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 * *
김영호와 류광일이 꽃다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침 7시 반이었다.
텔레비전 중계가 8시부터라고 했기 때문에 마누라한테는 목욕 간다며 새벽같이 나왔지만 이미 꽃다방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뒤쪽에 자리를 간신히 잡고 쌍화차를 시킨 다음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면 복싱에 미친놈들이 많다.
물론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나 한국에는 복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 천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빰빠라 빰빠라… 빰빠라 빰빠…….
특집 방송을 알리는 음악 소리.
복싱 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MBC 권투의 로고송이 흘러나오며 아나운서와 캐스터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끄러웠던 다방 안이 순식간에 정적에 사로잡혔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들. 이종엽과 윤근모였다.
권투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들의 얼굴을 모르면 간첩이다.
이종엽과 윤근모는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추며 고정 프로그램인 MBC 권투를 진행했고 각종 타이틀전을 생방송했기 때문에 권투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지금부터 헌즈대 헤글러, 헤글러 대 헌즈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미국으로부터 직접 위성 중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윤 위원님, 이 두 선수의 대결은 오래전부터 화제를 몰고 왔는데요, 이번 경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지에서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이 전부 5 대 5로 예측하고 있다네요. 그만큼 박빙의 승부가 될 거란 이야기죠. 워낙 강한 펀치를 가진 선수들이라 저도 섣불리 예측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오늘 경기에는 또 하나의 화제가 있죠. 바로 우리나라의 최강철 선수가 오픈 게임으로 출전한다는 건데요. 최강철 선수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죠.
-최강철 선수는 아마추어 복싱에서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전적을 보유했던 선숩니다. 38전을 싸워 무려 37KO승을 기록했으니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웠죠. 세계 선수권과 아시안게임까지 재패했다는 건 이미 기사를 통해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7연속 KO승을 거두고 있는 하드 펀처고 테크닉도 훌륭한 선수입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말씀드리는 순간 최강철 선수가 입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경기 전에 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현지 영상 송출 시간과 중계 시간에 차질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당당한 모습입니다. 최강철 선수, 동쪽 통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캐스터의 말대로 최강철이 통로를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새벽부터 기어 나와 꽃다방 앞자리를 차지한 놈들 몇이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길게 빼 들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 저런 쌍놈의 새끼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예의가 없어, 예의가.
“어이, 거기. 대가리 좀 치워요. 뒷사람들 안 보이잖아!”
* * *
최강철이 링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링 사이드에 앉아 있던 돈 킹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맞은편 링 사이드에 앉아 있는 밥 애런은 참모들과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자신감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었다.
“톰슨, 저 새끼 표정이 기분 나쁘구만.”
“전문가들이 비교 평가 하면서 라이언 캐슬러가 이길 거란 전망을 내놨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기분이 한껏 고무된 것 같습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사실 걱정되긴 합니다. 라이언 캐슬러의 훈련량이 강철보다 훨씬 많았으니까요. 더군다나 케어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장단점 분석이 완벽하게 되어 강철의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 소문은 경기 때마다 나오는 거잖아. 그래, 강철 쪽은 어떤가?”
“쉽게 말해주지 않지만 나름 대비책을 마련해서 나온 것 같습니다. 강철 트레이너진도 꽤 하기 때문에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라이언 캐슬러가 나오는구만.”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에 돈 킹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말대로 서쪽 통로를 통해 라이언 캐슬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관중들의 함성은 최강철이 입장할 때보다 배는 더 커졌다.
“하여간 우리나라 놈들은 문제가 있어. 미국 우월주의에 너무 빠져 있단 말이야.”
“관중들의 반응이 중요한 건 아니죠. 강철은 매번 이런 경우를 당해왔지만 언제나 이겨 왔습니다.”
“아… 속 타. 거기 물 좀 줘봐.”
“강철을 믿으십시오. 이번에도 그는 반드시 해낼 겁니다.”
* * *
백인, 그것도 꽤 잘생긴 얼굴이다.
관중석에 있는 여자들이 비명을 질러가며 라이언 캐슬러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외모가 한몫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압도적인 KO 연승 행진을 벌이고 있으니 고정된 팬이 상당한 모양이다.
도발이냐?
라이언 캐슬러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가 주먹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최강철이 씨익 웃어주었다.
놈은 이번 시합에서 15만 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자신보다 적다.
그만큼 자신의 계약이 좋았다는 뜻이다.
눈을 돌려 링 사이드를 바라보자 톰슨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돈 킹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화이팅을 외치는 게 보였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돈 킹은 자신의 승리를 원하는 프로모터였고 그의 돈줄이기도 했으니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응원에 반응해 주었다.
메인 매치에 앞서 벌어지는 오픈 게임이라 특별한 행사는 없었다.
유명한 놈들을 소개하면서 시간을 끌거나 국가를 부르는 짓은 하지 않았기에 최강철은 자신의 전적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코너에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라이언 캐슬러는 최강철을 소개하는 동안 코너에서 펄쩍거리며 몸을 풀고 있었는데 코치진과 연신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여러분 소개하겠습니다. 홍 코너, 키 178㎝, 몸무게 67㎏, 7전 7승 7KO승. 한국에서 온 허리케인, 최. 강. 철!”
참, 소개도 간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내 아나운서의 손짓에 따라 링 중앙으로 나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한 후 코너로 돌아왔다.
그러자 윤성호가 인상을 바짝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표정이 맘에 안 들어. 우리를 샅샅이 훑었다더니만 뭔가 확실하게 준비한 모양이다.”
“우리도 준비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왠지 찜찜해. 뭘 준비했는지 일단 봐야겠어.”
“복싱은 준비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 잘 아시면서 그래요. 어쩌면 우리도 준비한 걸 쓰지 못할 수 있어요. 저놈도 마찬가지고요.”
“강철아, 이번 경기 중요해. 그러니까 신중하게 가자.”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이야긴지 너무나 잘 안다.
100% KO율을 자랑하는 놈이기에 걱정하는 것이겠으나 신중하게 해야 할 놈은 내가 아니라 저놈이다.
두 경기 더 치렀다고 해서 라이언 캐슬러가 자신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훈련량이 많았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제 피지컬이 완성되면서 훈련량의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된 상태였다.
라이언 캐슬러의 소개가 끝나자 관중들의 함성이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그에 대한 응원과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기대감이 그들을 흥분시킨 게 분명했다.
레프리의 신호에 맞춰 링의 중앙으로 걸어 나가자 라이언 캐슬러가 다가오며 불쑥 입을 열었다.
“노랭이, 3라운드 안에 끝내줄게.”
“닥쳐, 이 자식아.”
최강철이 눈을 부릅뜨며 라이언 캐슬러를 노려봤다.
노랭이. 동양인을 부르는 비속어로 미국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였다.
최강철의 반응에 라이언 캐슬러가 비웃음을 지으며 도발했지만 레프리는 경기 진행에 대한 설명만 할 뿐 제지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때앵!
공이 울리는 순간 링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는 생각은 중간에서 멈췄다. 라이언 캐슬러가 번개같이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던져 왔기 때문이다.
슬쩍 스토핑으로 차단하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강력한 라이트 훅을 관자놀이를 향해 갈겼다.
같은 선상에서 벌어진 공격.
너는 내가 너의 펀치력 때문에 아웃복싱을 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나는 너의 펀치를 두려워하지 않거든.
최강철의 라이트 훅이 관자놀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자 라이언 캐슬러의 허리가 반쯤 접히며 곧장 라이트 바디 공격이 왼쪽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반응이 빠르다.
오랜 시간 훈련을 해왔다더니 공격이 실패했다는 걸 느끼자 즉시 더킹을 작동시킨 후 반격을 가해왔다.
암 브로킹으로 차단하면서 몸을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라이언 캐슬러의 얼굴이 보름달만큼 크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놀랐어?
이 자식아, 이게 우리가 준비한 전략이야.
상대의 몸이 가슴으로 부딪혀 오자 최강철의 양쪽 훅이 옆구리를 때린 후 곧장 몸통으로 라이언 캐슬러의 가슴을 들이박았다.
전진.
물러서는 라이언 캐슬러를 향해 최강철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빛살처럼 터졌다.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한 상태였으나 라이언 캐슬러는 그 짧은 순간 가딩을 바짝 올려 최강철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물러서는 상대를 따라 들어간 최강철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또다시 터졌다.
선제공격.
적의 주 무기인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잡기 위해 윤성호가 짜낸 전략 중 첫 번째 것이었다.
윤성호의 전략은 간단했다.
아웃복서에게 라이언 캐슬러가 더욱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처음부터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주문을 했는데 그 선결 조건이 바로 이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다.
적의 장점을 완전 차단 하고 나의 장점으로 우위를 만드는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금방 눈으로 나타났다.
뒤로 물러서던 라이언 캐슬러의 얼굴이 최강철이 기습적으로 던진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걸리며 뒤로 반쯤 젖혀졌다.
일그러지는 표정.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라이언 캐슬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물러서던 몸을 멈추고 반격을 가해왔다.
이성일의 분석처럼 라이트가 좋다.
레프트를 던질 것처럼 페이크를 건 후 곧바로 스트레이트와 바디 공격이 연환되며 나왔는데 브로킹으로 막았어도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의외로 다시 물러선 것은 라이언 캐슬러였다.
놈의 라이트가 왼쪽을 두들길 동안 최강철의 속사포 같은 레프트 훅이 마주 달려 나가는 기관차처럼 라이언 캐슬러의 오른쪽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략.
콰앙, 쾅, 쾅!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우는 펀치 세례로 인해 양쪽 선수들의 몸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최강철은 경기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한시도 물러서지 않고 힘으로 라이언 캐슬러를 찍어 누르며 전진했다.
승리를 위해서는 더 좋은 방법도 있을 테지만 이번 경기만큼은 전 세계인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였으니 충격적이고도 화끈한 시합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라이언 캐슬러의 펀치도 빨랐지만 최강철의 펀치 스피드는 그보다 적어도 한 배 반은 더 빨랐다.
머리를 맞대고 싸웠음에도 계속 손해를 본 건 최강철의 펀치가 훨씬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미 관중들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불과 경기 시작한 지 2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두 선수가 머리를 맞댄 채 불같은 펀치들을 교환하자 흥분에 겨워 마구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 선수들의 접근전이 아니라 KO승률 100%인 선수들의 난타전이었기에 더욱 흥분했을 것이다.
라이언 캐슬러가 미친 듯이 주먹을 날려 왔으나 최강철은 계속 밀면서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언뜻 보기에는 일진일퇴의 경기로 보였겠지만 언제나 전장에서 밀려나고 있는 건 라이언 캐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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