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 * *
서지영은 영화가 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가장 핫한 배우이자 절세의 미남으로 알려진 톰 크루즈가 주연이었고 탑건이란 영화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옆에는 그보다 훨씬 더 관심이 가는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영화.
아,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태연한 척했으나 사무실을 나와 시내로 향하는 동안 얼마나 가슴이 설렜는지 모른다.
바보가 되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웃음을 만들어주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가 잘라준 고기를 먹으며 최대한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의 스테이크를 잘라주고 싶었지만 너무 속이 보이는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영화관으로 들어와 어둠 속에 잠기자 가슴속의 설렘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어깨와 자신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부딪치며 전율을 만들어냈기에 제대로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아…….
그는 영화가 시작되자 정신없이 영화에 몰두했는데 자신이 살금살금 쳐다보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잘생겼다.
옆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어둠 속이 만들어낸 음영을 받아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남자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앗.
그의 얼굴을 훔쳐보다가 화면에서 야한 장면이 나오는 걸 확인하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톰 크루즈와 섹시 배우 캘리 맥길러스가 키스를 하면서 진한 애정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얼굴이 붉어졌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둔 남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과 배우들의 뜨거운 숨결이 합쳐지면서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들어와 살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몸이 굳어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손을 맡긴 채 최강철의 옆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영화관에서 말바에 있는 서지영의 본가까지는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학 4학년이 되면서 강의 시간이 줄어든 그녀는 회사 일을 보느라 뉴욕 시내에 왔을 때 시간이 늦으면 이곳에서 잠을 잤다.
영화관에서 나와 최강철이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을 안 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최강철은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앞만 보며 운전을 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가 멈춘 곳은 그녀의 집 앞이 아니라 화이트스톤 브릿지가 바라보이는 이스트리버의 강가였다.
“잠깐 바람 좀 쐬고 갈래?”
“응.”
불쑥 던진 한마디에 자동적으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강철은 차를 멈춘 후 그녀를 데리고 화이트스톤 브릿지가 한눈에 보이는 강가의 벤치로 걸어갔다.
아름다웠다.
조명 속에 잠겨 있는 화이트스톤 브릿지는 마치 천상의 다리처럼 허공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 앉을까?”
“응.”
“정말 아름다워. 꼭 지영 씨처럼 예쁜걸?”
“자꾸 그러지마. 강철 씨가 자꾸 그러니까 겁나.”
“우리 꽤 오랜 시간을 같이했네. 벌써 1년 반이나 지났잖아.”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이 되었어. 내가 강철 씨를 처음 본 건 2년도 넘었단 말이야.”
“하하하… 그렇지.”
최강철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서지영의 시선을 피하며 화이트스톤 브릿지로 눈을 돌렸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의 행동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쉽게 꺼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지영 씨, 나한테는 비밀이 많아.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무슨 비밀인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언제가 기회가 되면 그때 말해줄게.”
“칫, 그러니까 신비의 남자 행세를 계속하시겠다, 이거구나?”
“그런 거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어. 우린 친구니까 전부 용서해 줄게.”
서지영이 발로 땅바닥을 툭툭 차면서 강가를 바라보았다.
강가에는 교량에서 비춘 조명과 환한 달빛이 어울러져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나 지영 씨한테 물어볼 말이 있는데…….”
“뭔데?”
“지영 씨는 왜 남자 친구를 안 사귀었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럼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사귈 생각이야?”
“당연한 말씀, 헤에… 그런데 그런 남자가 어디 쉬워야지. 운명처럼 척하고 나타나 줬으면 좋겠는데 뭐 하고 있는지 소식이 없네.”
“난 어때?”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어떠냐고 묻는 거야. 지영 씨한테 내가 대시하는 거지. 운명의 남자라고 마구 우기면서.”
어느새 그녀를 바라보는 최강철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랬기에 서지영은 숨이 멎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화관에서 손을 잡았을 때는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떨림, 이 설렘, 몸이 하늘로 붕 뜬 것 같았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농담이라면 하지 마. 나 가슴 떨린단 말이야.”
“정말이야. 오랫동안 지영 씨를 지켜보면서 점점 좋아졌어. 내가 복싱을 하기 때문에 상당히 거친 남자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상당히 세심한 사람이라 쉽게 말을 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제는 해야 될 것 같아. 그래서 지영 씨 손을 잡은 거야. 이 사람의 손이 더없이 따뜻하기를 바라면서. 지영 씨, 나 어때? 지영 씨 남자 친구로 괜찮을까?”
“바보…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 * *
서지영이 강의를 듣기 위해 걸어가자 멀리서 친구들이 그녀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반가웠다.
불과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너무 예뻐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모양이다.
“지영아, 뭐 좋은 일 있어? 왜 실실 웃고 그러니?”
“응, 내가 뭘?”
“이것이 시치미 떼고 있네. 무슨 일 있지? 어제 기숙사에도 안 들어오고. 너 뉴욕 갔다 오더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다?”
“웃음이 달라, 웃음이. 아무래도 지영이 뭔 일 생긴 거야.”
“일 때문에 뉴욕 가는 게 한두 번이야. 아무 일 없었어.”
“거짓말!”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클로이와 수잔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녀들의 시선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지간한 변명은 절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뉴욕에서 강철이 만났지?”
“어… 응.”
“그럼 어제 하루 종일 강철이랑 같이 있었던 거야?”
“일하다가… 영화 보자고 해서…….”
“누가, 강철이가?”
“무슨 영화 봤는데?”
영화라는 소리에 결정적 증거를 잡은 것처럼 두 여자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젠 늦었다.
얼떨결에 물을 엎질러 놨으니 주워 담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탑건, 톰크루즈 나오는.”
“이야, 이것들 봐라. 그동안 계속 내숭을 떨더니 기어코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래서 영화 끝나고 왜 안 들어왔는데? 혹시… 강철이하고?”
“어머, 얘는……. 그거 매진이라 저녁 먹은 후에야 겨우 봤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엄마네 집에서 자느라 들어오지 못한 거뿐이야.”
“다른 짓은 안 하고?”
“그래, 이것아. 다른 짓은 안 하고 집에 갔다.”
서지영이 발끈하며 대답하자 클로이와 수잔이 한참을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의심의 눈초리를 풀었다.
그녀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기 때문이다.
“좋아, 믿어줄게. 그런데 걔가 왜 갑자기 영화 보자고 한 거지? 지금까지 일 년 반이 지나도록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더니?”
“수잔, 너도 생각해 봐. 지영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니. 그 남자가 드디어 넘어오기 시작한 거 아니겠어?”
“정말 그런 걸까?”
“너무 나가지 마라. 영화야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잖아.”
“호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니들은 우리에게 모두 친구야. 사실을 모르다가 어느 날 불쑥 알게 되면 우린 배신감에 치를 떨게 돼. 그러니까 기회줄 때 사실대로 말해.”
“…영화관에서 손잡았어… 그 사람이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번 입이 열리자 서지영이 술술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놨다.
그러자 클로이와 수잔이 입을 떠억 벌린 채 영화 감상 하듯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드디어 최강철이 사귀자고 말했다는 순간 그녀들은 서지영을 끌어안고 난리 브루스를 췄다.
너무나 잘 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서지영의 비밀을 그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클로이와 수잔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그녀가 간절하게 원하던 사랑이 장밋빛으로 물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서지영의 이야기가 강가에서 끝나자 그녀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영화관에서 손까지 잡고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사귀자고 했으면 다음 장면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최강철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후 그냥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손만 잡았어? 정말 다른 건 안 하고?”
“혹시 키스하자고 덤볐는데 네가 거부한 거 아니야?”
“아니거든…….”
“아이고, 걔 이상한 애네. 왜 손만 만져? 사귀기로 했으면 최소한 키스는 해야지. 안 그러니, 클로이?”
“당연하지, 죤은 처음 사귈 때 키스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슴까지 만지더라. 섹스는 그다음에 했고. 사귈 거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냐?”
“너희들은 한국 문화를 몰라서 그래. 우리나라는 너희처럼 개방적이지 않아.”
“흐응, 웃기고 있네!”
“바보들아,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부터 잡는 게 예의이자 규칙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어.”
“세상 천지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니? 남자 여자가 서로 좋은데 순서를 지키면서 하나씩 진도를 뺀다는 소린 처음 들어봤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냐? 복싱하다가 거기를 못 쓰게 됐다든가. 내가 강철이한테 물어볼까, 정말 다쳤는지?”
“시끄러워. 괜히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아휴, 답답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눈 그만 풀어. 예쁜 애가 어쩌면 그런 눈을 만들 수 있니? 겁나게.”
“클로이, 수잔. 정말이야. 우리 일은 우리가 예쁘게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지켜만 봐. 알았지?”
워낙 심각한 얼굴로 말했기에 클로이와 수잔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서지영이 화를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알았다고. 하여간 축하해. 나중에 우리 같이 맥주 마시자.”
“호호… 고마워.”
“그런데 너네 회사는 잘 돼가는 거야?”
“응, 잘 되고 있어. 강철 씨 주식이 회사 쪽으로 넘어왔는데 180만 달러나 돼. 거기다 델 컴퓨터에 투자된 돈이 110만 달러가 넘어.”
“우와, 그럼 300만 달러나 되는 거네. 대단하다.”
“내가 분석한 바로는 앞으로 델 컴퓨터 쪽에서 매달 10만 달러 이상은 들어올 것 같아. 거기다가 강철 씨는 복싱으로 번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려나 봐. 그래서 앞으로 일이 많아질 것 같아.”
“어디?”
“글쎄, 그건 모르겠어. 나는 회사 관리를 주로 하고 투자는 강철 씨가 결정하거든.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준대.”
“재밌겠다. 작은 회사라도 직접 경영하는 거니까 재밌을 것 같아.”
“응, 재밌어. 회사 운영에 관해서 전반적인 걸 모두 챙기다 보니 많은 것을 알게 되더라.”
“그래서 넌 계속 그 회사에 있을 거야?”
“당연하지.”
“음… 잘 생각해 봐. 너 정도면 일류 기업에 들어가서 금방 성장할 수 있어. 혹시, 강철 때문이니?”
“아니, 난 이 회사가 재밌어. 강철 씨도 강철 씨지만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더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
“적성에 맞다는 뜻이네.”
“그렇지. 그런데 너희들은 어때?”
“지금 고민 중이야. 여러 회사에서 콘택트가 들어오고 있는데 막상 결정하려니까 쉽지가 않아.”
“호호… 그럼 우리 회사 들어와라. 내가 아주아주 잘해줄게.”
* * *
1987년 5월.
시간은 무섭게 흘러가며 최강철의 인기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
북미 타이틀을 4차례나 방어하면서 연속 KO승을 끌어냈는데, 그의 경기는 언제나 화려하고 강렬했기 때문에 관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17전 17KO승.
이제 그의 경기는 ABC뿐만 아니라 NBC와 CBS까지 가세해서 중계권을 놓고 싸울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WBA 5위, WBC 6위, IBF 1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세계 타이틀전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미국의 복싱 팬들은 그가 레너드와 시합하기를 학수고대했고 언론에서도 조만간 그의 타이틀 도전이 성사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타이틀 도전은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타이틀 도전은 예상치 못한 암초에 걸려 이루어지지 못했다.
WBA와 WBC 통합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슈가레이 레너드가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면서 각 기구의 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은퇴 이유가 기가 막혔다.
복싱이 재미없어졌고 이제부터는 가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은퇴를 선택한 이유였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그를 목표로 지금까지 싸워왔는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은퇴를 해버렸기 때문에 WBA와 WBC 양대 기구는 랭킹 1, 2위 간의 시합을 열어 챔피언을 결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챔피언 결정전이 조만간 치러진다지만 최소 3개월은 걸릴 것이고 돈 킹이 움직여서 곧바로 도전권을 획득해도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릴 게 분명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예상치 못하는 변수들에 의해 쉴 새 없이 바뀌는데 최강철에게도 그런 기회가 불쑥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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