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82화 (82/308)

[82]

* * *

고려대 신방과 3학년 김관균은 스포츠서울에 나온 사진을 보면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1면의 반이나 차지한 흑백사진은 계체량 도중 난장판이 되어버린 트리바고호텔 행사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고 있는 최강철의 모습도 활동사진처럼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이 자식, 우리하고 나이가 같다고 했지?”

“응. 23살이니까 같은 나이야.”

김관균이 신문을 던지며 툭 말을 던지자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정환석이 쓰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신문에 나타난 사진이 꼭 한국 사회를 보는 것 같았다.

한쪽에서는 대가리가 깨지게 싸웠고 한편에서는 최강철처럼 관망하는 이방인들이 넘쳐났으니 분명 한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23살.

지금의 한국 대학생에게는 지독하리만치 아프고 힘든 나이였다.

고려대 총학생을 맡고 있는 김관균은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네 명은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로 학과는 달랐지만 전부 대학 3학년이었다.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이들.

자유를 위해 학업을 접은 채 저항하는 그들의 얼굴은 피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관균의 입이 열린 것은 신문을 넘겨받은 정태수가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을 때였다.

“군정권에서 저놈의 시합을 일부러 중계방송한다더라.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말이지.”

“저 새끼도 신군부 정권의 하수인이구만. 그놈들 정권 유지에 한몫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저놈은 저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뿐이잖아.”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산다 해도 애국자는 아니야. 저놈이 국민들을 위해 한 게 뭐가 있어?”

“모르겠냐?”

“뭘?”

“저놈 경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국민들의 기다림이 얼마나 큰지 정말 몰라?”

“음…….”

“최강철 저놈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다지만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확신을 나는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저놈은 달라. 단순한 주먹질 하나로 전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뭐가 돼. 지금은 아니라도 분명 역사는 우리가 싸운 이 시간들을 기억해 줄 거다.”

쓴웃음을 짓는 김관균을 향해 정환석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학에 들어와 3년 동안 끊임없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싸워왔지만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직 왜 다들 참고 견디는데 네가 앞장서서 손해 보며 싸우냐는 부모님의 눈물과 불알친구들의 걱정 어린 시선만 받았을 뿐이다.

그건 앞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김관균도 마찬가지였고 나머지 집행진도 비슷했다.

“다음 시위가 저놈 시합과 날짜가 겹치는 거 알고 있지?”

“그런데?”

“시간을 뒤로 미루자.”

“왜?”

“우리나라 사람들 잘 알잖아. 이런 탄압을 받으면서도 복싱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해. 만약 그런 정신으로 싸웠다면 독재정권은 벌써 무너졌을 거다. 아마 그날은 시합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시간을 뒤로 미룰 수밖에…….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싸울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하아,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복싱 때문에 시위 계획을 바꿔야 하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받아들이자고. 하긴, 나도 저놈 시합이 궁금하긴 해. 저번에 우연히 봤는데 정말 대단했어.”

“우리가 시위를 연기하면 전경들도 좋아하겠다. 그놈들도 저 자식 경기를 보고 싶어 했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 않겠어?”

“당연하지.”

“태수야, 1, 2학년 학생장들에게 전해. 출정 시간을 오후 3시로 늦춘다고 말이야. 그리고 가는 길에 전경들한테도 말해줘라. 우리 시위는 시합 끝난 다음부터 한다고.”

“그건 왜?”

“그놈들도 대부분 우리와 같은 학생들이야. 전경에 차출되어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싸우고 있지만 그놈들이 싸우고 싶어서 싸우겠냐. 그러니까 이럴 때 푹 쉬게 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 * *

시합 전날.

최강철은 서지영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가든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호텔의 식당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저녁은 마이클 델과 같이 먹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지금 그는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한 달 전부터 마이클 델로부터 상의할 게 있다는 연락이 계속 왔음에도 뒤로 미룬 것은 훈련으로 인해 바빴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를 시합에 초대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마이클 델을 자신의 시합에 초대했는데 동업자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친구로 초대한 것이었다.

서지영의 말에 따르면 호텔을 잡아놓았고 VIP석까지 준비했다는 말을 들은 델은 흥분으로 인해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마이클 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식당 문으로 들어와 잠시 주춤했으나 최강철이 손을 들자 마치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강철, 오래 기다렸어?”

“아니,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델, 얼굴이 좋아 보인다. 잘 지냈지?”

“그럼, 나는 잘 지냈지. 보고 싶었어.”

최강철의 손을 잡은 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과 반가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마주 잡은 손을 끌어당겨 그의 몸을 깊게 안아주었다.

반가움은 반가움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반기는 델의 마음은 진심으로 받아주는 것이 맞다.

“어라, 예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은데?”

“하하… 너무 바빠서 밥을 제대로 못 먹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었어.”

“왜 바빴는데?”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 나, 강철한테 할 말이 많아.”

델이 여전히 웃으며 자리에 먼저 앉자 최강철과 서지영이 그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그가 서두르는 건 그동안 계속 연락해서 상의하고 싶다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강철은 그가 본론을 꺼내기 전 식사부터 주문하면서 와인도 곁들였다.

비즈니스는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식사를 하는 동안 델은 사업 이야기 대신 최강철의 시합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난 참 행운아인 것 같아. 강철을 알고 나서 모든 일이 잘되고 있으니 말이야. 난 강철의 광팬이야. 알지?”

“그럼, 알지.”

“직접 눈으로 강철이 시합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올 줄은 정말 몰랐어. 꼭 꿈을 꾸는 것 같아.”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초대할 테니까?”

“와우, 고마워.”

그는 식사하면서 훈련은 어땠는지 물었고 신문을 통해 공식 행사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내일, 자신의 눈으로 최강철의 시합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젊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델의 순수함은 너무나 깨끗해서 듣는 동안 아무런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접시를 치우기 시작하자 서지영이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최강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내일 커다란 시합을 앞두고 있는 최강철이 빨리 방으로 돌아가 쉴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델를 향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델, 이제 말해봐요. 강철 씨는 내일 시합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이해하죠?”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뭐 때문에 만나자고 했어요?”

서지영이 묻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델의 시선이 최강철에게 돌아왔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회사끼리 계약이 되어 있으나 자신의 회사에 투자한 당사자는 서지영이 아니라 최강철이란 사실을 말이다.

“강철, 기쁜 소식 하나와 상의할 일이 하나 있어. 뭐부터 들을래?”

“이왕이면 기쁜 소식부터 듣자.”

“좋아. 우리 대박 났어. 내가 개발한 PC 주문이 물밀듯 들어오고 있단 말이야. 강철이 조언한 것처럼 컴퓨터 잡지에 광고를 냈는데 그때부터 주문이 폭주하고 있어.”

“얼마나?”

“저번 달에는 100대였는데 이번 달에는 벌써 200대가 넘었어.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 같다고!”

“하하하… 잘됐구나. 정말 잘됐어.”

“이대로라면 우린 금방 부자 될 거야. 이게 다 강철이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야. 고마워.”

“무슨 소리.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아냐,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부인을 하자 델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최강철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작이구나, 델 컴퓨터의 신화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델의 신화는 벌써부터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한테 상의하고 싶다는 건 뭐지?”

“일손이 부족해서 인원을 증원하고 공장 규모도 키워야 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강철, 아무래도 은행 융자를 받거나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야 될 것 같아. 이대로라면 밀려드는 주문을 해결할 방법이 없거든. 우린 동업자니까 강철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강철 네 생각은 어때?”

“얼마나 더 들 것 같아?”

“지금까지 원가를 제외하고 이윤으로 남은 게 10만 달러가 있어. 하지만 인력 증원과 공장 확대를 하려면 당장 30만 달러는 필요해.”

“알았다. 내가 해결하지.”

“무슨 소리야. 강철이 또 투자하겠다는 뜻이야?”

“그래, 내가 한다. 대신 지분을 더 넘겨줘야 해. 우린 친구지만 동업자이기도 하니까 지분 산정을 정확해야 되지 않겠어?”

“그건 당연하지. 그런데 얼마나?”

“내 지분을 45%로 올려줘. 나한테 돌아올 이윤까지 같이 투자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해. 어때, 괜찮겠어?”

“좋아, 그렇게 하자. 나도 은행 융자를 받기는 싫었거든. 정신없이 바쁜 상태라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강철이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뭐가 걱정이겠어. 나야 고마울 뿐이지.”

“오케이. 지영 씨, 델 이야기 들었지? 서류 준비 해서 투자 협약서 조정해 줘.”

“강철 씨…….”

“괜찮아. 델은 꼭 성공할 거야.”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지영을 향해 최강철은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직 터를 잡지 못한 델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투자가였을 테니 이때 더 지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아니면 지분을 더 확보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델 컴퓨터는 막대한 이윤을 남기며 사세를 확장해 나갈 테니 지분 확보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랬기에 미안해하는 마이클 델과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지영을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보내줄 수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투자가 필요할지 모르나 델 컴퓨터의 신화가 시작되면 상당 부분은 이윤과 주식을 상장 것으로 커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15% 지분 추가 확보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이득을 가져다줄 게 분명했다.

최강철은 눈을 뜬 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눈부실 정도로 밝아 침실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북미 타이틀전을 건 일전이 벌어진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커튼을 젖히고 이미 떠올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양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찬란하다.

웅장한 빌딩들을 한꺼번에 덮어버리는 태양의 위대함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범접치 못할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한동안 태양에 잠식된 빌딩 숲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복싱을 시작한 것도, 마이클 델을 만난 것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도 어쩌면 조작된 운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내 앞에 놓인 한계와 난관을 하나씩 부숴가며 성취해 나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게 내가 간절히 원하는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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