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67화 (67/308)

[67]

토마스 헌즈와 헤글러의 대결은 전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그들의 대결이 결정되었을 때 복싱 팬들은 환희에 젖어 전부 만세를 불렀다. 그만큼 엄청난 빅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꿈의 대결.

사람들은 두 사람의 시합을 그렇게 불렀다.

링의 코브라 토머스 헌즈.

그는 비록 과거 레너드에게 패했지만 최근 들어 듀란과 강자들을 연속으로 꺾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중이었는데 공포의 스트레이트가 더욱 무서워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도살자 마빈 헤글러가 그의 상대다.

마빈 헤글러는 미들급을 완전히 석권하며 도전자들을 압살시켜 온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의 인파이팅을 견뎌낸 선수는 전무했다.

끊임없이 전진해서 상대의 발을 묶어놓고 야금야금 박살 내는 그의 복싱은 인파이팅의 정수로까지 불린다.

팽팽한 긴장감.

도박사들은 6 대 4로 헤글러의 우세를 점쳤지만 전문가들은 쉽게 누구의 우위를 점치지 못했다.

그만큼 강한 펀치력을 가진 선수들이었고 테크닉 면에서도 정점을 찍은 강자들이라 어느 순간 누가 쓰러질지 알 수 없는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영상 분석실에 일행에 모여 앉은 건 톰슨이 다녀간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최강철은 시합이 결정된 후 다시 피지컬을 끌어 올리며 자신의 주 무기를 차근차근 점검해 나갔는데, 그동안 이성일은 영상 분석실에 틀어박혀 라이언 캐슬러의 경기 장면을 분석하고 있었다.

“잘 봐. 이놈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어떻게 나오는지.”

“스트레이트가 왜?”

“상대가 스텝을 멈추는 순간 귀신같이 포착해서 폭탄처럼 터지잖아. 이게 놈의 주 무기야.”

이성일이 돌아갔던 화면을 되돌려서 스톱시키자 최강철과 윤성호의 눈이 집중되었다.

특이한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잽을 생략하고 곧바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던지는군.”

“맞아. 스트레이트를 잽처럼 활용하는 거지. 오른손잡이들은 레프트 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사우스포의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잽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당하는 순간 치명상을 입게 돼.”

“진짜 공격은 그다음부터구만. 스트레이트를 맞히고 난 후 그때부터 공격을 시작하는 거야.”

“저놈의 펀치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레프트 한 방에 상대가 충격을 먹지 않는다면 저런 공격은 쉽지가 않죠.”

“강철이 말 대로예요. 봐서 알겠지만 레프트에 제대로 걸린 상대는 급격히 방어막이 풀렸어요. 이놈을 잡으려면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돼요.”

“알았다. 그건 깰 수 있을 것 같아. 또 다른 건?”

“이겁니다.”

이성일이 화면을 돌리다가 금방 다시 멈췄다.

라이언 캐슬러가 상대를 압박하며 전진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성일이 멈춘 화면에서 또 다시 특이점을 발견한 윤성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하아, 이 새끼 봐라. 페이크를 제대로 거는구만.”

“잘 보셨습니다. 이놈, 자신의 주 무기인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페이크를 걸고 라이트 공격을 많이 하네요. 상당수의 클린 히트가 거기서 나옵니다. 문제는 라이트가 상당히 좋다는 거예요. 사우스포면서 오른쪽 훅과 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에요. 특히 바디 공격이 꽤나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끝을 내는 건 레프트겠지?”

“빙고. 라이트로 충격을 주고 레프트로 전부 쓰러뜨렸어요. 아마 상대한 놈들은 시합을 하는 동안 계속 라이트에 당하다 보니까 이놈의 주 무기가 레프트라는 걸 잊게 된 거 같아요.”

“이 두 가지뿐이야?”

“그럴 리가요. 다음은 이놈의 패턴 공격입니다. 이놈은 크게 네 가지의 패턴 공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성일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 일주일 동안 라이언 캐슬러의 장단점이 이성일의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인간 승리다.

미국으로 와서 경기를 할 때마다 미친놈처럼 처박혀 연구하고 공부하더니 이제 전문가가 다 되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시 훈련에 매진하면서 이성일이 분석한 내용들을 토대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상대가 강자라는 사실이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동안 상대해 온 자들이 만만한 건 아니었지만 무패 가도를 달리며 KO 행진을 벌이는 놈과의 일전은 온몸을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시합이 잡히자 공기가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레드불스에 가득 찼다.

이제 레드불스의 선수들은 최강철이 시합한다는 소리만 들어도 소란이 일어났는데 그의 KO 연승 행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내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다.

특히 이번 시합에 대한 관심이 컸다.

최강철의 상대가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라이언 캐슬러란 사실이 알려지자 레드불스 소속 선수들은 뜨거운 관심을 가진 채 그의 훈련을 지켜봤다.

특히 스파링 파트너로서 그를 도와주고 있는 마크와 제임스는 계속 응원을 보냈지만 최강철이 옆에 없을 때는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강철이 잘해낼까?”

“그놈도 강하지만 강철도 만만치 않아. 너도 스파링하면서 겪어봤잖아.”

“하긴 그렇지. 강철이 처음 왔을 때 스파링하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넘볼 수조차 없어. 저런 놈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웃긴 일이야.”

“그때는 실력을 숨겼던 거야. 잘난 체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강철 성격상 충분히 그랬을 거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놈이니까.”

“이번에는 독하게 마음먹은 거 같아. 저것 봐, 저러다가 펀치 볼 날아가겠다.”

마크가 최강철이 훈련하는 장면을 보면서 입맛을 쩍쩍 다셨다.

최강철은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개의 펀치 볼을 동시에 가격하고 있었는데, 펀치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빠르다. 정말 빠르다.

텔레비전에서 중계된 적이 없었기에 직접 시합 장면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으나 훈련 장면만 봐도 상대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짐작이 될 만큼 대단한 콤비네이션과 펀치력을 지녔다.

“죽여주는구만.”

“저런 펀치에 엄청난 스피드까지 가졌으니 강철은 복싱을 위해 타고난 놈 같아.”

“이번에는 볼 수 있겠지?”

“메인 게임으로 출전한다잖아. 시합 날 맥주 들고 오는 거 잊지 마. 여기서 같이 보자고.”

“당연히 와야지. 시합은 같이 보는 게 재밌어. 걱정하지 말라고.”

“강철이 이겼으면 좋겠다. 라이언 캐슬러를 꺾으면 강철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서 살게 될 거야. 나는 저놈이 성공해서 감옥 같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를 바라.”

“너도 그래야지.”

“난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저런 놈들이 판치는 곳에서 내가 견뎌낼 수 있겠어. 그래서 몇 번 더 싸워보고 그만둘 생각이야. 아버지가 농장 일이 힘들다고 돌아오래.”

“후회되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꿈을 위해 원 없이 도전해 봤는데 왜 후회가 남겠냐. 8번을 싸워서 4번이나 졌으나 한 번도 대충 싸운 적이 없어. 앞으로 몇 번을 더 싸울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도 최선을 다해서 싸울 거야. 권투를 그만둬도 내 남은 인생에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 * *

서지영은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바늘로 찌르면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처럼 아름답고 파란 하늘이었다.

캠퍼스는 이제 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무들은 푸른 잎으로 물들었고 꽃들은 활짝 피어 보는 순간마다 탄성이 나오게 만들었다.

이런 순간들이 좋다.

공부에 지친 몸을 이완시켜 주는 화창한 오후의 햇살.

길게 기지개를 켜고 주변을 둘러보자 멀지 않은 곳에서 남학생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게 들려왔다.

또 복싱 얘기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일주일 후에 벌어지는 복싱 이야기가 화제를 이루는 중이었다.

헌즈와 헤글러의 시합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최고의 명문대생들이 남녀 구별하지 않고 열광하는 걸 보면 복싱이 인기 절정이란 게 실감 난다.

하지만 그녀에게 복싱은 먼 달나라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폭력을 싫어했고 남과 싸울 일을 만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복싱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복싱에 열광하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잔인성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복싱 이야기를 할 때마다 최강철이 떠올랐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던 시간들의 즐거움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사랑이란 감정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설렘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자꾸 시선이 갔던 건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순수함과 따뜻한 미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한 일들 천지였다.

학생이 아닌 그가 먼 곳까지 와서 강의실에 들어온 것도,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을 붙인 것도 상식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의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자신은 이곳에 오기 위해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많은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인간은 집중 속에서 고난과 고통을 참아내며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좋아하던 피아노도 접었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즐기는 파티에 갈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다. 여행은 물론이고 심지어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갖지도 못했다.

그런 희생을 통해 얻어낸 것이 바로 펜실베이니아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서울대에 관한 정보를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중학교까지 서울에서 자랐고 심지어 서울대로 진학하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가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서울대는 꿈의 대학교였다.

그 말은 자신이 한 것처럼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 수많은 학생이 밤을 새워 공부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최강철이 복싱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서울대 학생이란 것만 이야기했다면 믿어줬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공부와 복싱을 병행한다는 건 그녀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의 입에서 유명한 복싱 선수란 말이 나왔을 때 실망감이 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은 목적이 있을 때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거짓말이 호감을 얻어내기 위한 수작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인 것 같았다.

말로 하지 않았던 그녀의 실망감을 금방 눈치채고 떠나면서 그는 티끌만큼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것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적극적인 변명이 뒤따라야 했을 텐데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보고 싶다기보다 궁금하다.

이렇게 앉아 있을 때마다 자꾸 그가 생각나는 건 그녀의 마음속에 남겨놓고 떠난 궁금증 때문임이 분명했다.

스포츠라인의 토머스가 레드불스로 찾아온 것은 최강철이 막바지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강철 잘 있었나?”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당연히 자네를 보러 온 거 아니겠나. 그래, 훈련은 잘돼가?”

“보다시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최강철이 수건으로 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싱긋 웃자 토머스가 마주 웃었다.

그는 열성적인 최강철의 팬이다.

시합 때마다 워낙 강렬한 인파이팅을 펼치기 때문에 토머스는 그가 경기하는 곳에 벌써 3번이나 다녀갔다.

복싱 기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강철은 아직 메인 게임으로 뛰는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경기가 KO로 끝나면 반드시 그에 관한 기사를 올렸다.

물론 단신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자네 상태를 체크하기 위함이야. 알지?”

“저 같은 사람을 뭐 하러 체크해요. 헌즈나 헤글러를 취재하기도 정신없이 바쁘지 않아요?”

“난 걔들보다 자네가 더 중요해.”

“하하… 하여간 기자님도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제 겨우 7번 싸운 사람한테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거 아닙니까?”

“걔들은 지는 별이야. 강철, 자네는 떠오르는 신성이고.”

“고마운 말이네요.”

“인터뷰 가능하지?”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해야죠.”

“땡큐, 그럼 인터뷰 전에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줄게. 난 자네의 왕 팬이니까 꼭 자네가 이기기를 바라거든.”

“좋은 정보입니까?”

“아니, 나쁜 정보야.”

“나쁜 정보라니까 슬쩍 긴장되네요. 그래, 그 나쁜 정보라는 게 뭐죠?”

“이번 시합은 조심해야 될 것 같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라이언 캐슬러는 거의 4달이나 훈련을 해왔어. 걔는 다른 시합이 잡혀 있었는데 뒤늦게 자네와의 시합으로 바뀐 거라더구만.”

“그 자식, 운이 좋군요.”

“더군다나 밥 애런이 최고의 전문가들을 투입해서 자네에 대한 장단점을 분석했단 말일세. 아마 철저히 파헤쳐졌을 거야. 밥 애런이 보유한 전문가들은 승리 청부업자라고 불리거든.”

“그렇게 정성을 쏟는 걸 보니까 밥 애런이 꼭 이기고 싶은 모양이군요. 기자님, 한 가지 물어도 됩니까?”

“뭔가?”

“이 시합, 돈 킹과 밥 애런이 단순하게 경쟁심 때문에 벌인 일 같지 않은데 혹시 진짜 이유를 아나요?”

“푸하하… 경쟁심은 무슨. 그자들은 돈이 따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무슨 소리죠?”

“지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야. 그자들은 가끔가다 내기를 한다네. 커다란 판돈을 걸어놓고 소속 프로모션 선수들을 시합 붙이는 거지. 내가 알기로 이 시합 판돈이 무려 백만 달러라고 하더구만.”

“겨우… 그런 거였습니까…….”

크크크……. 이 새끼들이 아주 웃기는구만.

‘나를 장난감 병정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았단 말이지. 지들 재미를 위해서…….’

어쩐지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했다.

밥 애런에게도 전문가들이 있지만 돈 킹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자들이 있는데 톰슨은 그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여러 번 해왔다가 거절당했다.

최강철은 토머스의 말을 듣고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놀아달라면 예쁘게 놀아준다.

어차피 나도 원했던 일이니까 판을 키워줄게.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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