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제12장 사랑이 그립다
최강철이 한국어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한 사람들은 오직 중계를 위해 파견 나온 한국 방송국 직원들과 기자들밖에 없었다.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물론이고 현지 중계 팀은 한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최강철의 이야기가 단순한 인사 정도로만 생각했다.
행사가 끝나고 링에서 내려와 라커룸으로 들어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따라 들어온 김도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만 하지 않았어도 전 국민이 듣는 앞에서 그런 폭탄선언을 했을 리 없었다.
만약 이 일로 최강철이 누군가에게 위해를 받게 된다면 자신은 칼을 물고 죽어야 한다.
“미안하다, 최강철.”
“무슨 말입니까?”
“내가… 나 때문에… 씨발, 미안하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뭐가 기자님이 미안하다는 거죠?”
“너 일부러 그런 거잖아. 신군부 엿 먹으라고.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짓을 하면 어떡해. 그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기나 해!”
“하하하… 기자님,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난 우리 국민이 열심히 살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나중에 다시 들어보세요. 내가 신군부에 대해서 뭐라고 한 말이 있나.”
“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얘기 했다고 설마 나를 잡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당분간 움직이지 마라. 그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걱정도 팔자십니다.”
최강철이 김도환을 바라보며 웃었다.
도저히 무슨 뜻으로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독재 정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합이 끝난 후 미국 언론은 최강철의 승리를 대서특필하며 판타스틱4에 대한 도전이 담긴 인터뷰 내용까지 자세하게 실었다.
복싱 전문 기자들은 시합 내용을 상세히 분석했는데 심지어 막판에 폭풍처럼 몰아쳤던 펀치의 숫자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위상의 변화다.
이전 시합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신문은 토막 뉴스로 그의 승리를 전했으나 이번 시합에서 승리한 최강철의 기사는 한 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그럼에도 미국 기자들은 최강철의 판타스틱4에 대한 도발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다.
도발은 도발일 뿐.
이제 겨우 북미 타이틀을 획득한 최강철의 도발은 관중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 * *
“우와, 사진발 죽여주네. 아주 잘 나왔어. 오려서 보관해야겠다.”
“인마, 저 빤스 당겨진 거 봐라. 나 정말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그 자식, 계속 그 이야기네. 어차피 써먹지도 못하면서 뭘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 고장 나도 상관없는 물건 아니야?”
“이놈이 미쳤나. 어딜 만져!”
신문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던 이성일이 손을 뻗어 물건을 잡아 오자 최강철이 부리나케 뒤로 도망쳤다.
신문에는 목말을 탄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된 상태로 잡혀 있었는데 이성일이 대가리를 불쑥 집어넣는 바람에 트렁크가 뒤쪽으로 몰려 있는 게 그대로 잡혔다.
“우리 관장님 얼굴 봐라. 완전히 좋아죽으려고 하네.”
“관장님 꿈이 내가 챔피언 되는 거였잖아. 그러니 오죽 좋았겠냐.”
“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네가 그놈 쓰러뜨리는데 막 머리에서 쥐가 나더라니까.”
“푼수 같은 놈.”
가슴을 끌어안는 이성일을 향해 최강철이 중얼거리며 신문을 주워 들었다.
삼총사.
신문에는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넘어와 3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인간들이 승리의 기쁨에 젖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신문의 날짜가 5월 20일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집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최강철 일행은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윤성호가 데이트를 하러 시내에 나갔기 때문에 그들 둘뿐이었다.
“강철아, 지영 씨 정말 예쁘더라.”
“응.”
“정말 사귀지 않을 거냐?”
“그건 왜 물어? 너 그만해. 이상한 소리 하면 죽는다.”
“그 물건이 아까워서 그런다. 어휴, 불쌍한 놈. 주인 잘못 만나서 이날 이때까지 복싱한다고 덜렁거리며 쫓아다니기만 했지 뭘 해본 게 있어야지.”
“지랄하네.”
“너 그거 어따 쓰는 건진 아냐. 걔가 오줌만 싸라고 있는 게 아니야, 이 자식아.”
“하이고, 저는. 엄청 써본 것처럼 말하네.”
“크크크… 인마, 내가 미국 생활이 벌써 3년이다. 1년에 분기별로 1번씩 벌써 10번이 넘어. 내 물건은 10번이 넘게 호강했다는 뜻이다. 뭘 알고 까불어!”
“그렇게나 많이 했어?”
“내가 너한테 같이 가자고 얘기한 게 스무 번도 넘어, 불쌍한 자식아. 어때, 오늘 저녁에 나가볼래? 엉아가 잘 아는 데 있다.”
“미친놈.”
“왜 싫어?”
“난 돈 주고는 절대 안 한다. 이 자식아, 그건 돈 주고 하면 정말 재미없는 일이야.”
“어라, 동정남이 별소리를 다하네. 뭘 알고나 떠드는 거니?”
“너보다 많아. 횟수로 따져도 셀 수 없을 정도다.”
무시하듯이 쳐다보는 이성일을 향해 최강철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자식이 나를 뭘로 알고.
전생에, 이 자식아. 응, 내가 한때는 일주일에 5번씩 했던 놈이야.
하지만 이성일을 설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매일같이 옆에서 자신을 지켜본 놈의 눈에는 그가 천연기념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성일은 그의 고함 소리를 향해 잔뜩 비웃음을 흘려냈다.
“불쌍한 놈. 너 그렇게 살지 마라. 그러다가 그거 썩어 문드러져. 이 자식아, 네 나이가 한둘이냐. 왜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거야. 오늘 저녁에 다운타운에 나가자. 내가 책임지고 동정 떼어줄게.”
“어딘데?”
“있어. 따라오기나 해.”
“안 돼. 오늘 지영 씨 만나기로 했어. 회사 일로 상의할 게 있거든.”
“지영 씨 만나면 뭐 해. 써먹지도 못할 거면서. 걘 나중에 만나고 오늘은 그냥 나 따라와. 일단 네 물건부터 해방시키고 보자.”
“야, 너 변태냐? 왜 자꾸 만지려고 그래, 이 자식아!”
차를 몰고 뉴욕 시내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무실이 목적지다.
최강철은 서지영과 상의해서 뉴욕 외곽 쪽에 사무실을 얻었는데, 전화를 받고 서류를 정리하는 여직원까지 한 명 두었다.
사무실의 규모는 20평 남짓했고 월세는 1,500달러였지만 새로 지은 건물이라 깨끗했다.
마이더스 CKC.
그냥 이름만 봐서는 무슨 회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간단했으나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포도주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인 디오니소스로부터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손을 얻은 미다스.
마이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의 영어 표현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최강철의 손이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의미였고 CKC는 최강철의 영문 이름을 딴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해왔다.
그녀는 서지영이 회사 운영을 위해 뽑았는데 고등학교만 나왔다고 들었다.
일주일에 2번.
서지영은 학교에 다니는 와중에도 일주일에 2번씩 회사에 출근해서 델 컴퓨터와 관련된 업무와 세금 문제를 처리했고 최강철의 지시에 따라 주식에 대한 공부를 했다.
요즘 그녀는 바빴다.
최강철이 델 컴퓨터에 투자한 돈이 모두 합해 110만 달러나 되었기 때문에 자금의 사용 과정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장님, 아직 안 왔어요?”
“아뇨, 아까 오셨다가 세금 문제 때문에 잠깐 나갔어요. 곧 들어오실 거예요.”
“커피 한 잔 줄래요?”
“예.”
캘리는 그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녀는 복싱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회사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강철이 단순한 투자자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커피가 맛있다.
다른 건 몰라도 커피만큼은 좋은 걸로 마시자고 했더니 서지영이 직접 커피만 수입 판매하는 가게까지 가서 사 왔다.
문을 열고 서지영이 나타난 것은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였다.
“어머, 강철 씨. 언제 왔어. 우리 3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조금 빨리 왔어. 지영 씨 보고 싶어서.”
“피이, 거짓말.”
“캘리, 사장님 커피 마시고 싶다네요. 주는 김에 나도 한 잔 더 주고요.”
캘리가 커피를 가져오자 서지영이 예쁜 입으로 호호 불면서 마셨다.
그녀는 모든 게 예쁘다.
요즘 들어 얼굴이 활짝 폈는데 몸매가 더욱 날씬해진 것 같았다.
“강철 씨, 이제 괜찮아?”
“응, 푹 쉬었더니 금방 좋아지네. 그런데 시합 재밌었어?”
“아휴, 무서워서 혼났어. 난 복싱 경기를 직접 보는 거 처음이었거든. 더군다나 강철 씨가 싸우는 거였잖아.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그럼 다음에는 못 오겠네.”
“아니, 갈 거야.”
“무섭다며?”
“그래도 강철 씨가 시합하는 건데 가서 응원해야지.”
“하하… 지영 씨 때문이라도 지면 안 되겠다. 그런데 지영 씨, 델은 공장 이전 어떻게 진행하고 있어?”
“델은 공장을 라운드 록으로 옮길 생각인 것 같아. 오스틴은 비싸서 라운드 록에 있는 공장들을 알아보는 중이래.”
“인원은?”
“15명을 충원했어. 그런데 정말 대박이 터진 건 맞는 것 같아. 컴퓨터 사이언스에 델에 관한 기사가 나왔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래.”
“잘됐네.”
“델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 그동안 강철 씨가 투자한 금액의 사용 내역을 일일이 확인해 봤는데 사적으로 사용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서지영이 서류 더미를 꺼내더니 델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꼼꼼하다.
똑똑한 여자가 꼼꼼하게 일을 챙기면 주변 사람들은 피곤해지지만 그녀에게 일을 맡긴 사람은 더없이 편해진다.
한참 동안 서지영의 설명을 들은 후 최강철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델 얼굴에 ‘나 착한 놈’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못 봤어?”
“호호… 그게 보여?”
“그럼, 당연하지. 지영 씨도 보이는걸.”
“나는 어떻게 쓰여 있는데?”
“예쁘고, 사랑스럽고, 착하고, 똑똑하고…….”
“그만해. 얼굴 빨개져.”
“주식에 관한 공부 많이 했어?”
“시켜서 하고 있기는 한데 너무 어려워. 주식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어.”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곧 적응될 거야. 빨리 공부해야 돼. 특히 선물 쪽을 집중적으로 공부 해. 조만간 지영 씨가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길 거야.”
“그게 뭔데?”
“나중에 알려줄게.”
“또, 또 이런다. 신비의 남자야, 뭐야. 무슨 남자가 이렇게 비밀이 많아?”
“지영 씨,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응?”
불쑥 입을 열자 서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 동안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믿겨지지 않는 눈.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알고 지냈지만 최강철이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 탑건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는데 너무 잘 만들어졌대. 우리 같이 가서 보자.”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음… 아마, 데이트 신청 맞을걸?”
뉴욕 시내에 나갔지만 그들은 영화관 대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낮에 상영하는 영화는 매진이 되었기 때문에 식사를 한 후 저녁 7시 반에 상영하는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서지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더니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멀리서 보이는 뉴욕의 풍경을 바라본 후부터 부쩍 말수가 많아지며 햇살처럼 아름다운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작은 농담에도 웃었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도 웃었다.
식당에 들어와서 최강철이 스테이크를 잘라주자 그녀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미소를 지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일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족 이야기를 했고, 학교 이야기를 했으며, 꿈과 사랑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을 찾았다.
미국에 와서 처음 보는 영화다.
탑건은 젊은이의 꿈과 사랑, 그리고 우정에 관한 파일럿의 이야기였다.
특히 비행 강사로 나온 여배우는 너무나 아름다워 관객들의 탄성을 연신 자아내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맞다.
이성일의 말처럼 다시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젊은 육체는 아침이 되면 수시로 그를 괴롭혔고 밤이 되면 이상한 꿈에 시달렸으나 여자를 찾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이미 아내에 대한 증오는 6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고 희석되어 이젠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자를 찾지 못했던 건 새로 인생을 살면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미친 듯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자신은 젊다. 뜨거운 피가 흐르고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가슴에 남아 있는데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으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화면에서는 주인공인 톰 크루즈가 활주로를 따라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자유다. 사랑이다.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청춘이다.
서지영은 화면에서 격정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감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살며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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