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 * *
“으악… 아이고, 큰일 났네.”
김영호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입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꽃다방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터뜨린 비명이기도 했다.
최강철이 불의의 훅을 맞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그동안 함성을 지르며 응원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줄어들었다.
다행스럽게 다운을 면하고 뒤로 후퇴하며 최강철이 방어에 성공하자 줄어들었던 사람들의 음성이 서서히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돌아. 인마, 돌라고!”
“왜 거기 서 있는 거야. 빠져나와야지!”
“우와, 미치겠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네. 반격해, 이 자식아. 주먹 뒀다가 뭐 해!”
김영호가 한마디 하면 그 옆에서 류광일도 싸우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습격을 받은 후 최강철이 로프에 기댄 채 방어에 치중하고 있자 두 사람은 연신 소리를 질러대며 간절한 표정으로 그가 빠져나오기를 기원했다.
환장하도록 안타까웠다.
꽃다방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기에 그토록 강력하게 공격하던 최강철이 움직이지 못한 채 얻어맞고 있는 걸까.
다 이긴 경기를, 다 잡은 대어를 기습 공격 한 방에 당해서 놓친다고 생각하자 김영호와 류광일은 이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복싱광들이었으니 누구보다 경기의 흐름을 잘 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변해갔다.
다 죽어가던 그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뀐 것은 텔레비전에서 침울한 목소리로 중계하던 캐스터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커졌을 때였다.
-최강철 선수, 밀고 나옵니다! 라이트 훅, 라이언 캐슬러 주춤거리고 물러섭니다! 공격합니다. 최강철 선수, 폭풍 같은 대시를 하고 있습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 레프트 훅, 바디도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연타 세례를 퍼붓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최강철 선수가 핀치에서 벗어나 다시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강력합니다. 라이언 캐슬러 계속해서 몰립니다!
-완전한 반전입니다. 최강철 선수, 충격을 완화시키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다시 레프트 보디에 이은 안면 스트레이트. 라이트 훅! 다운, 다운입니다! 최강철 선수가 라이언 캐슬러를 다운시켰습니다! 대단합니다, 최강철 선수 대단합니다!
-아, 다시 일어나는군요. 하지만 충격이 큰 거 같습니다. 다시 공격하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언 캐슬러 도망갑니다. 따라붙는 최강철! 어마어마한 콤비네이션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반격을 하지 못하는군요. 클린 히트. 라이언 캐슬러의 안면에 다시 연타 공격이 들어갑니다…….
침울했던 꽃다방에 다시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주먹을 들고 한꺼번에 설치는 바람에 꽃다방은 금방 격렬한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최강철이 주먹을 날릴 때마다 같이 주먹을 휘두르는 그들의 표정에는 간절함과 기대감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열광을 넘어선 광란이다. 그리고 뜨거운 성원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움이 가득 찬 탄성이 터진 것은 공이 울리며 레프리가 최강철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였다.
시간이 아쉽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쓰러뜨릴 수 있었는데 야속하게도 공은 여지없이 울리고 말았다.
“가만, 김 대리. 저놈 이상해.”
“응? 저 새끼 왜 안 가는 거야. 공 쳤는데?”
“어라, 저거… 정신을 잃은 거 아니냐?”
웅성웅성.
레프리가 라이언 캐슬러를 부축했음에도 움직이지 못하자 코치진들이 링으로 뛰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들쳐 업고 코너로 돌아갔는데 라이언 캐슬러는 의자에 앉지 못하고 스르륵 바닥에 쓰러졌다.
레프리가 경기가 끝났다는 선언을 하자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던 꽃다방 관중들의 입에서 폭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최강철, 이 미친놈.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햐아, 아우 소름 끼쳐. 너도 봤지, 마지막 공격 말이야. 난 저놈이 한 방 한 방 때릴 때마다 내 몸이 다 움찔거렸다니까.”
“난 이제부터 완전 최강철 팬이다. 저런 놈이 세상에 또 어디 있냐? 권투는 저렇게 해야지. 아우 심장 떨려. 아직도 진정이 안 되네.”
“야, 앉자. 내가 복싱 경기 보면서 별꼴을 다 겪어봤지만 이렇게 녹초가 되기는 처음이다. 저 자식 경기, 두 번 봤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어.”
“난 죽어도 좋아. 저 놈 다음 경기를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
* * *
최강철이 라이언 캐슬러를 때려잡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드는 순간 링 사이드에서 초조하게 경기를 관람하던 돈 킹과 톰슨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크하하하… 크큭! 최강철이 이겼어, 이겼다고!”
“회장님, 축하합니다.”
“저 자식 얼굴 봐라.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야. 경기 전에는 그렇게 여유 있게 웃더니 사색이 되었구만.”
돈 킹이 반대쪽에 있는 밥 애런을 가리키며 통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밥 애런은 잔뜩 얼굴을 굳힌 채 옆에 있던 참모들과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톰슨, 가자.”
“어딜 말입니까?”
“저 자식한테 돈 받아야지.”
“아… 예…….”
어정쩡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톰슨은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상도의라는 게 있다.
전쟁터에서도 전쟁에 진 병사는 죽이지 않는 법인데 자신의 보스인 돈 킹은 확인 사살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뒤늦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돈 킹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보스인 돈 킹은 필생의 적수인 밥 애런에게 맺힌 게 많았으니 이해하고 따라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최강철의 별명인 허리케인을 연신 연호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리케인.
누가 지었는지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별명이다.
놈의 무지막지한 진격과 번개를 동반한 펀치 샤워는 허리케인이란 별명과 더없이 어울렸다.
밥 애런은 돈 킹이 링을 돌아 다가오는 걸 보며 인상부터 찡그렸다.
“뭐야?”
“응, 우리 애가 이겼다는 거 알려주려고.”
“못 배운 티를 내는 거냐? 보기 싫으니까 내 눈 앞에서 그만 사라져 줬으면 좋겠군.”
밥 애런이 돈 킹의 심장을 자극했다.
돈 킹은 못 배웠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돈 킹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좀 강한 놈으로 올리지 그랬어. 난 자네가 자신 있어 하기에 사실 속으로 졸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너무 약하잖아.”
“나중에 다시 한번 붙자. 그러니 오늘은 꼴 보기 싫으니까 그냥 가라.”
“크크크… 뭘 그렇게 신경질을 내고 그러나. 천하의 밥 애런이 그러면 안 되지.”
“이 자식아!”
“내 계좌 번호는 알지?”
“으…….”
“내일 오전까지 입금해 줘. 그걸로 추징금 내야 되니까 말이야, 푸하하하!”
* * *
서지영은 클로이와 수잔의 제의를 못 이기는 체 받아들였다.
톰은 서부 쪽에서 석탄 광산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학교 근처에 지어진 대저택을 살면서 수시로 파티를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양아치는 아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다닌다는 건 그만큼 그의 두뇌가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이었으니 조금 놀 줄 아는 멋쟁이란 표현이 더 어울렸다.
토요일 저녁 파티에는 거의 100여 명의 학생이 몰려들었다.
파티라고 하지만 절제 속에서 진행된다.
삼류 대학에 다니는 놈들은 마약과 섹스, 그리고 술에 절어서 온갖 미친 짓도 서슴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톰이 주최하는 파티는 은은한 음악 속에서 지식이 가득 찬 젊은이들의 고상한 대화가 주를 이뤘다.
그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싹을 피웠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뤄졌으니, 과정이 달랐을 뿐 파티의 목적과 결과는 같은 것이다.
거대한 저택의 정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사람들은 잔뜩 한곳에 모여 있는 중이었다.
평소와는 다르다.
이곳에 2번이나 왔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늘은 중간에 설치된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채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졌고 평소에는 공부의 늪에 빠져 살았는데 복싱이란 스포츠에 열광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최강철이 화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클로이가 맥주를 가져와 그녀에게 줄 때였다.
옷을 입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수하게 차려 입고 강의실에 왔을 때는 마음 착한 청년으로 보였는데 막상 트렁크만 입고 나타나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와, 저 복근 봐. 정말 멋있다!”
“환상적이네.”
수잔의 먼저 감탄사를 뿜어냈고 클로이가 뒤를 받쳤다.
그녀들의 말처럼 최강철의 복부에는 빨래판처럼 굵은 줄들이 새겨져 있어 보는 순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로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여자들의 로망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황홀한 몸매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다.
그러나 서지영은 아무런 말 없이 화면 속에 들어 있는 최강철을 바라봤을 뿐이다.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자 백여 명의 학생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만큼 뜨거운 경기였고 사람들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시합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미국인이 주를 이룬 학생들은 처음엔 라이언 캐슬러를 열렬히 응원했으나 그것은 곧 의미 없는 함성과 탄성으로 변해갔다.
국적이 필요치 않은 경기다.
두 사람이 어울려 싸우는 링에는 오직 전사들의 뜨거운 숨결만이 넘실거렸을 뿐이니 학생들은 그 열기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복싱을 싫어했지만 서지영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시합을 지켜봤다.
탄성을 지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주먹을 쥐며 흥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명의 7라운드에 들어서서 최강철이 위기에 몰렸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학생들의 함성이 커졌다.
워낙 치열한 경기를 펼쳤기에 누구를 응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미국 학생들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라이언 캐슬러를 응원하며 고함을 질렀다.
모든 사람이 라이언 캐슬러를 응원할 때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서지영이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벗어나. 도망가. 강철 씨, 도망가야 해!’
간절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최강철이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왜 그를 응원하고 있는 걸까?
단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가움에 못 이겨 말을 걸었고 잠시의 대화를 끝으로 헤어진 사람일 뿐이었다.
가끔가다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녀가 풀지 못했던 의문 때문이지 보고 싶다는 감정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응원하며 그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가 상대방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올가미에 걸린 맹수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화면으로 들어가 말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뭉텅 솟구쳐 올라왔다.
시합은 결국 그의 승리로 끝났다.
막판에 상대를 몰아치는 그의 불꽃같은 공격력에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감탄을 터뜨렸으나 그녀는 최강철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스르륵 의자에 주저 않은 후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었다.
최강철이 공격당하던 그 짧은 순간 얼마나 애를 썼던지 몸속에 들어 있었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마치 댄스 클럽에 온 여자들처럼 미쳐 날뛰던 클로이가 말을 걸어온 것은 최강철이 승리를 확인하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 때였다.
“지영, 저 사람 정말 대단해. 난 저렇게 복싱 잘하는 사람 처음 봐. 와우,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야.”
“한번 꼭 만나봤으면 좋겠어. 저 사람, 다시 우리 학교에 다시 올까?”
클로이에 이어 수잔이 소리쳤다.
그녀들은 정말 최강철의 복싱에 푹 매료된 것 같았다.
아직도 주변을 둘러싼 학생들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이라이트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그녀들을 주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클로이의 말이 이어졌다.
“올 거야. 그 사람이 지영이의 운명적인 사랑이면 꼭 다시 오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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