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81화 (81/308)

[81]

* * *

“이것 참, 최강철이 때문에 미국 출장을 다 가보고 내 복이 터졌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그놈은 물건이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벌써 5년이나 되었구만. 그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사고를 칠지 누가 알았겠어. 웰터급이야. 그것도 짐승들이 우글댄다는 미국에서 12연속 KO승이라니 정말 돌아버릴 일이다.”

“돌지 마라. 우리 나이에 자꾸 돌면 어지러워.”

“그놈이 한국 국민들에게 모습을 보인 건 딱 3번뿐이야.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부 난리를 치고 있으니 이게 뭔일이라냐.”

“자네도 그놈 경기 봤으면서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해? 난 국내에서 벌어진 그놈 경기는 거의 다 봤어. 그때마다 피가 끓었지. 최강철은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어 버리는 마력이 있는 놈이야. 야, 비행기 뜨나 보다.”

김도환이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가속을 하기 시작하자 몸을 경직시키며 호흡을 길게 뿜어냈다.

이놈의 비행기는 벌써 10번을 넘게 탔어도 이륙 순간이 되면 긴장으로 몸이 바짝 오그라든다.

하지만 옆에 있던 동아일보의 김양수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중계한다며?”

“그런다네. MBC 쪽에서 자다가 총알 맞은 거지, 뭐. 소문에 따르면 전통이 하라고 시켰다더라.”

“그 인간은 별걸 다 시키는구만. 내가 알기로는 ABC 그 새끼들이 돈을 엄청 불러서 중계를 포기했다고 들었거든.”

“전통이 복싱광이잖아. 최강철 광팬이래.”

“복싱 팬이라서 그렇겠어? 지금 학생들 데모 규모가 점점 커지고 야당도 장외 투쟁 한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으니까 국민들 눈을 돌리려고 그런 거겠지. 그런 머리는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잖아.”

“그럴 수도 있겠다.”

“하여간, 성공은 한 거 같구나. 지금 국민들이 전부 최강철 경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말이야.”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더러운 정치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기쁠 것 같다. 좆 같은 세상. 지금 한국에 희망이 뭐가 있겠냐? 이렇게라도 국민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쪽팔려.”

“뭐가?”

“언론인으로서 총칼이 두려워서 침묵하고 비겁하게 숨은 채 지내고 있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인마, 그런 소리하지 마. 너는 복싱 기자잖아. 네가 진실을 숨긴 게 뭐가 있어?”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고통이야. 내 동기들, 정치부 사회부에 있는 내 동기 놈들이 매일 술에 꼴아서 우는 꼴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너희들은 스포츠만 다루니까 모를 거야. 하지만 우리 신문사는 다르잖아.”

“나도 알아. 스포츠 기자는 기자가 아니겠냐. 나도 펜대 굴리면서 살아온 놈인데 그걸 왜 모르겠어.”

김도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언론인으로 진실을 보도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삶을 산다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감정에 사로잡혀 잠시 침묵하던 김양수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비행기가 창공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몇 명이나 떴지?”

“MBC 위성중계 팀이 6명, 신문기자들이 너하고 나까지 9명이야.”

“많네. 세계 타이틀전 못지않은 규모구만. 다른 놈들은 벌써 갔나?”

“아니, 우리가 제일 먼저야. 다른 사람들은 뒤따라올 거다.”

“고맙다, 도환아.”

“뭐가?”

“넌 최강철과 친해서 특종을 독점하고 있는데 나를 끼워준 거잖아. 그러니까 고맙지. 내가 나중에 술 한잔 살게.”

“그래라. 파전에 막걸리 진하게 사.”

“이겨줬으면 좋겠다, 그 자식.”

“응.”

“이럴 때 이겨주면 우리 국민들 정말 좋아할 거야. 그렇지 않냐?”

“최강철… 그놈은 이겨줄 거야. 옛날에 히로키를 부술 때처럼 그렇게… 꼭 이겨줄 거다.”

* * *

서지영과 클로이, 수잔이 레드불스로 찾아온 것은 시합을 일주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복싱 쪽은 다른 분야와는 달라서 여자 기자들을 보기 어려웠다.

레드불스에는 수많은 기자가 찾아왔지만 여자들을 보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었다.

세 명의 여자가 불쑥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 앞에 있던 마크가 잽싸게 뛰어나간 건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 일로 오셨죠?”

“저기, 최강철 선수를 만나러 왔는데요.”

“강철은 시합 때문에 훈련하느라 정신이 없는데요. 실례지만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친구들이에요. 잠깐 볼 수 있어요?”

“친구라고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어이, 성일. 이분들이 강철이 찾아왔다는데!”

마크가 소리치자 멀리 떨어져서 최강철이 스파링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이성일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그녀들을 보자마자 누군지 즉시 알아챘기 때문이다.

발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달려온 이성일이 그녀들을 향해 구십 도로 인사를 하면서 반색을 했다.

“혹시 서지영 씨 아닙니까?”

“맞아요.”

“저는 이성일이라고 합니다. 강철이가 얘기 많이 했다던 애예요, 지영 씨한테.”

“아, 성일 씨군요. 그럼요, 엄청 많이 들었어요. 무척 유쾌한 친구라고요.”

“혹시 잘생겼다는 말은 안 하던가요?”

“호호…….”

어이없는 질문에 서지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클로이와 수잔이 따라 웃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들도 최강철을 통해 이성일에 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는데 만나자 마자 엉뚱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해대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들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복싱광인 클로이와 수잔이 반드시 가 봐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친구가 시합을 한다는데 그냥 있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녀들은 서지영을 협박해서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

“지영, 저기 강철이 있다. 스파링하나 봐.”

“우와, 멋있어. 링에만 서면 강철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니까.”

클로이와 수잔이 링에 있는 최강철을 발견하고 함성을 질렀다.

링에서는 최강철이 상대를 몰아붙이며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빠르고 경쾌한 펀치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성일의 안내에 따라 링 사이드까지 다가온 그녀들은 정신없이 구경을 하면서 열혈 팬답게 연신 함성을 질러댔다.

“성일, 강철이 우리한테 시합을 볼 수 있도록 표를 준다고 했어요. 혹시 들었어요?”

“아뇨, 못 들었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수잔, 우린 공짜 표 관리를 내가 해요. 강철이가 설혹 준다고 해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무슨 뜻인 줄 알죠?”

“어머, 그래요? 그럼 성일한테 잘 보여야겠네.”

“당연하죠.”

“큰일 났네. 우린 꼭 강철이 시합 보고 싶은데 어쩌죠. 혹시 우리한테 표 줄 수 있어요?”

“밥 사면 생각해 볼게요.”

이성일이 뻔뻔한 얼굴로 수잔을 향해 윙크를 했다.

머리가 귀신같이 돌아간다.

미리 최강철로부터 수잔이 남자 친구가 없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이성일은 거침없이 수작질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스파링을 마치고 내려온 최강철로 인해 단박에 깨지고 말았다.

“수잔, 저 자식 말 듣지 마. 저놈은 밥 사주면 술도 사달라고 할 놈이야.”

시합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며 스태프들의 긴장은 최고조로 달했다.

캠프에는 황인혜까지 참여했기 때문에 최강철 진영의 스태프들은 4명으로 늘어났다.

황인혜는 한 달 전부터 캠프로 들어와 공식 행사와 기자들을 전담으로 상대하며 눈코 뜰 새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계체량 측정일이 되자 기자들이 벌 떼처럼 트리바고호텔로 몰려들었다.

공식 계체량이 끝나고 양 선수의 공식 기자회견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100여 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세계 타이틀이 걸린 세기의 대결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숫자의 기자들이 몰려든 이유는 브라운과 최강철의 네임 밸류가 그만큼 뛰어나기도 했지만 돈 킹과 밥 애런이 움직여서 언론 플레이를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국 언론들까지 가세했기 때문에 그 숫자는 더욱 불어났다.

최강철은 계체량 측정을 위해 일행과 함께 호텔로 들어서서 대기실에 머물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천천히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이건 뭐, 영화제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그가 행사장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많은 플래시 불빛이 번쩍거렸다. 얼마나 많은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는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신경전이 대단했다.

더스틴 브라운 쪽에서 나온 참관인은 그가 체중계에 올라갈 때부터 눈을 번쩍이며 감시를 했는데 그 장면이 기자들의 사진에 고스란히 찍힐 정도였다.

한계 체중에서 조금 미달되는 66.4㎏으로 계체량을 통과한 최강철이 기자들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이미 체중은 정확하게 맞춰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컨디션은 최고조였고 이제 시합을 치르기만 하면 된다.

계체량이 끝나면 대기실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행사 진행 요원은 최강철을 한쪽에서 기다리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스틴 브라운이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며 개선장군처럼 기자들을 향해 팔을 불끈 치켜드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하아, 그놈.

피지컬 하나만큼은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다.

더군다나 머리통이 작아서 어깨로 가리면 때릴 데가 없을 것 같았다.

더스틴 브라운의 계체량도 쉽게 끝이 났다.

얼핏 보면 미들급이라 해도 믿을 만큼 몸통 전체가 근육으로 덮여 있었지만 의외로 놈의 체중은 66.5㎏에 불과했다.

연습량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저 정도의 피지컬이라면 평소 체중은 틀림없이 75㎏에 육박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계체량이 모두 끝나자 진행 요원이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해주라는 요청을 해왔다.

포즈의 종류는 두 가지.

하나는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해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를 향해 주먹을 겨누는 포즈였다.

진행 요원의 요청에 따라 최강철이 중앙으로 나가 손을 내밀었으나 어느샌가 옷을 입은 더스틴 브라운은 팔짱을 낀 채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치워, 이 새끼야. 더러운 그 손 치워. 악수는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야.”

하아, 이놈 봐라. 이것도 신경전이냐, 아니면 나에 대한 경멸감의 표현이냐?

그동안 시합이 결정된 이후 양 선수의 인터뷰 내용이 계속해서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각 진영의 감정은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특히 더스틴 브라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비난을 계속 키워왔다.

제프 카터는 신경전을 펼치는 것이라며 상대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비난이 언론에 계속해서 나올 때마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내민 손을 들어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는 놈의 면상을 가격하고 싶었으나 최강철은 꾸욱 참고 천천히 손을 거둬들였다.

모든 게 기자들에게는 뉴스거리다.

아니, 오히려 이런 건 독자들의 흥미를 충분히 유도할 만큼 자극적인 것이었기에 기자들은 더스틴 브라운이 비웃음을 띄며 악수를 거부한 장면을 미친 듯이 찍어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로를 향해 주먹을 겨누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더스틴 브라운의 도발은 더욱 커졌다.

놈은 포즈를 취하다가 갑자기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번개처럼 뻗어서 최강철의 턱 앞에서 멈췄는데 1㎝만 더 나왔어도 가격이 될 정도로 기습적인 행동이었다.

이 씨발 놈이.

놈의 스트레이트가 나오는 순간 슬쩍 얼굴을 비켰던 최강철의 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도발도 분수가 있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은 기자들이 어떻게 쓸 것인지 두려워서가 아니라 놈의 행동이 가소로웠기 때문에 두고 봤을 뿐이다.

“주먹 안 치우면 죽여 버린다!”

“크크크… 네 별명이 허리케인이라며. 참 가소로운 별명이야. 햇병아리가 몇 번 날뛴 걸 가지고 허리케인이란 별명을 지어주다니 얼마나 웃긴 일이냐. 조금만 기다려. 이 주먹으로 박살을 내줄 테니까.”

“너 정말 주먹 안 치울 거냐. 여기서 몇 대 맞고 뒈져볼래?”

“어이, 냄새나는 노랭이. 이번에 개구리가 되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서 다시는 오지 마. 미국은 냄새나는 노랭이들이 함부로 노는 곳이 아니냐.”

“닥쳐, 이 씨발 놈아. 깜둥이 주제에 어디서 인종 차별이냐. 병신 같은 놈. 자존심도 없는 새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깜둥이? 너 이리 와. 이리와, 이 자식아!”

도발에 도발로 맞대응한 최강철의 태도에 더스틴 브라운이 이성을 잃고 주먹을 날리자 현장이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진행 요원이 중간을 가로막았으나 더스틴 브라운이 계속해서 달려들자 윤성호와 이성일이 최강철을 뒤로 밀어내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브라운의 스태프들이 달려 나와 엉켰기 때문에 계체량 측정 행사장은 양 진영의 몸싸움으로 인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장면들은 기자들에게 더없이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공식 인터뷰를 위해 몰려들었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총알처럼 빗발치며 양 진영의 몸싸움을 찍어대며 기쁨의 환호성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크크크… 재밌다, 재밌는 일이다.

최강철은 뒤쪽으로 물러나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더스틴 브라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놈은 멀찍이 떨어져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바보 같은 놈. 신경전을 걸어왔으면 당연히 반격이 있을 거란 생각도 했어야지.

알겠다. 네가 어느 정도의 멘탈을 가졌는지.

이 정도 도발 정도로 그렇게 흥분한다면 너는 이틀 후 나한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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