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 * *
서지영은 친한 친구 클로이, 수잔과 함께 수다를 떨다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친구들은 뉴욕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세인트 안토니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였는데 똑같이 펜실베이니아 대학, 그것도 경영학과에 입학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행운으로 불리기에는 그녀들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천재 삼총사. 세인트 안토니의 선생님들이 그녀들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봄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캠퍼스는 수업을 듣기 싫은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의실로 향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었다.
신입생으로 들어온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3학년이 되었으니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라면 죽을힘을 다해 공부할 시기였다.
그럼에도 서지영의 눈은 그 남자를 확인한 순간 자꾸 시선이 갔다.
벌써 그 남자를 본 것이 오늘까지 5번째다. 같이 수업을 듣는 남학생들은 거의 다 알기 때문에 남자가 여기 학생이 아니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그가 한국인이란 것을.
이 먼 이국땅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다는 것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고 꽤 준수한 외모를 지녔기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그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은 결국 외로움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기 때문에 클로이는 오죽하면 자신에게 불감증이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녀가 백인 남자 친구를 사귀지 않은 이유는 한국 남자와 사귀어야 된다는 고지식함 때문이지 결코 불감증 때문이 아니었다.
시선이 자꾸 갔다.
분명히 몰래 수업을 듣는 게 분명한데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강의를 들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영화배우를 해도 되겠다. 거기에 스파이 영화라면 주연을 맡아도 될 만큼 아주 능숙하고 태연해서 제 격일 것 같았다.
“저기요…….”
수업이 끝나자 강의실에서 벗어나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갈 때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이었으니 평소 같으면 그냥 앞만 보고 걸었을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닌데 되돌아보면 부른 사람이 무안해진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안다.
하지만 오늘은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되돌아서자 창가에 앉아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아름다움이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다.
“저 말인가요?”
“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래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햇살을 닮은 웃음이다. 그것도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답다는 3월의 봄 햇살을 닮았다.
“무슨 일이시죠?”
“한국분 아니세요?”
“맞습니다.”
“아, 제 생각이 맞았네요. 저도 한국 사람이에요. 반가워요.”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다른 동양인들하고 분위기가 다르거든요.”
최강철의 대답에 서지영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렇구나. 이 사람은 이미 자신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저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쪽도 저를 봤나 보네요?”
“당연하죠. 그쪽처럼 예쁜 사람은 강의실에 없었으니까요. 비록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거 칭찬이죠?”
“네, 맞습니다.”
“우리 커피 한잔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남자가 사잖아요.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고 그쪽에서 먼저 마시자고 했으니까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 말을 걸어온 게 아니라 단지 같은 동포를 만났다는 반가움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즐겁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와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마신다는 건 청춘으로서 너무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강철 씨는 여기 학생 아니시죠?”
“네.”
“난 벌써 강철 씨를 다섯 번이나 봤어요. 처음에는 복학한 학생인 줄 알았는데 아주 가끔 강의실에 나타나는 걸 보면서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닐 거란 생각을 했어요. 공부하는 학생이 두세 달에 한 번씩 나타날 리가 없으니까요.”
“유심히 관찰하셨군요. 제가 그렇게 잘생겼습니까?”
“호호… 잘생기셨어요?”
그녀의 반문에 입맛을 다셨다.
하긴, 아름다운 그녀의 눈에 자신이 잘생겨 보일리가 만무했다.
“그럼 매력 있는 걸로 해두죠.”
“몇 살이에요?”
“22살입니다.”
“정말요. 나도 22살인데. 우린 동갑이네요.”
“지영 씨는 여기 학생 맞나요? 내가 여러 번 강의에 들어왔지만 지영 씨는 처음 보거든요.”
“반격인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여기 학생 맞아요.”
서지영이 눈을 살짝 흘겼다.
참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다. 눈을 흘겼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또 다른 매력이 풀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인을 오늘에서야 봤기 때문에 한 말이었어요. 지영 씨는 경영학 쪽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에 들어온 걸 보니까 공부 잘했나 봐요?”
“조금, 취미가 공부였거든요.”
“취미가 공부인 사람도 있군요. 그 취미 재밌나요?”
“재밌어요. 모르는 걸 배우는 것처럼 재밌는 건 없잖아요.”
“하아, 답답한 말이네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지영 씨가 아무리 예뻐도 곁에 가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강철 씨는 왜 강의를 들어요? 여기 학생도 아니면서?”
“여기 학생은 아니지만 저도 한국에서 경영학과에 적을 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세계 최고라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강의는 어떤가 궁금해서 온 겁니다.”
“아… 그랬군요. 혹시 어느 학교 다니세요?”
“서울대 경영학과 83학번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어요. 입학하자마자 휴학했거든요.”
서지영의 눈이 반짝였다.
서울대는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이었고 세계적으로도 꽤나 이름난 학교였다.
사실일까?
처음 본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지만 이 남자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니 구태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일부러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머, 왜요?”
“미국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말하지 못할 비밀인가요?”
“궁금해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우린 처음 본 사이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말하니까 더 무섭군요. 난 권투를 하러 미국에 왔습니다. 아시죠, 복싱?”
“하아, 그게 무슨… 서울대생이 무슨 복싱을 해요. 농담이죠?”
“농담 아닙니다. 벌써 7번이나 싸웠는걸요. 저 인기 있는 권투 선수예요.”
최강철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권투 선수라고? 이 곱상한 남자가?
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서울대에 다닌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는데 복싱을 한다는 말을 듣자 점점 최강철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지금 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복싱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복싱 선수라면 여자들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사내다움과 경제적인 수입이 다른 종목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웬만한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접근할 때 자신이 복싱을 배우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한국 남자를 만났다는 설렘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가운 이성이 고개를 들고 반가움을 뒤로 밀어낸 채 최강철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 남자, 이상하다.
처음 본 사이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계속 늘어놓는 걸 보자 자신의 호의가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강철은 창문을 열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숙소까지는 1시간이 걸렸으나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릴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자유를 만끽했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다.
자신이 서울대생이라고 말할 때부터 이상해졌던 서지영의 얼굴은 복싱을 위해 미국으로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 나자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애써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안다. 자신의 상황은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으니 다른 사람은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죽하면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황인혜마저 그가 서울대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까무러치는 것처럼 놀랬을까.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은 바람처럼 찾아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다.
호기심과 반가움.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은 그 두 가지 때문이지 자신에 대한 관심과 호감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 그것도 여자를 만났다는 것으로 인해 즐거움을 느꼈을 뿐 서지영의 미모에 빠져 이성을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 * *
돈 킹은 WBA(세계 권투 협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텍사스로 날아왔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국세청의 추적으로 인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는데 2주 전에야 백만 달러의 추징금을 내고 철창 신세를 겨우 면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나날들이었다.
국세청의 추적은 악랄한 정도로 지독해서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백만 달러란 푼돈을 쥐어주고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
가소로운 놈들이다.
고의적으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발광을 했으나 그가 지닌 인맥과 힘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기에 놈들을 엿 먹일 수 있었다.
복싱 관계자 놈들은 국세청이 추적을 시작하자 자신의 시대가 갔다면서 웃었으나 그가 당당하게 올가미에서 벗어나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기어 다녔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힘없는 자들이 고개를 숙이는 건 오랜 역사가 증명한 세상의 이치다.
그가 필생의 적수인 밥 애런과 자리를 함께한 것은 총회가 끝나고 연회가 벌어질 때였다.
그와 함께 세계 복싱계를 양분하고 있는 밥 애런은 그와 달리 인텔리 출신으로 언제나 만날 때마다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놈이었다.
“와인 마실 텐가?”
“됐어.”
“왜 마시지 않고. 그동안 속 많이 상했을 텐데 한잔해. 백만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잖아.”
또 긁는다.
다른 놈들은 백만 달러란 푼돈을 쥐어주고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밥 앨런은 교묘한 말투로 성질을 긁어 왔다.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탈세하고 횡령했는지 밥 앨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국세청의 배후에 그가 있었을 거란 추측을 하고 있었다.
내민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마신 후 밥 앨런을 향해 돈 킹이 비릿한 웃음을 흘려냈다.
“향기가 좋군. 고마워, 앨런. 내가 이 신세는 꼭 갚지.”
“갚지 않아도 돼. 그까짓 와인 한 잔은 백만 달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뭐.”
“크큭… 맞는 말이야.”
“자네가 자리를 비웠던 덕분에 내가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어.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네.”
이 새끼가, 아주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이탈리아 마피아를 동원해서 쏴 죽이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번에 헌즈와 헤글러가 붙으면서 최소 천오백만 달러는 벌어들일 것 같아. 말만 하라고. 그동안 돈을 벌지 못해서 추징금을 내려면 힘들 텐데 필요하면 얘기해. 빌려줄 테니까.”
“이 자식아, 말조심해. 주인 없는 틈을 타서 경기를 가로챈 놈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허어, 흥분하지 마. 자네 고혈압 있잖아. 그거 흥분하면 위험하다고 들었어.”
돈 킹이 소리를 지르자 밥 애런이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비틀었다.
그 역시 돈 킹 못지않게 맺힌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고 겨우 이 자리에 온 돈 킹의 분노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한판 붙자.”
“좋지. 내가 언제 자네 제안을 거부하는 것 봤어.”
“이번에는 판돈을 조금 올리자. 네가 큰돈이라고 떠드는 백만 달러. 너한테 돈 따서 추징금을 내야겠다.”
“푸하하, 나야 언제나 환영이지. 그래 무슨 체급으로 할 텐가?”
“웰터급. 단, 전적이 10전 이내인 놈으로 하지. 유명한 놈들은 재미가 없으니까.”
“그거 괜찮은 제안이군.”
밥 앨런이 흔쾌히 대답하자 돈 킹의 안면에서 득의의 웃음이 흘렀다.
“조건은 똑같으니까 헌즈와 헤글러가 싸울 때 메인 게임으로 붙이는 건 어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시합은 이제 한 달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겁나면 죽어. 헛소리 찍찍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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