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66화 (66/308)

[66]

* * *

서지영은 클로이, 수잔과 함께 언제나 붙어 다닌다.

그녀들의 1, 2학년 성적이 최상위권을 형성한 것은 천재로까지 불렸던 삼총사가 스터디 그룹을 같이하며 언제나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미국 최고의 명문대생이며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다고 해서 매일같이 공부에 빠져 사는 건 아니었다.

클로이와 수잔은 벌써 남자 친구들 2, 3명씩 갈아 치웠는데 지금도 연애를 하는 중이다.

모르는 것이 없다.

워낙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내다 보니 집안 사정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이상형까지 빠삭하게 알 정도라 최근 관심사가 생길 때마다 그녀들은 수다를 아끼지 않았다.

“지영, 그 남자 오늘도 안 왔더라?”

“응.”

“왜 안 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바쁘니까 안 왔겠지.”

“혹시, 서울대생이라고 거짓말한 게 들통 날까 봐 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왜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 본의 아니게 거짓말해 놓고 미안하니까 나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서울대생에 유명한 복싱 선수라고까지 거짓말을 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과는 다시 만난다 해도 알은척할 이유가 없어.”

“아휴, 아쉽다. 지영이가 관심 가진 남자는 처음이었는데 왜 하필 그런 남자였을까.”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지 마. 내가 그 사람과 대화한 것은 한국 사람이라서 반가웠기 때문이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잘생겼던데… 몸매도 훌륭하고. 우린 네가 그 사람과 잘되기를 바랐어. 너도 처녀 딱지는 떼야 되잖아.”

“한국 여자는 정조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난 그 정도는 아니지만 꼭 해야 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할 생각이야.”

“으응… 참 걱정이다. 여긴 한국 남자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니까 문제지. 그러다가 처녀 귀신 될지도 몰라.”

“그게 내 팔자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니.”

“넌 참 고지식해. 미국에 살면서 꼭 한국 남자를 고집하는 이유를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난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기다리는 거야. 언젠가 백마 탄 멋진 왕자가 나타나기를 말이야.”

“늙어 죽으면 어쩌려고!”

“사람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기다리면 꼭 나타날 거야.“

서지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리 쉬자 클로이와 수잔이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온 후 친하게 지내는 동안 서지영은 언제나 한국의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눈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남자를 따라가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남자를 사귀지 않았고 고고한 백합처럼 접근해 온 남자들을 거부해 왔던 그녀가 남자를 따라가 말을 붙이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뒤늦게 그 남자가 한국 사람이란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으니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클로이와 수잔이 아쉬워했던 건 오랜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거짓말쟁이란 사실 때문에 서지영이 힘들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잔이 슬그머니 입을 연 것은 서지영의 공부를 시작하려고 책을 열 때였다.

“지영,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에 그 사람 말이 사실이라면 어쩔래. 그래도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면 모른 척할 거니?”

* * *

최강철 일행은 거의 두 달 가까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의 평화로움.

윤성호는 럼블 측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이성일과 함께 낚싯대를 메고 근처의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죽였다.

1년 반 동안 7게임을 했으니 두 달 반마다 한 번씩 시합을 한 강행군이었다.

두 사람은 신났다.

윤성호야 원래부터 낚시광이라 이해하겠지만 뒤늦게 낚시를 배운 이성일이 더 빠져들어 아침마다 낚싯대부터 찾는 걸 보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는 게 이해가 갔다.

최강철은 서지영과 만난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 대신 가끔가다 뉴욕대를 찾았다.

거리상으로는 오히려 뉴욕대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했는데 양쪽 대학의 학풍을 전부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뉴욕대를 들를 때마다 금융의 중심지인 맨해튼으로 갔다.

15만 달러를 투자한 주식의 상황도 궁금했지만 그가 요새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투자 전문 회사의 허가 절차와 투자 방식, 세금에 대한 공부였다.

한국의 군사정권과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고리타분하고 무식한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제3국에 적을 둔 투자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톰슨이 황인혜와 함께 집으로 찾아온 것은 윤성호와 이성일이 낚시를 끝내고 돌아와 수선을 피울 때였다.

그들은 오늘따라 30㎝에 가까운 월척을 잡았는데 방방 뜨면서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떠들썩했던 집안이 톰슨의 등장으로 금방 조용해졌다.

시합이 있을 때마다 소식을 전해주고 필요한 것을 챙겨준 건 황인혜였지 톰슨이 아니었다.

럼블의 부사장답게 그는 늘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어떨 때는 시합이 벌어지는 기간에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강철, 잘 있었나?”

“오랜만입니다. 얼굴 보기 힘든 양반이 어쩐 일이십니까?”

“이 사람 말에 가시가 달렸군그래.”

“오랫동안 시합이 잡히지 않아서 그런가 입이 까칠해졌어요. 직접 온 걸 보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나 보죠?”

“눈치가 빠르구만.”

“눈치가 빠른 게 아닙니다. 당신의 얼굴에 들어 있는 초조함이 여기에 그냥 놀러온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으니까요.”

“푸하하하……!”

최강철의 말을 들은 톰슨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 있는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꽤나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눈을 오므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톰슨 씨가 긴장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요. 나와 계약했을 때 보고 지금이 처음이니까 2년이 훌쩍 넘었네요. 자, 뜸 그만 들이고 말해보시죠. 뭡니까?”

“자네 말대로 시합이 잡혔다. 그런데 그게 조금 급해.”

“급하다니요?”

“다음 달에 치러지는 헌즈와 헤글러의 오픈 게임으로 시합이 잡혔거든.”

톰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자신도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게 매우 유감이라는 시늉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성호는 톰슨에 액션에 대해서 전혀 동조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윤성호도 이제 대충 영어를 할 줄 안다.

“뭐라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걔네 시합은 다음 달이잖아!”

“그렇지.”

“이제 한 달 조금 남게 남았는데 어떻게 시합을 합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미스터 윤, 상황이 그렇게 됐어. 나도 상당히 당황스러운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이해해 줘.”

윤성호의 어필에 조금 장난스럽게 접근했던 톰슨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최강철의 코치를 맡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어필은 당연한 것이었고 상황에 따라 시합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속 내용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시합을 뛰게 된 선수에게 돈 킹이 내기를 걸었다는 걸 알려준다면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다.

설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직접 왔고 이제부터 천천히 최강철과 코치진을 회유할 생각이었다.

“하아,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이해는 무슨 이해. 지랄 염병하고 있구만.”

“완전히 엿 먹이겠다는 거죠. 이놈들 미친 거 아닙니까?”

톰슨의 변명을 들으며 윤성호가 한국말로 신경질을 내자 이성일이 뒤를 받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생각이 똑같다.

어떤 미친 프로모션이 소속 선수에게 한 달 만에 준비를 끝내고 링에 오르라는 제안을 한단 말인가.

최강철이 입을 연 것은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냈기 때문에 톰슨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톰슨 씨,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당신은 핵심에서 벗어나 말을 빙빙 돌리고 있군요. 말해보세요. 핵심을 알아야 응하든가 말든가 할 거 아닙니까?”

“밥 애런이라고 아나?”

“프로모터 밥 애런을 말하는 거라면 알죠. 돈 킹 씨와 라이벌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돈 킹 씨는 탈세 문제 때문에 최근까지 상당한 곤욕을 치렀네. 그런데 밥 애런이 WBA 총회가 끝나고 만찬 장소에서 돈 킹 씨에게 제안을 했다는군. 자네와 라이언 캐슬러를 시합 붙이자고 말이야.”

“왜죠?”

“경쟁심 때문이지. 자네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뜨거울 정도로 싸워온 사람들이네. 내가 알기로 돈 킹 씨가 자네를 자랑했는데 밥 애런이 비웃었던 모양이야. 그쪽 소속인 라이언 캐슬러가 요즘 무섭게 치고 올라가는 중이거든. 그래서 돈 킹 씨가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한 거지. 그 양반,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 특히 밥 애런에게 만큼은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한다네.”

사실을 각색해서 말했다.

돈 킹과 밥 애런의 대화를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최강철을 설득시키는 게 어려웠고 외부로 도박 사실이 흘러나갔을 때 돈 킹과 럼블은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교묘한 말솜씨로 최강철을 자극하는 걸 잊지 않았다.

투지의 화신인 최강철에게 경쟁심이란 무기로 접근한다면 쉽게 일이 풀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최강철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고 침착했다.

“재밌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해서 시합이 그리 쉽게 결정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또 다른 이유가 있지. 헌즈와 헤글러의 대결은 세계인의 관심이 한꺼번에 쏠려 있는 시합일세. 돈 킹 씨와 애런은 각 프로모션에 소속된 최고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복안도 있었어. 비록 둘 중 하나는 치명타를 입게 되겠지만 이기기만 한다면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단 말이지. 어떤가, 이만하면 모험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구미가 당기는 말이군요.”

“그 정도가 아니야. 자네도 이제 메인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걸세!”

“라이언 캐슬러는 어떤 선숩니까?”

“밥 애런이 자랑하는 놈이지. 9전 9KO승. 테크닉과 펀치력을 동시에 가진 하드 펀처야. 여기 그놈에 대한 정보와 비디오테이프가 있네.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음…….”

“어떤가, 할 거야?”

“좋습니다. 하죠.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그 정도의 모험을 하는데 맨입으로 할 수는 없죠. 보너스로 10만 달러를 주세요. 그러면 화끈하게 한판 붙겠습니다.”

“돈 킹 씨에게 전하겠네. 하지만 그건 이겼을 때의 얘기야. 경기에서 진 선수에게 보너스를 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톰슨과 황인혜가 돌아갔을 때 윤성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모험이 아니라 미친 짓이다.

상대도 상대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시간 만에 링에 올라가는 건 물속에 빠져 죽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라이언 캐슬러의 전적이 너무 화려했다.

9전 9K0 승.

본격적으로 상대에 대한 분석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전적만 가지고도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돈에 환장했냐?”

“돈 때문이 아닙니다. 보너스를 요구한 건 이상한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먹힌다면 뭔가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왜 네가 뭐가 아쉽다고 그런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모험을 해. 그 새끼가 어떤 놈인지 알고 그런 결정을 하냔 말이야. 만약 그놈이 줄곧 훈련하고 있었다면 어쩔래?”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어요. 40일이면 충분합니다.”

“아이고, 미치겠네.”

윤성호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좋아하는 황인혜가 왔음에도 그녀를 본체만체하며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톰슨이 문을 나서는 순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침착한 건 이성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강하게 시합을 거부했으나 최강철이 끝내 시합을 강행하자 라이언 캐슬러에 관한 자료를 꺼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관장님, 이놈 왼손잡입니다.”

“왼손잡이?”

“큰일인데요. 강철이는 지금까지 왼손잡이하고는 싸운 적이 없어요.”

“이거 갈수록 태산이구만. 그럼 반대로 돌아야 된다는 거잖아.”

“단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놈 9연속 KO승을 거뒀어요. 전적을 보니까 전부 오른손잡이들과 싸웠단 말입니다. 비디오테이프를 분석해 봐야겠지만 뭔가 있어요. 단순하게 방어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겠는데요.”

“아우, 이 웬수 놈아. 사우스포란다, 사우스포!”

이성일의 말을 들은 윤성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과거 선수 생활을 할 때 31번을 싸운 적이 있었기에 사우스포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우스포의 가장 큰 특징은 앞으로 내민 왼쪽 손이 상대의 오른손과 근접되어 레프트 잽의 활용도가 극히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최강철의 주무기 중 하나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최강철은 윤성호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럴 때마다 윤성호가 사랑스럽다.

그가 화내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최강철의 소망이자 그의 소망인 챔피언 꿈이 무산되는 것뿐이다.

“관장님, 사우스포도 맞으면 쓰러집니다. 그러니 어떤 괴물이 와도 상관없어요. 관장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보다 더 미친 괴물을 본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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