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77화 (77/308)

[77]

* * *

돈 킹은 톰슨이 계약서를 들고 오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최강철은 그만큼 상품 가치가 뛰어난 놈이었기 때문이다.

“잘했어, 톰슨. 아주 잘했어.”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강철은 이미 우리와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정과 의리에 약한 민족입니다. 그 친구 말로는 밥 애런 쪽에서 좋은 조건을 내밀었어도 단칼에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요. 어떻게요?”

“그건 내가 보낸 거거든. 그 자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떠볼 생각이었다.”

“음… 그렇군요.”

톰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작자들은 속에 몇 마리의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 것일까?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상대 진영에 정보원까지 심어놓고 있으니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더스틴 브라운이 밥 애런과 계약했다는 것도 사실은 돈 킹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것이 자신과 돈 킹의 차이다.

차갑다. 그리고 처절하리만치 냉정해서 일을 추진하는 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놈이 따로 요구한 건 없던가?”

“있습니다. 강철은 계약하면서 북미 타이틀에 도전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푸하하… 그렇지, 그랬을 거야.”

“아무래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쪽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지금 웰터급은 내가 정신없는 사이에 밥 애런 그 자식이 전부 말아먹고 있잖아. 잃었던 건 찾아와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강철 그놈에게 큰돈을 들였으니 이제 본전을 찾아야 되지 않겠어?”

“당장은 어렵습니다. 아직 지명 도전권을 행사하려면 한 게임이 남았으니까요.”

“괜찮아. 그 정도를 못하면 돈 킹이 아니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밥 애런 프로모션은 신년이 되면 매번 소속 선수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여는데 소속원들 간의 유대를 넓히고 세계 최고 프로모션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긍심을 높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전 체급에 걸쳐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놈들이 이곳 파라다이스호텔 리셉션장에 가득 들어찼다.

밥 애런은 검사 출신으로 일찍 돈에 눈이 뜨면서 프로모터로 전환한 후 수없이 많은 빅 이벤트를 개최해서 떼돈을 벌어들인 인물이었다.

인텔리 출신답지 않게 성격이 냉혹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선수 보는 눈은 누구보다 정확해서 슈퍼스타로 키워낸 놈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곳에 모인 선수들을 바라보며 밥 애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연신 흘렸다.

래리 홈즈, 듀란, 헌즈, 아르게요, 아론 프아이어 등 이름만 대면 전 세계 복싱 팬들이 환장할 만한 놈들이 대거 포진되었으니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파티의 생명은 즐거움이다.

주먹질로 인생을 살아가는 놈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술과 여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랬기에 이곳에는 그가 초청한 여자 연예인들과 모델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의 초청을 거부한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한순간의 인연으로 슈퍼스타와 잠자리를 갖게 된다면 유명세와 더불어 엄청난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으니 그런 기회를 그녀들이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밥 애런은 선수들과 미녀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연신 술잔을 부딪쳤다.

얼굴에 미소를 잔뜩 담고서.

대단한 실력을 가진 놈들답게 행동이 천차만별이고 예의 없게 행동하는 놈들도 부지기수였으나 밥 애런은 놈들의 행동에 맞춰주며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놈들은 전부 막대한 돈을 벌어주는 기계들일 뿐인데 잠시의 분노로 기계를 고장 낼 이유가 없었다.

한동안 슈퍼스타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최근 큰 비용을 들여 영입한 더스틴 브라운의 앞이었다.

독사 같은 눈을 가진 놈이다.

벌써 3번째 만났지만 놈은 언제나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봤는데 존경심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하긴, 이놈의 이런 태도와 실력 때문에 영입을 주저하지 않았다.

링의 난폭자.

시합을 할 때마다 철저하게 냉정한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며 압살해 나가는 그의 복싱스타일은 관중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하렘가에서 자랐다고 했던가.

특유의 불량스러움을 가졌고 제대로 못 배웠기 때문인지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첫 번째는 레너드가 은퇴했을 때 강력한 대항마로 키우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최강철을 박살 내기 위함이었다.

돈 킹에게 백만 달러를 송금하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무식한 돈 킹의 비웃음을 참아내야 했던 분노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제도 그랬다.

놈은 불쑥 전화를 걸어와서 저번 내기를 거론하며 자신의 속을 박박 긁었던 것이다.

개자식이다.

본전을 뽑고 싶다면 북미 타이틀을 놓고 다시 한번 내기를 하자고 했는데 그 말투가 진저리치도록 얄미워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봐, 브라운. 즐기라고. 여긴 많은 미녀가 있는데 왜 혼자 이러고 있나?”

“재미없습니다.”

“뭐라고?”

“여자야 언제든지 안을 수 있는데 뭐가 재밌겠습니까. 나는 싸우기 위해 여기에 왔지 여자를 끼고 놀기 위해 온 게 아니요.”

“그러면 뭘 원하나?”

“타이틀전에 도전하게 해줘요.”

“타이틀전이라. 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시기라는 게 있어. 지금 자네는 타이틀전에 도전할 수 없네.”

“무슨 소립니까?”

“챔피언들의 일정이 꽉 차 있기 때문이야. WBA 쪽은 레너드와 헌즈의 2차전이 눈앞으로 다가와 조율 중이고 WBC 쪽은 도널드 커리와 아론 프라이어가 싸울 예정이네. 그런 와중에 자네같이 강력한 적수와 시합을 하려고 하겠는가.”

밥 애런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하면서 더스틴 브라운을 추켜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무식한 놈들에게 가장 약발이 잘 먹히는 건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스틴 브라운의 독사 같은 눈빛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밥 애런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대로 늙어 죽으란 말입니까!”

“브라운 자네는 아직 한창인 나이야. 이제 26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뭘 그리 서둘러. 그놈들의 빅 이벤트가 끝나면 나는 자네의 타이틀 도전 일정을 잡을 생각이야.”

“답답한 소리군요.”

“기다리게. 그러면 올해가 가기 전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정말입니까?”

“날 못 믿나?”

계속되는 추궁에 밥 애런이 눈을 지그시 오므리며 더스틴 브라운을 노려봤다.

기어오르는 것도 분수가 있다.

아무리 큰돈을 들여 데려왔다 해도 놈은 소모품에 불과했으니 한계를 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넌 네가 엄청난 스타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가소로운 생각이다. 나는 북미 타이틀 홀더 정도는 안중에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그럼 왜 데려온 거요?”

“방금 한 말처럼 나는 너를 세계 챔피언으로 키울 생각이다. 올해 안으로 말이야. 그러니 자꾸 날 자극하는 행동은 하지 마.”

“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뭡니까?”

“돈 킹이 키우는 놈이 있어. 들어봤을 거야, 최강철이라고. 알지?”

“압니다. 제법 하는 놈이더군요.”

“이번에 그놈 쪽에서 NABF(북미 복싱 연맹)에 지명 도전권을 신청해 왔다. 크게 한판 붙자고 하더군.”

“나는 아직 지명 도전을 받으려면 한 경기가 남았습니다.”

“왜, 겁나나?”

“크크크……. 지금 나보고 겁나냐고 물은 거요!”

더스틴 브라운의 눈매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으며 밥 애런을 쏘아봤다.

자격지심이 아니라 자신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링에 오르면서 상대를 두렵게 만든 적은 많았지만 자신이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신히 참고 있는 자존심을 긁는 행위는 참을 수 없다.

그랬기에 겨우겨우 예의를 지키던 더스틴 브라운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밥 애런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최강철은 강한 놈이야.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 나는 돈 킹의 수작질에 말려들 생각이 없거든.”

“붙여주십시오.”

“뭐라고?”

“지명 도전권을 받아들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놈을 깨뜨리고 타이틀전에 도전하는 것으로 하죠.”

“꼭 그럴 필요 없어. 너는 약한 놈들과 몇 경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타이틀전에 도전하게 된다. 그런데 뭐 하러 모험을 한단 말이냐. 다시 말하지만 최강철 그놈은 야수 같은 놈이야!”

“애런, 혹시라도 내가 질까 봐 그러는 겁니까. 이 더스틴 브라운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언제라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시합을 잡아줘요. 그놈을 박살 내고 당당하게 타이틀전에 도전할 테니 말이오.”

* * *

서지영은 한 달 만에 뉴욕 퀸즈에 있는 집을 찾았다.

엄마가 말바의 고급 주택을 구입한 건 10년 전이었는데 그녀가 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면서 지금은 이모네 식구들이 들어와 같이 살고 있었다.

말바의 집에서는 퀸스와 브롱스를 연결해 주는 화이트스톤 브릿지가 보였고 이스트리버 강가에 인접해 있어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외롭게 지내던 엄마에게 이모는 혈육이기 이전에 더없이 친한 친구였고 그녀와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저녁을 먹은 후 정원에 나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하늘, 멀리서 보이는 브릿짓의 웅장함, 강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평화로운 이 장면을 그녀와 엄마는 너무나 사랑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것들도 엄마의 신문이 시작되면 금방 현실 속에서 사라져 갔다.

“지영아, 올해만 지나면 졸업인데 결정했니?”

“아직 못 했어.”

“얼른 결정해야지. 네 실력이면 당연히 와튼스쿨에 들어가야 되잖아?”

“엄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지 몰라. 공부보다는 빨리 회사에 들어가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너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네가 무슨 돈이 필요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돈만 해도 평생 동안 먹고살 수 있는데.”

“알아. 하지만 인생을 허비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니?”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 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 아, 맞다. 나 오기 전에 향수 뿌렸어요. 히힛… 라벤더 향수.”

김정숙이 눈을 오므리며 째려보자 서지영이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애교라기보다는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입에서 나올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했다..

“남자 생겼지?”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 네 몸에서 남자 냄새 난단 말이야.”

“이거 왜 이러세요. 엄마 딸 아직 처녀거든요. 처녀한테서 어떻게 남자 냄새가 난다고 그래. 말도 안 돼.”

“이것아, 남자하고 자야만 냄새가 나는 줄 알아! 어떤 놈이야? 솔직히 불어.”

이 말을 물어주길 바랐다.

엄마와 그녀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살아온 사이였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슴속의 비밀조차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직 사귀는 거 아냐. 그냥 친구로 여럿이 만나고 있어.”

“미국 애니?”

“아니, 한국 사람.”

“호오, 여긴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만났어. 유학생이야?”

“호호… 그건 아닌데, 학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얘 봐, 정말 이상하네. 너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기나 해? 완전히 바보 같다고.”

“엄마,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여자가 남자 좋아하면 가슴이 막 뛰고 그러나?”

“너 걔 보면 가슴이 막 뛰고 그래? 바보처럼 웃음 나오고, 안 보면 보고 싶고 그러니?”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것 같구만. 하아, 드디어 우리 딸이 마음에 드는 놈을 만난 모양이네. 아이고, 다행이다.”

“엄마, 그러지 마. 자꾸 그러니까 이상해지잖아.”

서지영의 얼굴이 발갛게 변해서 몸을 들썩였다.

그 모습을 본 김정숙의 얼굴에서 햇살처럼 밝은 웃음이 흘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애를 태우던 딸의 입에서 남자 이야기가 나오자 흥분에 겨워 온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였다.

“그 남자도 널 좋아하니?”

“아뇨, 그런 것 같지 않아. 그 남자 목석이거든.”

“도대체 그게 무슨… 얼마나 만났는데!”

“1년 정도… 그 전에는 얼굴만 몇 번 봤고 1년 전부터 친하게 지냈어.”

“아니, 어떤 놈이 우리 딸처럼 예쁜 여자를 보고도 상사병에 안 걸려. 걔 혹시 뭐가 모자란 애 아니니?”

“엄청 똑똑해. 호호… 그리고 엄청 매력적이야.“

“야, 이 팔푼아. 아이고, 이걸 어째. 혹시 걔, 네가 좋아한다는 거 알아?”

“몰라, 우린 지금까지 친구로 지냈거든.”

“이 바보야. 하필 처음 하는 사랑이 왜 짝사랑이야. 어쩌려고 그래!”

“엄마, 나 어쩌면 좋지?”

“꼬셔. 네가 좋아하면 무조건 꼬시란 말이야. 예쁘고 순수하게, 그리고 너무 티 나지 않게 접근해서 그 사람이 먼저 좋아하게 만들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요.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려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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