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 * *
최우용은 아들의 사진이 신문에 나오는 걸 본 순간부터 몸이 붕 뜬 것처럼 허둥거렸다.
그는 토목 광구 계약직 운전원을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과 다르게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익숙해졌다.
택시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탔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별별 소리가 다 흘러나왔다.
군사정권이 저지르는 패악은 물론이고 정치권 소식과 하루건너 벌어지는 데모 이야기를 비롯해서, 각종 세상 소식이 전부 귀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삶은 전부 귀머거리와 눈 먼 봉사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데모하는 학생들은 전부 빨갱이고 군사정권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구국의 결단을 내린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들의 소식을 들은 것도 손님들로 인해서였다.
처음에는 술 취한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에 무관심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입에서 최강철이란 말이 나오자 귀가 번쩍 떠졌다.
“딸꾹, 신문 봤냐? 최강철이 요번 헌즈하고 헤글러 오픈 게임으로 나온다더라.”
“걔가 누군데.”
“왜 있잖아. 아시안게임에서 일본 놈 이기고 금메달 딴 애. 눈 쭉 찢어져서 피 흘리고…….”
“아, 그놈.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거길 나와?”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 갔었대. 거기서 복싱했던 모양이야.”
“그렇구만, 그거 재밌겠네……. 그나저나 오늘 마누라 바가지는 어떻게 피하지. 이젠 핑계 댈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걱정이야.”
“걱정도 팔자다. 직장인이 술 마시는 건 죄가 아냐, 인마. 다 지들 벌어 먹이려고 몸부림치는 건데 얻다 대고 바가지를 긁어!”
“제수씨한테 그렇게 말해봐라.”
“난… 딸꾹, 늘 당당하게 산다. 크크… 아침 되면 밥을 못 얻어먹어서 탈이지만.”
두 사람이 낄낄거리는 걸 보면서 최우용이 결국 참고 참았던 입을 열었다.
아들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묻고 싶었으나 두 사람이 워낙 총알같이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끼어들 틈을 찾기 어려웠다.
“저기, 손님.”
“뭡니까. 벌써 다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최강철이 시합에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최강철… 그렇지 최강철. 왜 복싱하던 애 있잖아요. 아시안게임 때 일본 놈 박살 냈던 고등학생. 걔가 이번 헌즈하고 헤글러가 시합할 때 나온대요.”
“정말입니까?”
“아까 저녁 스포츠 신문에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손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최강철의 아버지란 사실을 그들이 알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었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술 취한 손님들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얼굴을 신문으로라도 볼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쁠 것만 같았다.
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두세 달에 한 번씩 전화를 해왔지만 복싱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묵계.
아들과 동생이 가족들을 위해 팔려가듯 미국으로 간 사실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짐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언제나 아들을 보고 싶었다.
그 선한 눈망울과 하얀 웃음이 들어 있는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냈니, 아들아.
왜 이렇게 큰 시합을 치르면서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혹시 아버지와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런 거야?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이 놈아.
네가… 우리 아들이 싸우는 걸 다른 사람들은 다 보는데 부모가 못 봤다면 남들이 뭐라고 그러겄냐, 이 불쌍한 놈아!
* * *
한국 사람들은 아시안게임에서 최강철이 일본의 히로키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해서 쓰러뜨렸을 때의 흥분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록 2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나 스포츠서울이 최강철에 관한 기사를 터뜨리자 그때의 기억을 되살린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헌즈 대 헤글러라는 빅 이벤트의 오픈 게임이란 사실이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대일물산의 김영호와 류광일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모여서 반드시 커피를 마셨는데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사이였다.
“김 대리, 혹시 최강철 기억하냐?”
“너 신문 보고 묻는 거지? 나도 봤다, 그거.”
“옛날에 최강철 끝내줬잖아. 아시안게임 때 말이야.”
“맞아. 최강철 그 자식 완전히 폭격기였어. 난 그때 결승전보면서 소름이 다 끼쳤다니까.”
“미국 간다는 것까지 들었었는데 그동안 많이 컸더라. 확실히 펀치력이 좋은 놈이야. 벌써 7전 7KO승을 기록하고 있더구만.”
“아마추어 전적이 어디 가겠어. 그래도 대단해. 미국 본토는 날고 기는 놈들이 쌔고 쌨다던데 벌써 7연속 KO승이라니 정말 기대된다.”
“흐흐… 생각만 해도 즐거워죽겠네. 난 헌즈하고 헤글러 경기보다 그 경기가 더 기다려진단 말이야. 걔들이야 외국 놈들이지만 최강철은 우리나라 사람이잖아.”
김영호가 비실거리며 웃었다.
완전 골수 복싱 팬인 그는 오래전부터 헌즈와 헤글러의 경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말을 바꾸면서 최강철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류광일이 슬쩍 눈을 치켜뜬 건 그의 태도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비교할 걸 비교해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어떻게 최강철을 걔들하고 비교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놈인데. 그 자식 경기는 양념이고 헌즈 대 헤글러 경기가 진짜 아니겠어?”
“얘가 뭘 모르는 소릴 하고 있네. 이번에 나오는 라이언 뭐시긴가 그놈 전적 못 봤어? 9전 9KO승이라고. 둘다 KO율이 100%야. 넌 살 떨리지 않냐. 그런 놈들이 붙는다는 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아니라고 했어. 당연히 기대는 되지. 최강철이 미국 본토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다는 뉴스보고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데.”
“그놈 잘만 크면 같은 웰터급이니까 헌즈나 레너드 이런 놈들하고 붙을 수도 있겠다. 안 그래?”
“햐아, 생각만 해도 좋네. 내 생전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국까지 달려가겠다. 하지만 그런 빅게임이 벌어질 수 있을까?”
“천지신명께 기도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뭐, 세상에는 불가능이라는 게 없잖아.”
“어쨌든 며칠 안 남았으니까 같이 보자. 오케이?”
“복싱 구경은 꽃마차다방이 최고지. 거기 텔레비전이 화질도 좋고 화면도 커. 거기로 가자.”
“일찍 가야 돼. 그때가 되면 바글바글할 테니까.”
스포츠서울이 먼저 터뜨린 결과는 의외로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켜 한국 언론사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시합이 다가올수록 국민들의 반응이 점점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뒤늦게 많은 언론사들이 미국으로 속속 날아갔고 스포츠 면은 헌즈 대 헤글러의 기사 못지않게 최강철에 대한 뉴스들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뉴스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해서 추측성 기사가 난무했을 뿐이다.
시합을 코앞에 둔 최강철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럼블 측은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최강철의 신변을 보호했기 때문에 기자들은 먼발치에서 최강철이 움직이는 모습만 구경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최강철의 인터뷰 기사와 최근 근황에 대해서 송부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도환이었다.
김도환은 아예 최강철 일행과 숙식을 하면서 같이 움직였는데 남들이 보면 코치진의 한 명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선점이다. 그리고 정성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최강철을 따라다니며 취재하던 그의 정성이 뒤늦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클로이는 벤치에 앉아 있는 수잔을 향해 달려왔다.
도서관 앞 벤치는 그녀들 삼총사가 자주 찾아 쉬는 곳이었는데 언제나 이 벤치 앞에서 만나 잠시 동안 수다를 떨다가 강의실에 들어가곤 했다.
언제나 여유 있게 행동하는 클로이가 뛰어오자 수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왜 뛰어와. 무슨 일 있어?”
“수잔, 이것 좀 봐.”
“어허, 예쁜 아가씨가 허둥대기는. 평소의 너답지가 않잖아. 그런데 웬 신문이야? 어디서 전쟁 났니?”
“최강철, 최강철이 시합을 한대. 헌즈와 헤글러 시합 오픈 게임으로.”
“그 사람이 누군데?”
“왜 있잖아. 지영이가 말 걸었던 사람. 그 사람, 진짜 복싱 선수였나 봐.”
“정말! 어디, 어디 있는데?”
클로이가 내민 신문을 뒤늦게 낚아챈 수잔이 부리나케 기사를 읽어 나갔다.
거기에는 최강철의 얼굴과 함께 라이벌전이 펼쳐진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기사에서는 그의 별명이 허리케인이라는 것까지 알려줬다.
죽 읽어 내리자 최강철에 관한 것들이 소상하게 적혀져 있었다.
동양에서 온 갈색 폭격기.
기자는 엄청난 스피드와 펀치력으로 상대를 철저하게 부숴 버리는 그의 인파이팅이 복싱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사진이 흐려서 서지영이 말한 사람이란 단정을 짓지 못했지만 기사 말미에 적혀 있는 거주지가 뉴욕 외곽의 클리프턴이고 레드불스에서 훈련해 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그가 맞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영은 그가 뉴욕 외곽의 클리프턴에서 왔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클로이, 이걸 어쩌니?”
“뭘 어째.”
“지영이도 알아? 이 사람이 복싱 선수가 맞다는 거 말이야.”
“아직 모를 거야. 나도 오면서 우연히 버스에 있는 신문에서 봤으니까.”
“휴우…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네. 알려줘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오해는 풀어줘야 되잖아.”
“지영이 오늘따라 늦네.”
“수잔, 우리 오늘 잘하면 맛있는 저녁 얻어먹을 수 있겠다. 그렇지 않니?”
“바보야, 그러지 마. 괜히 우리가 나서서 떠들면 지영이 오히려 위축될 수 있어. 걔 성격 알잖아. 우리 때문에 잘될 일도 망칠수가 있다고.”
“헹… 말도 안 되는 소리. 운명적인 사랑을 이어주는데 왜 망쳐. 그건 괜한 걱정이야.”
“하여간 말이 안 통해요, 말이. 그나저나 이 사람, 정말 잘하나 봐. 전적이 엄청 좋네.”
“웰터급의 신성이라잖아. 그러니까 헌즈와 헤글러가 싸우는 데 나오는 거겠지.”
“내일 게임 정말 재밌겠는데. 그 사람들 경기만 가지고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데 최강철까지 나온다니까 더욱 기대가 된다. 안 그러니?”
“우리 톰네 집으로 가자. 거기서 전부 모여서 본다고 그러더라.”
“호호… 복싱 보고, 임도 보고 그러자는 거지?”
“싫어?”
“싫기는, 너무 좋아서 그래. 톰 친구 마이클도 왔으면 좋겠다.”
“지영이도 같이 가자고 그러자. 아무리 복싱이 싫어도 최강철이 나온다면 가지 않겠어? 난 걔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해.”
“야, 조용히 해. 지영이 온다!”
벤치에 앉아 떠들던 그녀들의 눈에 서지영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늘따라 하얀 원피스를 입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밝은 햇살과 어울려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을 보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들고 다가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지영, 어서 와.”
“아직도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네. 우리 커피 한잔하고 들어갈까?”
“그것보다 알려줄 게 있어.”
“뭔데?”
“그 사람 있잖아, 최강철. 신문에 나왔는데 정말 복싱 선수였어. 여기 크게 나왔어.”
클로이가 눈치를 보면서 신문을 건네자 서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흐릿한 사진이었으나 신문에 나온 사진이 최강철이란 걸 단숨에 알아챈 그녀의 손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모습이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클로이와 수잔은 신문만 넘겨준 채 그녀의 반응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 * *
화려한 조명.
그리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
메인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이 다가오자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 링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빈곳이 보이지 않았다.
VIP석에는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고 스포츠 스타는 물론, 가수들과 정치인들, 심지어 아랍의 왕자들까지 자리를 차지한 채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만 6천의 관중. 정말 구름 같은 관중들이었다.
언더 카드 경기까지 끝났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경기는 메인 게임 2경기와 복싱 팬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빅 이벤트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진행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최강철은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꺾고 복도를 따라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나타나서 링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관중들의 입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허리케인을 연호하고 있었는데 최강철의 별명이다.
신기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고 환호성을 보낸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당당하게 걸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오늘 이 경기는 전 세계 복싱 팬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한 서막일 뿐, 링에 마주 선 자를 두려워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가벼운 웃음이 피어났다.
누군가가 그랬지.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강자가 되어달라고.
그래준다. 허리케인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바람이니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