 크기가 무려 70평에 달했고 직원 숫자도 서지영까지 합해 5명이나 되었다.
델 컴퓨터에 투자한 것이 대박이 났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관리할 직원이 필요했고 주식을 담당할 직원도 필요해서 서지영이 충원했다.
재밌는 것은 그중에 클로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델 컴퓨터가 대박이 나면서 정신없이 바쁘던 서지영을 잠시 도와주다가 눌러앉았는데 델 쪽을 전담하고 있었다.
델 컴퓨터는 최강철이 투자한 후 1년 반 만에 7,000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리며 미친 듯이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무서울 정도의 신장세였다.
이익의 상당 부분을 재투자했으나 최강철에게 돌아온 수익이 무려 300만 달러나 되었으니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강철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서류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던 서지영이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서류를 보던 클로이는 얼마나 바쁜지 손만 들어 보이고는 곧장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강철 씨, 어서 와.”
“바쁘네, 뭐가 그렇게 바빠?”
“델 쪽에서 신규 투자건에 대한 서류가 도착해서 클로이와 검토하는 중이었어. 오스틴 쪽에 2만 평 규모의 공장을 새로 신축해야 된대. 이틀 안에 검토 끝내고 서류를 보내달라고 해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중이야.”
“벌써 3번째 공장인가?”
“응. 사업이 정말 무섭게 확장되고 있어. 어떨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야.”
“이번 분기에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 돈은?”
“95만 달러 정도 될 것 같아. 어쩌면 더 될 수도 있고.”
“델이 잘하고 있구나.”
“강철 씨, 사무실에 아무래도 회계 전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뽑으면 안 될까?”
“걱정 마. 곧 올 거야.”
“정말?”
“응, 내가 이미 말해놨거든. 지영 씨도 잘 아는 사람이야.”
“어머, 그 사람이 누군데?”
“인혜 누나.”
“그 언니는 절대 안 온다고 했잖아.”
“우리 회사 자본이 천만 달러가 넘으면 이곳으로 오기로 약속했어. 하하하… 그 누나 약속을 지키라고 하니까 엄청 황당해하더라.”
최강철이 재밌다는 듯 유쾌하게 웃자 서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최강철의 웃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서지영이 바라보고 있어도 멈추지를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 누나 표정이 너무 웃겼어. 약속 안 지키면 관장님 못 만나게 한다니까 도끼눈을 부릅뜨면서 얼마나 신경질을 내던지.”
“호호… 강철 씨, 못됐다.”
“아마 다음 주면 이곳으로 출근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아.”
“응, 알았어.”
최강철의 말에 서지영이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녀는 일 년 전 최강철과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아예 말바에 있는 본가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졸업 전부터 회사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영 씨, 이제 주식들을 처분해야 되겠어.”
“주식을?”
“응, 지영 씨가 주가 동향을 파악하면서 두 달 이내에 모두 처분해 줘.”
“지금 주식 시장이 상승세야. 이대로 두면 이익이 계속 날 텐데 왜 처분을 해?”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하긴, 사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4달 후면 미국 경제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블랙 먼데이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경제는 언제나 붕괴 이전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며 화려하게 타오른다.
마치 지금의 미국 경제처럼.
“다른 곳에 투자해야 돼. 그러니까 꼭 두 달 이내에 전부 처분해서 현금을 확보해 놔야 해. 무조건, 알았지?”
“어디에 쓸 건데?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또 그런다. 신비주의!”
“하하, 미안. 클로이, 잠깐 이리로 와볼래!”
서지영이 도끼눈을 뜨자 최강철이 웃으며 시선을 돌려 서류에 파묻혀 있는 클로이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빼꼼 들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 사람 참, 둘이 예쁘게 데이트하다가 갑자기 왜 불러. 나 이거 이틀 안에 끝내서 보내줘야 한단 말이야.”
“클로이한테 말할 게 있어서 그래.”
“중요한 거야?”
물으면서 그녀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 역시 이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이 최강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은 편안하게 했지만 회사에서는 직원이란 신분을 잊지 않았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것은 클로이가 다가와 서지영의 옆에 앉았을 때였다.
“내 말 잘 들어. 우린 다음 주에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간다.”
“출장?”
“그래, 출장. 기업 투자에 대한 건 클로이가 전담하니까 같이 가야 돼.”
“우리가 또 투자를 한다고? 어느 회산데?”
“아직 회사는 차리지 않았어. 대신 우린 앞으로 회사를 차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야.”
“아, 답답해. 그 사람이 누군지 가르쳐 줘야지?”
“레오나드 보삭!”
현재 그의 기억 속에 델과 함께 남아 있는 유일한 인물, 레오나드 보삭.
전생에서 죽기 한 달 전 경제 전문지를 읽은 적이 없었다면 절대 기억할 수 없던 인물이기도 했다.
* * *
IBF(국제 복싱 연맹)은 1983년 미국에서 태동된 신생 기구로 WBA의 체제를 따라 17체급의 챔피언을 배출했다.
그러나 권위 있는 WBA와 WBC가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이 보유한 우수한 선수들이 IBF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제제했기 때문에 한동안 유명무실한 단체로 지내야 했다.
복싱의 강호들이 몰려 있는 중남미 선수들은 물론이고 일본에서조차 외면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인기가 없는 경량급은 한국 선수들의 독무대가 되어 한때 6명의 챔피언을 보유할 정도였다.
중량급 세계 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던 박종팔이 IBF 세계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이 WBA, WBC와 달리 IBF 1위에 오른 건 무작위로 랭킹을 올린 IBF 측의 일방적 조치에 의한 것이었다.
태동한 지 4년이 지나도록 IBF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며 죽을 쓰자 양대 기구에서 서서히 압박을 풀어줬는데 그때를 이용해서 그들은 강한 선수들을 랭킹에 올려놨다.
일종의 무시였다.
아무리 용을 써도 후발 기구인 IBF가 복싱의 양대 축을 이루는 WBA와 WBC를 절대 따라올 수 없다는 자신감이 그런 관용을 베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관용이었다.
IBF에서 랭킹에 올려놔도 해당 선수들이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기 때문에 랭킹에 있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유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회장 선거에서 탈락한 후 돈 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WBA에서 뛰쳐나온 IBF의 회장 로버트 리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원대한 꿈을 가진 채 IBF를 만들었으나 기존 조직들의 반발로 인해 선수 수급이 어려웠고 복싱 강자들이 몰려 있는 중남미와 일본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챔피언다운 챔피언을 보유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초창기에는 퇴물 취급을 받던 전직 챔피언들에게 벨트를 그냥 선물했을까.
그나마 중량급은 덜했으나 미국에서 천대받는 경량급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참여한 한국과 인도네시아에게 챔피언을 전부 배정할 정도였으니 정말 하품이 나올 일이었다.
조직을 창설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IBF는 전 세계 복싱 팬들에게 3류 기구로 치부되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돈 킹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부회장 마이클 샘과 다음 달에 벌어지는 경량급 타이틀전에 대해서 상의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 달에는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2개의 경기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자국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해서 흥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챔피언도 변변찮고 도전자 역시 무명에 가까운 놈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돈 킹은 그의 가장 커다란 후원자였다.
비록 WBA 신임 회장과 관계가 틀어져 문제가 생겨 그를 지원한 것이겠지만 복싱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대했고 세계 타이틀전에 대부분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아이고,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로버트, 오늘 약속 없으면 저녁에 식사나 같이합시다.
“저녁을요? 어디서요?”
-팔마호텔 레스토랑에서 봅시다. 6시에.
“알겠습니다.”
간단한 통화가 끝나자 로버트 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은 뭔가 커다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측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돈 킹이 만나자고 할 이유가 불분명했다.
팔마호텔이라면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 위치했기에 부회장을 뒤에 남겨놓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벌써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로버트.”
“그렇군요. 종종 전화를 드려야 했는데 워낙 바빠서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끼리 죄송은 무슨. 그래, IBF는 잘 돌아갑니까?”
“아시는 것처럼 그 자식들이 처음에 워낙 훼방을 놨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여파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이제 간신히 모든 체급의 챔피언들을 배출해서 방어전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힘들지요?”
돈 킹이 불쑥 입을 열자 로버트의 안색이 변했다.
질문의 요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돈 킹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건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곧 좋아질 겁니다.”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팬들이 IBF 경기는 볼 생각을 안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좋아지겠소.”
“그거야…….”
“난 당신을 믿고 10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오?”
“WBA와 WBC에 경고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푸하하… 내가 겨우 그것 때문에 100만 달러란 거금을 투자했겠소?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오. 나는 내 돈을 허투로 쓴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럼 무엇 때문에… 돈 킹,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투자는 말이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하는 짓을 보니 너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야. 이보시오, 도대체 당신 그렇게 해서 언제 내 돈을 갚을 생각이오?”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조금만 참아주시죠. 조만간 좋아질 겁니다.”
“4년 동안 원금은 물론이고 이자 한 푼 받지 못했소. 그런데도 무턱대고 기다리란 말이오?”
“회장님…….”
“나는 IBF가 최대한 빨리 반석 위에 올라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어렵소. 약한 챔피언에 이름조차 없는 놈들을 도전시켜서 무슨 인기를 얻냐는 말이오. 그래서 무슨 돈을 벌어!”
“무슨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있으니 왔지.”
“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님이 조언을 해주시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웰터급의 프레디 아두와 최강철을 붙입시다.”
“그건… 그건 곤란합니다. 회장님, IBF가 이나마 버티고 있는 건 프레디 아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프레드 아두를 챔피언에 올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로버트 리가 그동안 공손했던 자세를 풀면서 눈을 빛내자 돈 킹의 얼굴에서 웃음이 번져 나왔다.
이 자식은 가진 건 뺐기지 않고 남의 것은 갖고 싶어 하는 나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하긴, 지금의 이놈 입장에서는 이해도 되었다.
IBF의 허깨비 챔피언들 중에서 프레드 아두는 특별하게 정상급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프레드 아두는 WBA와 WBC 3위에 올라 있는 강자였는데 지금까지의 전적은 36승 2패, 25KO승 이었다.
로버트 리가 프레드 아두를 설득해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IBF 부회장인 마이클이 그의 삼촌이라는 인맥 관계가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프레드 아두는 최강철 못지않게 인기가 있는 복서였다.
워낙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펼치며 화끈한 경기를 했기 때문에 미국의 복싱 팬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IBF를 상징하는 웰터급의 챔피언이었다.
“최강철의 인기는 프레드 아두보다 훨씬 좋소. 두 놈을 붙이면 전 세계의 이목을 한꺼번에 끌어올 수 있소.”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죠. 나는 최강철 그놈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최강철이 이긴 후 타이틀을 반납하고 WBA나 WBC 타이틀에 도전하면 우린 닭 쫓던 개가 됩니다. 회장님은 새로운 챔피언이 결정되면 WBA나 WBC 쪽에 최강철을 다음 도전자로 만들 거 아닙니까?”
“그건 프레드 아두도 마찬가질 텐데. 그놈이 계속해서 IBF 챔피언으로 만족하겠소?”
“그놈은 다릅니다. 그놈을 스카우트하면서 최소 7게임은 무조건 뛰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요. 이제 2번밖에 경기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5번이나 남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 제안을 거부하겠다?”
“돈 킹, 그동안의 도움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어쩔 수 없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타이틀전 포함해서 3게임. 최강철이 만약 이긴다면 IBF에서 3게임을 뛰는 것으로 하지. 어떻소, 매력적인 제안이지 않소?”
“정말… 그렇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대신 마지막 한 게임은 통합 타이틀전이요.”
“으… 통합 타이틀전, 그 자식들이 들어주겠습니까?”
로버트 리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돈 킹의 말대로 최강철이 통합 타이틀전을 벌여준다면 그로서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었으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WBA나 WBC는 IBF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킹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건 나한테 맡기고… 당신은 일정이나 잡으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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