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제11장 허리케인
서지영이 돌아왔을 때 클로이와 수잔은 자신의 룸에 퍼질러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간 공부에 미친 애들이다.
버젓이 자신들의 방이 있음에도 여기까지 와서 죽치고 있는 건 최강철을 쫓아간 자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룸으로 들어서자 친구들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야, 왜 이제 와. 지금까지 그 남자와 같이 있었던 거야?”
“우와, 벌써 모텔 갔다 온 건 아니겠지?”
클로이가 먼저 물었고 그 뒤를 수잔이 받으며 어이없는 질문을 해댔다.
친구들은 김칫국 먼저 마시며 최강철이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둥 어이없는 소리를 해댔지만 서지영은 그런 소리들에 대해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운명적인 사랑이 어디 있고 운명적인 인연이라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 생각하는 이상형을 만나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지 사랑에 빠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서지영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옷을 갈아입자 두 여자의 성화가 극에 달했다.
“지금 너 우리 궁금하게 만들어서 죽일 생각이지? 빨리 말 안 해?”
“쫓아가서 뭐 한 거니. 마음에 든다고 고백했어. 그러니까 사귀자고 하디?”
클로이와 수잔이 번갈아 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서지영의 앞쪽으로 바짝 다가와 레이저 광선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서지영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자 단박에 호기심이 가득 찬 시선으로 즉시 입을 닫았다.
“미안하다고 했어. 오해해서.”
“그랬더니?”
“받아준다고 하더라. 조금 불쾌했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수 있었던 일이라며 웃었어.”
“사귀자고 했니?”
“이 바보야, 우린 겨우 두 번째 만났어. 넌 두 번 본 남자한테 사귀자는 말이 나온다고 생각해?”
“왜 못 해. 운명적인 사랑이잖아!”
“누가 운명이래. 넌 참 이상한 애야. 그 사람하고 나하고 어떻게 운명적인 사랑이 된 거니?”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서지영이 두 번이나 쫓아갔잖아. 그 정도면 운명적인 사랑 아니야?”
“정말, 내가 못 산다.”
서지영이 가슴을 두드리자 클로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남자를 두 번이나 쫓아갔다면 당연히 마음에 들어서 그랬을 거란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자 가자미눈을 한 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건 수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왜 지금까지 부인하지 않았어. 우린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재밌으라고 그랬다.”
“아이고.”
“오늘 그를 만난 건 정말 사과를 하려던 것뿐이야. 그동안 계속해서 미안했거든. 이젠 마음이 편안해졌어.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의심한다는 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에이 씨, 그럼 별거 아니라는 거야?”
“그래, 별거 아냐. 다음에 만나면 편하게 대화하자고 했어. 그 사람이 다음엔 너희들도 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정말?”
“넌 내가 거짓말쟁이로 보이니?”
“호호…그럴 리가. 그래서 그 사람 언제 온다는데?”
“시합 잡히기 전까지는 계속 온다고 하더라. 요즘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대.”
“잘됐다. 우리 같이 수업 끝나고 맥주 한잔하자. 우리 지영이가 마음에 없다니까 내가 접근해 봐야겠어. 그 사람 오늘 보니까 더욱 멋지던걸. 난 교수님이 질문했을 때 그 사람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우와, 대체 자원 경제라… 난 그런 말 처음 들어봐.”
“복싱 선수가 경영학도라니 얼마나 멋있니. 나도 기대된다, 얘.”
“넌 왜 기대돼. 남자 친구도 있는 애가.”
“남자들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사랑은 변하는 거잖아. 안 그래?”
장난스럽게 클로이가 대답하자 서지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클로이는 대학 입학생 때 사귀기 시작했던 죤과 벌써 3년째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가 미국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열녀문이라도 세워줘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어.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났잖아?”
“그 사람이 뭘 자꾸 물어봐서 오래 걸렸어.”
“뭘 물어봤는데?”
“너희들이 들으면 조금 어이없을 것 같은데……. 그 사람, 투자 전문 회사를 만들려고 준비 중인 가 봐. 그래서 설립 조건과 정부의 지침, 규제, 세금 이런 걸 묻더라.”
“호호… 말도 안 돼. 그 사람 나이가 몇인데 투자 전문 회사를 만들어? 농담한 거 아니야?”
“농담 아니야. 벌써 주식에 38만 달러 정도가 있단다. 내년 정도면 설립 기본 자금은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우와, 갈수록 흥미로운 얘기네. 복싱해서 돈 많이 벌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알아본다고 했어. 나도 투자 전문 회사는 말만 들었지 상식적인 거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거든. 사실 나도 긴가민가해. 너무 어린 나이에 회사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내가 알아보겠다고 했던 건 갑자기 창피하단 생각이 들어서였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투자 전문 회사에 취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란 말이지. 그래서 쿨하게 알아봐 준다고 한 거야. 내 공부도 될 겸 해서.”
“옳지, 잘했다. 그렇게라도 만나야 인연이 되든 사랑이 되든 하지.”
“너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면 나 말 안 한다!”
“쏘리, 그냥 해본 소리야. 그래서 그다음은?”
“그 사람 알고 보니까 농담도 잘하더라고. 아주 재밌는 사람이야.”
“왜, 뭐라고 그랬는데?”
“자기가 투자 전문 회사를 설립하면 나보고 회사를 운영해 달래. 돈 많이 준다면서. 재밌지 않니?”
“호호호…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 천하의 서지영을 뭘로 알고 그런 작은 회사에 취직하라는 거야. 혹시 네가 마음에 들어서 농담한 거 아닐까?”
“당연히 농담이지.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제안을 했겠어.”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주는 게 예의잖아.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 나 잘했지?”
* * *
최강철은 꾸준히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지영의 친구들인 클로이와 수잔을 같이 만나서 밥도 먹었고 맥주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즐거웠다.
천재 중의 천재들인 그녀들과의 대화는 재밌고 유익했으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활력소였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시합이 잡힐 때마다 한동안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본업은 현재까지 복싱 선수였으니 말이다.
5일 전에 벌어진 휘슬러와의 경기까지 4번의 시합을 치러 전부 KO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라이언 캐슬러와의 시합에서 승리 후 북미 랭킹 10위에 올랐던 그의 포지션은 승수가 계속 쌓이면서 1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태였다.
그 이면에 작용한 것은 당연히 돈 킹의 힘이었다.
WBA, WBC를 완전 장악하고 있는 그의 능력은 최강철의 포지션을 단 10개월 만에 상위 랭커로 등극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최강철의 위상은 관중 숫자로 확인될 만큼 커진 상태였다.
기존의 팬들과 헌즈 대 헤글러전을 통해 전 세계 복싱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지 2번 치러진 로컬 메인 게임에서도 그의 시합은 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결정적으로 커진 것은 최근 럼블 측이 주최한 세계 타이틀전에 그를 오픈 게임으로 2번이나 출전시켰기 때문이다.
“허리케인 초이.”
미국 복싱 팬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최강철은 압도적인 스피드와 테크닉, 불꽃같은 콤비네이션으로 상대를 쓰러뜨려 그의 경기를 볼 때마다 관중들은 열광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위상의 변화. 시간이 갈수록 최강철은 미국 복싱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인기 복서로 거듭 성장하는 중이었다.
1985년 12월 31일.
또다시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동안 미국으로 넘어와 12전 12KO승을 거두며 북미 랭킹 1위까지 올라섰으니 복서로서 충분히 성공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증권 계좌에는 무려 150만 달러라는 거금이 예치되어 있었다.
최근 벌어진 4경기를 전부 이기면서 계약서에 명시된 최고 금액인 30만 달러를 계속 수령했는데 최강철은 이 돈을 똑같은 주식에 투자했다.
수익률이 무려 28%에 달했다. 1년 만에 거둔 수익치고는 상당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일행이 거실에 모인 것은 저녁 6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윤성호와 이성일에게는 투자하라는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돈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들은 써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 투자를 강요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산 후 집으로 돌아와 망년회 준비를 했다.
주로 음식을 준비한 것은 윤성호였지만 최강철과 이성일도 채소를 다듬으며 그를 도왔다.
윤성호는 절대 두 놈이 그냥 노는 꼴을 두고 보지 않았다.
“야, 거기 가스레인지에 불 좀 줄여. 무려 김치찌개다. 그거 넘쳐서 국물이 손상되는 몰상식한 사태가 벌어지면 죽을 각오해. 강철이, 너는 기름장 좀 만들어. 야, 인마. 참기름을 그렇게 많이 부으면 어떡해. 아이고, 이것들을 정말…….”
끊임없는 잔소리.
황인혜에게 부탁해서 교민들에게 그 귀하다던 김치를 얻었고 참기름과 된장과 고추장까지 마련했다.
그들이 한국에 있을 때 자주 먹던 삼겹살을 보는 순간 이성일은 눈물까지 흘리는 시늉을 했을 정도니 오늘의 파티가 망가진다면 그야말로 초죽음이 예상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자글자글.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에 최강철과 이성일이 침을 꼴깍 삼키며 두 눈을 떼지 못했다.
고소한 냄새.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삼겹살 냄새란 말인가.
음식이 마지막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시작할 때부터 윤성호는 두 놈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장인의 정신으로 마무리에 정성을 다했다.
이윽고 그의 손에 하나씩 반찬들이 식탁에 차려지자 최강철이 시합에 이긴 놈처럼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고 이성일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제 다 끝난 거죠?”
“조금만 더 기다려. 호박전하고 생선전을 부쳐야 하니까 손대면 안 돼!”
“거 대충하고 그만 먹읍시다. 기다리다가 허기져서 죽으면 관장님이 책임질 거예요?”
“이 자식아, 곧 인혜 씨 도착한다고 했어. 손님 불러놓고 우리 먼저 먹으면 그게 사람이냐, 짐승이지?”
“아이고, 그 누나는 금방 도착한다더니 왜 안 오는 거야. 우와, 사람 미치겠네.”
그때 문이 열리며 황인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도 제 말 한다면 나타난다더니 꼭 그 짝이었는데 황인혜는 호랑이가 아니라 남자를 홀리기라도 하려는 듯 천사 같은 모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어디 파티라도 가시나요?”
“응, 파티에 초대받아서 왔잖아. 성일이 네가 초대한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나는 조기서 열심히 음식 준비 하고 계시는 관장님이 전화하라고 난리를 피워서 협박에 못 이겨 전화했을 뿐입니다.”
“호호… 그랬어?”
“어, 어. 관장님. 혹시 그 아까운 김치찌개를 나한테 부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이성일이 엉덩이를 빼면서 뒤로 도망갔다.
어느새 다가온 윤성호가 김치찌개를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인이 뒤로 도망가고 천사가 앞에 나타나자 그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양으로 변했다.
“인혜 씨, 어서 와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 놨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앉으세요. 거의 음식 준비가 다 됐으니까 금방 식사할 수 있을 겁니다.”
“냄새가 너무 좋아요. 음색 냄새를 맡으니까 배에서 밥 달라고 마구 아우성치는데요.”
“누나, 김치찌개 먹어본 적 있어요?”
“그럼, 나 한국 사람이야. 여러 번 먹어본 적 있어.”
“삼겹살은요?”
“한국 친척집에 놀러갔을 때 먹어본 적 있어. 정말 맛있더라.”
“그렇군요. 아깝다. 성일아, 누나가 김치찌개도 먹고 삼겹살도 먹는단다. 이걸 어쩐다냐. 우리 몫이 줄어들었어.”
“에이, 천사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 우리가 조금 양보하지, 뭐.”
최강철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농담을 하자 이성일이 태연하게 뒤를 이으며 황인혜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꺼내주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나름대로 신사도를 보여주며 이성일은 한껏 폼을 잡았다.
웃긴 놈.
최강철이 주먹을 치켜드는 걸 보며 황인혜가 깔깔거리며 웃을 때 열심히 음식을 나르던 윤성호가 마지막 음식인 삼겹살을 접시에 담은 채 식탁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먹읍시다.”
“잠깐, 스톱! 결정적인 걸 안 가져왔잖아요.”
이성일이 뒤늦게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 후 양손에 뭔가를 들고 식탁을 향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본 황인혜가 손뼉을 치며 반색을 했다.
“우와, 소주다.”
“소주도 마실 줄 알아요?”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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