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 *
돈 킹은 커피를 음미하면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복싱 특집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세인트 헬레나였다.
세인트 헬레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 중의 하나였는데 나폴레옹이 유배되었던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소량만이 추출된다.
열대 과일의 상큼한 신맛과 달콤함이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커피를 돈 킹은 무척이나 사랑했다.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헌즈와 헤글러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누가 이길 것인지 예상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입맛이 썼다.
세인트 헬레나의 그 향기로움도 화면을 보는 순간 쓰디쓴 약을 마신 것처럼 쓰게 느껴졌다.
이 빅 게임은 대전료를 포함해서 모든 경비를 제하고도 최소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으나 국세청이 지랄하는 바람에 밥 애런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건 기회와 실패가 교차하면서 찾아오는 모양이다.
“그놈, 잘하고 있나?”
“예, 보스.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끝내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강철은 자기 트레이너진을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들만 가지고 충분하니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더군요.”
“그러다 지면?”
톰슨의 대답에 돈 킹이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백만 달러가 걸린 일이었다.
지금까지 밥 애런과 많은 내기를 했지만 최고 컸던 판돈이 30만 달러였음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만약 최강철이 진다면 자존심과 함께 큰 판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보스, 강철은 야수 같은 놈입니다. 3경기를 치렀을 때부터 케어 시스템을 가동시키려고 했으나 받지 않겠다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놈은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을 언제나 결과로 말해줬습니다. 따라서 케어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때문에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판돈을 걸라고 해도 저는 강철에게 걸 겁니다.”
“속단할 일이 아니야. 라이언 캐슬러, 그놈도 야수다. 전적을 보면 모르겠어?”
“압니다. 그래도 강철은 해낼 겁니다.”
“하아, 미치겠구만. 돈도 돈이지만 난 밥 애런, 그 새끼가 내 돈을 받으면서 비웃는 걸 상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나. 그러니까 반드시 이겨야 돼!”
“분명히 승산은 있습니다. 그리고 강철 그놈도 이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이기면 북미 랭킹에 곧바로 진입한다는 것을 알려줬으니까요.”
“그랬더니 반응이 어때?”
“그놈 반응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강철은 활짝 웃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 봐도 특이한 놈이야. 안 그래?”
“특이하죠. 평상시는 순하게 지내다가도 링에만 올라가면 야수로 돌변합니다. 그래서 복싱 팬들이 그놈의 경기에 환장하는 거죠. 벌써 복싱 매니아들에게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놈이 메인 게임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아마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불안해서 한 말이야. 밥 애런 그 자식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래. 나도 강철 그놈의 팬이다. 그놈은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거든. 이번에 이기면 화끈하게 밀어. 랭킹 전 몇 번 가진 후에 곧바로 북미 타이틀에 도전시키는 시나리오를 짜봐. 그 자식이 타이틀을 획득하면 그때부터 진짜 커다란 돈이 들어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그놈 대전료가 다음 경기에서 리미트에 근접하더구만. 계약은 이제 1년 남았고. 맞나?”
“예, 보스.”
“하아, 기가 막힌 일이야. 그놈 승리 수당이 20%였지, KO로 이기면 50%고?”
‘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리미트를 걸어놨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기둥 뿌리 뽑힐 뻔했다.”
“나중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북미 타이틀전까지 계약을 끝내도록 해. 놈이 이번 고비만 넘기면 우리한테 돈다발을 선물해 줄 거니까 차질 없도록 진행하란 말이야. 타이틀전을 선물로 주면 쉽게 넘어오지 않겠어?”
“그 친구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인들은 정에 약하죠. 미끼를 주는 것보다 정으로 달래는 게 효과적일 겁니다.”
“어쨌든 맡겨놓을 테니까 알아서 해. 괜히 다 키워놓고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란 말이야.”
* * *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은 뒤늦게 최강철의 이름을 확인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헌즈 대 헤글러의 오픈 게임에서 그의 이름을 본 순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각종 타이틀전을 쫓아다니느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기에 한동안 최강철이란 이름을 잊고 살았다.
미국으로 넘어간 후에도 가끔가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안 되는 바람에 2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를 기억 속에서 지워갔다.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처음 발견한 건 그였고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때도 언제나 따라다니며 취재를 했기 때문에 최강철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성공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의 전적을 보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7전 7KO승.
역시 최강철이다.
하지만 그가 이번 빅 이벤트에서 상대하는 선수의 전적을 확인했을 때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상대 역시 막강한 전적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경기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박종팔, 라경민의 라이벌 매치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을 게 분명했다.
헌즈와 헤글러의 경기는 국내에서도 이슈가 될 만큼 빅 이벤트였기 때문에 생방송으로 위성 중계가 될 예정이었다.
김도환이 흥분한 얼굴로 출장 갔다 뒤늦게 출근한 편집부장실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부장님!”
“야, 숨 쉬어, 숨. 그러다가 ,죽어 인마.”
“저, 미국에 보내주십시오.”
“휴가 낸다고? 여행 갈 생각이냐?”
“하이고, 제 팔자에 여행은 무슨 여행을 가요. 출장 간다고요.”
“미친놈. 이 자식아, 미국이 동네 개 이름이냐? 거길 네가 왜 가?”
“이것 보십시오.”
김도환이 들고 있던 팩스 용지를 부장의 눈앞으로 불쑥 내밀며 중간 부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나 그의 용감한 행동은 편집부장 이도형을 놀래게 만들지 못했다.
“이게 뭐, 어쨌다고?”
“최강철이라고 쓰여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보여, 그런데 그거하고 너 미국 가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정말 최강철이 누군지 모르세요?”
“가만… 최강철. 아, 그 최강철!”
“맞습니다. 그 최강철이죠. 마크 브릴랜드를 쓰러뜨려 세계 선수권대회를 말아먹고 아시안게임까지 쓸어버린 놈을 생각한 거라면 맞습니다.“
“햐아, 이놈이 오픈 게임에 나온단 말이지?”
“컸습니다. 그동안 7연속 KO승을 기록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이번 게임은 상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것부터 오늘 저녁에 터뜨리죠. 최강철이 헌즈 대 헤글러의 오픈 게임에 출전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될 겁니다. 다른 놈들은 몰라요. 이건 제가 직접 안면이 있던 토마스에게 받은 거거든요.”
“좋구만.”
“오늘 이거부터 터뜨리고 최대한 빨리 떠나겠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알아보니까 오픈 게임도 중계할 예정이랍니다. 늦으면 다른 놈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 거예요.”
“야, 미국 출장은 사장님한테 결재를 받아야 해. 갔다가 그놈이 깨지기라도 하면 우린 완전히 물 먹는 거야.”
“대신 이기면 끝장나는 거죠. 우리가 단독으로 터뜨려 놓으면 독자들이 다음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릴 텐데 그런 특종을 놓칠 생각입니까?”
“하아, 이거 참…….”
“얼른 사장님한테 보고하고 결정해 주세요. 국장님, 최강철 이 자식은 제가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놈입니다. 이놈은 괴물이에요. 분명 대형 사고를 쳐줄 거란 말입니다.”
똑같은 장소.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 링.
데뷔전을 치렀던 장소로 최강철은 시합 3일전 일행과 함께 날아갔다.
위상이 달라진 건 럼블 측의 행동에서부터 나타났다.
데뷔전 때는 숙소만 예약해 주고 돈 쓰는 건 전혀 모른 체하던 럼블 측은 황인혜를 직접 동반케 해서 모든 편의를 봐줬다.
인생이란 이래서 재밌다.
이번 경기가 돈 킹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이었고, 그가 이겼을 때 들어오는 돈의 크기가 다르다는 게 그들의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인혜 씨, 렌트해야 되나요?”
“아뇨, LA 럼블 쪽에서 차를 보내온다고 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성호가 공항을 나서며 묻자 급하게 고개를 저은 황인혜가 여기서 꼼짝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후 급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검은색 세단.
황인혜가 가지고 온 것은 2대의 검은색 세단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번쩍번쩍 빛나는 게 상당히 비싸 보였다.
“뭐해요. 얼른 타요.”
창문을 열고 황인혜가 소리치자 윤성호가 날름 그녀의 옆자리에 탔고 최강철과 이성일은 뒤차에 올랐다.
“강철아, 이 차 끝내준다.”
이성일이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운전기사 옆으로 보이는 실내 장식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촌놈.
이 자식아,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만 세월이 지나면 이런 고물차보다 무지막지하게 좋은 차들이 거리에 넘쳐날 거야.
속으로 말하며 놀란 눈으로 차 내부를 구경하는 이성일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들의 행선지는 시저스 팰리스호텔이었다.
몸이 달았구나.
지금까지 본체만체하더니 그 비싼 호텔을 예약해서 공짜로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걸 보면 돈 킹이 이번 시합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30분을 달려 시저스 팰리스호텔에 도작하자 벨 보이가 달려 나와 일행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이성일과 윤성호가 황홀한 표정을 마구 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호텔 객실에 올라가는 순간 까무러칠 것처럼 변했다.
호텔의 외관도 궁전을 연상시켰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객실 내부는 황제들이 사는 것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강철아, 이거 진짜 금인가?”
“설마, 금이겠냐. 누가 수도꼭지를 금으로 만들어.”
“여기 엄청나게 비싼 호텔이잖아. 그러니까 금으로 만들어놨을지도 몰라. 깨물어볼까?”
“야, 깨물지 마. 이 나가, 인마.”
최강철이 소리를 빽 질렀으나 벌써 이성일은 욕실 수도꼭지를 향해 이빨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아이고, 저 멍청한 놈.
“잘 모르겠네. 금이면 이빨 자국이 나는 거지?”
“그만해. 야, 자꾸 깨물지 말라니까!”
“흐흐… 궁금하잖아.”
“야, 이 촌놈아. 제발 좀 가만있어라. 내가 창피해서 살 수가 없어. 지금 인혜 누나 비웃는 거 안 보이냐?”
“키킥… 이거 비웃는 거 아냐.”
“그럼 뭐예요. 지금 우리 촌놈들이라고 웃는 거잖아요.”
“오해하지 마. 니들 둘이 하는 짓이 재밌어서 웃은 거니까.”
“에고, 참 재밌기도 하겠네요.”
“짐 풀고 잠시 쉬고 있어. 저녁 식사 알아보고 올 테니까 쉬면서 기다려. 알았지?”
“맛있는 거 준비해 줘요. 파스타나 그런 거 말고 영양 보충 할 수 있는 거로요.”
“알았어. 성호 씨 뭐 해요. 따라 나오지 않고!”
“나도 가요?”
“그럼 심심하게 나 혼자 가란 말이에요?”
“아… 아, 그럴 리가 있나요. 얘들아, 기다리고 있어라. 얼른 갔다 올 테니까 씻은 다음에 조용히 저 침대에서 둘이 손잡고 누워 있어. 우리 갔다 올 동안 빨빨거리고 쏘다니면 안 돼. 여긴 갱들 천지란다.”
“빨리 가기나 하세요. 인혜 누나 도끼눈 하고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저게 도끼눈이냐, 토끼 눈이지. 자식이 꼭 안 좋은 걸로 비교한다니까.”
윤성호가 방문을 나섰다.
그는 줄에 매여 있는 순한 양처럼 황인혜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나갔는데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성일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참 가엽게 사시는구만. 저래서 여자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관장님이 어때서?”
“줏대가 없잖아, 줏대가. 여자는 말이야. 모름지기 남자다움으로 매력을 어필해야 되는데 우리 관장님은 하인처럼 행동하고 있단 말이지. 저래서는 인혜 누나 꼬실 수 없을 거야.”
“이 자식아. 너나 잘해.”
“난 전문가야. 여자 넘기는 데는 내가 관장님보다 백배 낫다.”
“지랄한다.”
“인마, 내가 영어만 유창하게 구사하면 여기 여자들은 전부 껌뻑 죽어. 어라, 웃어? 이놈이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네.”
“씻기나 해. 냄새 나.”
“크크크… 사나이의 몸에서 나오는 향기는 뇌쇄적이지. 어때 본격적으로 맡아볼래?”
“저리 안 비켜!”
이성일이 끌어안으려고 덤비자 최강철이 질색을 하며 도망갔다.
띵동, 띵동!
벨이 울린 것은 이성일이 낄낄 웃으며 씻기 위해 옷을 벗기 시작할 때였다.
옷을 벗던 이성일이 다시 옷을 껴입으며 최강철을 향해 눈짓을 마구 던졌다. 난 못 나가니까 대신 나가보라는 신호였다.
하긴 빤스만 남기고 전부 옷을 벗어버린 이성일이 나가기엔 놈의 몰골이 너무 볼썽사나웠다.
“누구십니까?”
“강철아, 나다.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이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최강철의 눈이 번뜩 치켜 떠졌다.
김도환, 보고 싶던 얼굴이었고 너무나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김 기자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너 응원하러 왔지. 반갑다, 강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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