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더스틴 브라운이 글러브를 낀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면서 관중들이 벌떡 일어나 거대한 함성으로 최강철을 연호했다.
관중들은 잔인하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캔버스를 뒹구는 더스틴 브라운에게는 어떤 동정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승자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레프리가 더스틴 브라운의 상태를 확인하고 곧장 경기 종료의 신호를 보내오자 그 함성은 더욱더 거대해졌다.
로프를 젖힌 윤 관장이 튀어 들어왔고 그 뒤를 이성일이 따랐다.
만세!
두 사람이 동시에 두 팔을 번쩍 치켜든 채 뛰어왔는데 링 중앙에 우뚝 선 최강철이 목표였다.
“강철아, 이 새끼야. 잘했다. 수고했어!”
“우하하하… 챔피언 먹었다. 우리 강철이가 챔피언이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윤성호와 이성일의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보였다.
한참 동안 끌어안고 기뻐하던 이성일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최강철의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번쩍 일어섰다.
“강철아, 요건 보너스다.”
“야, 인마. 내려놔. 빤스에 물건 낑겼어. 아프다고!”
“푸헤헤… 아프더라도 지금은 좀 참아라. 내가 이걸 얼마나 해보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웃어, 이 자식아! 그리고 두 손 번쩍 들어서 네가 챔피언이란 걸 사람들한테 알려.”
“아이고, 미친놈.”
목말을 태우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이성일의 귀를 잡아당기다가 최강철이 포기한 듯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번쩍 치켜들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냈다.
관중들은 어느새 전부 일어서 있었는데 최강철이 두 팔을 쳐들자 또다시 박수와 함께 거대한 환호성을 보내왔다.
압도적인 경기.
무패의 챔피언 더스틴 브라운을 4라운드 내내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후 통쾌한 KO승을 이끌어 낸 최강철의 존재는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화끈한 인파이터들이었고 전적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대등한 경기를 예상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성적인 복싱 팬들이었으니 최강철이 뛰어난 복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타이틀전에서 차세대 챔피언 후보로 거론되던 더스틴 브라운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끝내 처참하게 박살을 내버리자 관중들은 그를 판타스틱4에 필적하는 선수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관중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와우, 최강철. 레너드와 붙어봐라.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
“아니야, 일단 듀란부터 꺾어. 너의 테크닉과 듀란의 돌주먹이 맞붙는 걸 보고 싶어!”
“헌즈와 싸워라. 허리케인, 제발 부탁이야. 너희 둘이 싸우면 난 자다가도 뛰어올 테다.”
* * *
더스틴 브라운이 옆구리를 맞고 쓰러지는 순간 한국에서 날아온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사진을 찍었다.
정말 어이없는 장면들이다.
그들은 사진을 찍다가 만세를 불렀고 서로를 붙든 채 기쁨을 나누다가 또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더스틴 브라운이 일어서지 못하자 레프리가 최강철의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 스포츠서울의 김도환과 동아일보의 김양수는 서로를 얼싸안은 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로프 밖에서 대기하던 스태프들이 올라가 최강철을 붙들고 기쁨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몸이 들썩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도 링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 한마음이다.
그들의 뒤편에 있던 한국 중계석은 지금 난리도 아니었다.
캐스터와 해설 위원이 모두 일어나 중계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거의 발악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우, 살떨려. 김 기자 나 감기 걸릴 것 같아. 막 오한이 오는 게 추워.”
“지랄, 그거 감기 아니다. 좋아서 그러는 거야.”
“이건 뭐, 그냥 박살을 내버리는구만. 최강철 저놈 정말 괴물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아… 정말 아쉬워. 저놈이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매일 기사를 쓸 수 있었을 텐데…….”
김도환이 입맛을 다시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최강철이 13번이나 싸우면서 승승장구를 해왔으나 직접 본 것은 두 번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기사를 쓰지 못했다.
동아일보의 김양수가 입을 열다가 급하게 멈춘 것은 링 아나운서인 미카엘이 마이크를 들고 최강철을 향해 다가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야, 인터뷰 하려는 모양이다. 뭐라고 그러는지 들어보자.”
링 아나운서가 승자를 향해 다가가 인터뷰를 하는 건 관중들에 대한 서비스였다.
특히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는 많은 기자가 몰려 있었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인터뷰를 마련했는데, 미카엘이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허리케인, 승리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훌륭한 시합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대등한 경기를 예상했는데 거의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습니다. 초반에 아웃복싱을 펼친 것은 작전이었습니까?”
“더스틴 브라운은 훌륭한 인파이터로서 펀치력이 좋고 접근전 능력이 탁월한 선수였기 때문에 훈련할 때부터 아웃복싱으로 타깃팅을 맞춰놓았습니다. 다행스럽게 브라운 선수가 우리 쪽 전략을 간파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피니쉬 블로우는 복부 공격이었습니다. 그것도 전략이었나요?”
“예, 브라운 선수는 3번의 다운을 당했는데 전부 복부를 맞고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복부를 공략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북미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북미 챔피언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 꿈은 언제나 세계 챔피언뿐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판타스틱4, 그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피하지 말고 나와 싸웁시다. 언제, 어느 때라도 나는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이곳에 계신 관중들께 알려 드립니다.”
최강철이 유창한 영어로 말하자 인터뷰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몰려 있던 기자들은 그의 인터뷰 내용을 적느라 정신이 없었고 중계를 맡고 있던 ABC와 한국 중계진들이 최강철의 도전 소식을 전하며 미친 듯이 떠들어댔다.
링에서의 인터뷰는 간단하게 끝내는 것이 관례였으나 관중들의 반응에 고무된 미카엘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판타스틱4는 현재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마침 이곳에는 듀란 선수가 와 있군요. 듀란 선수가 웃고 있는데 그에게 한 말씀 하시겠습니까?”
“미스터 듀란,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존경할 뿐이지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한판 붙읍시다.”
카메라가 링 사이드에 있던 듀란의 모습을 잡았다.
전설의 듀란.
그는 최강철의 도발을 들으며 재미있다는 듯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백전노장답게 노련했다.
아마 그는 최강철의 도발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는 것 같았다.
“최강철 선수, 인터뷰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미카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 말씀하시죠.”
“관중 여러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북미 챔피언에 올랐고 방금 말한 대로 반드시 세계 챔피언에 오를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강철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국말로 한 자 한 자 끊어서 정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한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이렇게 미국에서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으나 저는 언제나 한국을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힘내십시오, 국민 여러분,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밝은 내일이 다가올 것입니다. 저 역시 힘을 내어 싸우겠습니다. 당당하게 세계 챔피언이 되는 그 순간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 *
고려대 총학생장 김관균은 학생회관에서 최강철의 시합을 지켜봤다.
그의 뒤로는 4명의 학생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상태였다.
오늘은 시위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집행부는 복싱 경기가 끝나는 대로 도서관 앞 광장으로 나갈 예정이었다.
복싱.
지금 전 세계를 열광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지상 최고의 스포츠로 한국 사람들은 복싱 경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볼 정도였다.
그들 역시 그랬다.
복싱은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고 그들은 젊었기에 한국 선수가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면 텔레비전에 모여 앉아 주먹을 휘두르며 응원하곤 했다.
그러나 조국이 신군부의 총칼에 점령당하면서 그들의 열정은 자유를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변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빨갱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으나 자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어떤 위험과 고통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지식인이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않는다면 조국은 영원히 신군부의 총칼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알려야 한다.
배운 것이 없어 아무것도 모른 채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과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이 슬픈 현실을 알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자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최강철.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서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경기는 언제나 치열했고 폭발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어 한 번 본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다.
김관균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학생들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불만을 터뜨렸으나 그는 주저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집행진 중의 상당수는 시위 계획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으나 투쟁을 하는 마당에 복싱 경기를 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며 텔레비전 보는 걸 거부했다.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 차는 투쟁에 한뜻을 모으고 있음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니까.
정말 엄청난 경기였다.
최강철의 경기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해서 오랜만에 마음껏 즐거움이 가득 찬 함성을 질러댈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토록 즐거운 함성을 지른 것이.
투쟁을 위해 수많은 학생 앞에서 고함을 지를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쾌감이 전신의 솜털을 올올히 일어서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하네. 저놈 정말 세계 챔피언 되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예 챔피언이라는 놈이 상대가 안 되잖아. 마치 어린애를 데리고 논 것처럼 보여.”
“우리 얼마나 시간이 있지?”
“10분 후에 나가면 돼.”
“인터뷰하는 모양이니까 저것만 보고 나가자.”
김관균의 말에 정태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나머지가 동의한다는 시선을 보내 왔다.
집행진 중에서 이곳에 모인 놈들은 전부 복싱에 미친놈들이다.
시합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최강철이 레너드와 헌즈를 거론하면서 한판 붙자는 말을 했을 때 모여 있는 학생들이 전부 환호성을 질렀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한국 선수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복서들과 전쟁을 치른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려올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진짜 경악하게 만든 것은 최강철이 한국어로 전한 마지막 목소리 때문이다.
-한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이렇게 미국에서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으나 저는 언제나 한국을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힘내십시오. 국민 여러분,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밝은 내일이 다가올 것입니다. 저 역시 힘을 내어 싸우겠습니다. 당당하게 세계 챔피언이 되는 그 순간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인터뷰를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순식간에 닫혀졌다.
정확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으나 최강철이 한국 국민에게 전한 메시지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관균아, 저 자식… 혹시…….”
“너도 그렇게 생각했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쟤, 우리나라 사정을 아는 걸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그게 뭔데?”
“저놈이 우리나라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거. 저 눈으로, 저 음성으로 어떻게 거짓말을 해!”
“그렇지?”
“봐라, 내 말이 맞지? 저놈도 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 말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나가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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