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64화 (64/308)

[64] 제10장 예쁜 향기

그때는 몰랐다.

1985년, 22살의 그는 철없이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인생을 허비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할 수 있었던 것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왔던 삶. 미팅할 돈조차 없어 겨우겨우 친구들에게 빌붙어 지낼 만큼 가난했고 미래에 대한 도전 의식은 아예 가져보지 않았으니 그저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다.

더군다나 어울리지 않게 정치 외교를 전공하면서 데모에 매진했으니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진 채 돌아왔으나 천재적으로 변한 두뇌도 1985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미국이란 특수성은 더욱 그를 난감하게 빠뜨렸다.

지금 현재, 그의 과거 기억을 되돌아 봤을 때 나오는 정보는 1987년 미국 주식 시장을 공포로 젖게 만드는 블랙 먼데이가 터진다는 것뿐이었다.

근 미래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1990년도에 들어서면 컴퓨터와 휴대폰 시대가 열리고 2000년대는 본격적으로 IT의 시대가 열린다.

일본은 1990년 초기부터 부동산 버블이 일어나면서 쑥대밭으로 변했고 우리나라는 IMF를 겪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반병신 국가가 되었다.

2002년부터 시작된 닷컴 버블 사태와 카드 대란으로 인해 다시 한번 고꾸라진 후 미국으로부터 촉발된 2008년 금융 위기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가 기회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아직 위기가 닥치지 않았고 주식과 부동산은 지지부진하게 횡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최강철이 맨해튼에 있는 럼블의 사무실로 황인혜를 찾아간 것은 따뜻한 봄기운이 아른거리는 2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이었다.

그동안 시합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그녀가 그들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던 것은 최강철 일행이 한국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톰슨은 최강철이 연승 행진을 거듭하자 그녀를 아예 전담 매니저로 지정해서 관리토록 지시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레드불스를 찾아왔다.

1년 반 넘게 시간을 함께하자 그녀는 이제 식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럼블의 사무실은 화려했다.

맨손으로 황금 알을 낳는 시합을 개최하면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인지 럼블은 맨해튼에서도 가장 핵심 지역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슬쩍 봐도 500평이 넘게 보였다.

그 속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장 차림의 황인혜는 고고하게 빛나는 한 떨기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강철아, 네가 어쩐 일이야?”

“아직 시합 잡혔다는 연락 없나요?”

“시합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그러다가 병 나. 네가 기계니!”

황인혜가 의도와 다르게 나온 질문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2~3달 간격으로 시합하는 최강철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보면서 그동안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댔지만 모두 걱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에 그 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그녀의 나이는 34살이었으나 아직도 늘씬한 몸매를 유지했는데 결혼을 안 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0살 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오는 바람에 따라온 그녀는 이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가급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먼 이국땅에서 윤성호와 이성일을 제외하고 그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기에 만날 때마다 친숙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물론 뒤쪽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윤성호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누나, 화 그만 내시고 마실 거라도 주세요. 날씨가 따뜻해져서 그런가 목이 마르네요.”

“어, 잠깐만. 일단 거기 좀 앉아… 그런데 광호 씨는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고 왔네요?”

“오랜만에 시내 나들이 간다고 해서 멋 좀 냈습니다. 괜찮죠?”

“푸웃, 괜찮긴 한데 옷이 조금 크네요. 빌려 입었어요?”

“아닌데… 가게 점원이 아주 잘 맞는다고 권해준 건데……. 이상하네.”

“거기 앉아 있어요. 음료수 가져다줄게요.”

윤성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만지자 그녀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오늘 윤성호는 번쩍번쩍 광을 내고 따라 나왔다.

황인혜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더니 저번에 사놨던 양복을 척 걸쳐 입었다.

막상 그렇게 꾸미자 인물이 살아났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복싱으로 다져진 몸매와 양복이 어울려 본래의 괜찮았던 얼굴이 알랑 드롱처럼 변했다.

모든 게 황인혜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윤성호같이 답답한 남자도 로맨티스트로 변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일행 앞에 놓은 후 다시 한번 윤성호를 슬쩍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서 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렇게 만나면 지지고 볶더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오늘 온 거 시합 때문이 아니지?”

“눈치 빠르네요. 그러면서 시집은 왜 안 갔어요?”

“또, 또. 그건 프라이버시에 관한 거라서 묻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무 궁금해서 그렇죠. 안 그래요, 관장님?”

“나 끌어들이지 마라. 괜히 끌려 들어가서 혼나기 싫어.”

윤성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주 노련하다. 언제부턴가 그는 황인혜가 싫어하는 건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왜 왔니?”

“누나, 회계사라고 했죠?”

“응.”

“능력이 좋은가 봐요. 럼블 같은 좋은 회사에 취직도 하고. 돈 많이 받아요?”

“남들 받는 만큼 받아. 그건 왜 물어봐? 너는 돈 많잖아.”

“뉴욕대 나왔다면서요?”

“그렇게 안 보여? 누나처럼 예쁜 사람이 공부까지 잘했다니까 믿겨지지 않니?”

“거, 자화자찬은 웬만하면 하지 맙시다.”

잘 견디던 윤성호가 그놈의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냈다가 황인혜가 째려보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황인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최강철 쪽으로 돌렸다.

“수상하네. 너 오늘 질문이 이상해. 꿍꿍이가 뭐야?”

“물어볼게 있어서요. 다른 사람한테는 물어보기 힘든 내용이거든요.”

“뭔데?”

“경제 관련 신문을 주욱 살펴봤더니 지금 미국 경제가 회복 중이라고 그러더군요. 맞나요?”

“맞아, 석유 카르텔이 붕괴되면서 유가가 곤두박질쳐 줬거든. 실업률은 11%에서 8%까지 떨어졌어.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지. 각종 산업이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에 올해 GDP 성장률이 3%는 훌쩍 넘을 거라고 해.”

“하지만 계속해서 정부의 적자 폭이 커지고 있잖아요. 부채가 늘어나면 금리가 따라 올라가죠. 그렇게 되면 경제 성장을 확신하기는 힘든 거 아닌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점점 이상해. 어떻게 알았어?”

“신문에서 봤다니까요.”

최강철이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황인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는 최강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온 애송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권투 선수들은 무식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강철과 계속 만나면서 그런 선입견을 버렸다.

최강철은 모든 면에서 침착했고 착했으며,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너무 과하다.

이제 22살, 그것도 권투 선수에 불과한 어린 친구가 경제를 논하고 있었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윤성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이상하네. 인혜 씨, 얘가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는 말 못 들었어요?”

“서울대 경영학과요?!”

“그래요. 난 알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얘가 2년 전에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 한 놈이에요.”

“말도 안 돼… 그거 정말이에요?”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런 사람이 왜 권투를 해요?”

“잘하니까요. 인혜 씨가 직접 보고도 강철이가 권투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윤성호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뼛속까지 권투인이었고 권투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었다.

비록 황인혜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권투를 하찮게 생각한다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움찔.

윤성호의 눈을 바라본 황인혜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과 대신 질문을 꺼내 들었다.

“강철아, 난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야. 경제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다면 솔직하게 난 이 이상 대답해 줄 능력이 없어.”

“하하하… 긴장하지 마요. 그냥 물어본 거니까. 사실 누나한테 온 건 증권 계좌를 개설하고 싶어서 온 거에요. 누나, 주식은 하고 있죠?”

“어… 하고 있긴 한데… 지금은 거의 안 해. 그동안 워낙 손해를 많이 봐서.”

“그럼 나 계좌 좀 터주세요. 제가 하고 싶지만 이곳 물정을 너무 몰라서요.”

“너 매 맞아서 번 돈으로 주식하려고 그러는 거니? 하지 마. 주식으로 성공하는 사람 별로 없어. 고생해서 번 돈을 왜 허공에 날리려고 그래!”

최강철이 증권 계좌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가 펄쩍 뛰면서 말렸다.

그 모습을 보자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개인은 기관의 밥이라 꽤 손해를 본 모양이었다.

빙그레 웃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그런 손해를 봤다면 그녀의 성격상 말리는 게 당연했다.

그녀가 모르는 사실.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봤을 때 모든 위기 전에는 주식 시장이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블랙 먼데이 전의 미국 주식 시장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런 판단을 내렸기에 여기에 왔다.

무작정 기다리는 장기 투자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사서 블랙 먼데이가 오기 전 판다. 그런 후 시장이 박살 났을 때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냥 계좌 터서 조금씩 하려고 그래요. 재미 삼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계좌 트는 법만 가르쳐 주세요. 미국도 증권사에서 계좌를 여는 거죠?”

“하아, 너 참 별걸 다 안다.”

“나는 취업 비자로 미국에 왔는데 외국인도 주식을 살 수 있나요?”

“그건 좀 알아봐야 될 것 같아.”

“그럼 알아봐 주세요, 최대한 빨리.”

“너 진짜 할 거야? 도대체 뭘 사려고 그러는 건데?”

“코카콜라와 버크셔 해서웨이가 괜찮지 않을까요.”

최강철은 골드만삭스에 계좌를 개설한 후 자신의 지분 중 일부를 생활비로 남겨놓고 15만 달러를 반반씩 나눠서 코카콜라와 버크셔 해서웨이에 투자했다.

그가 버크셔 해서웨이를 선택한 것은 기억의 끝자락에서 워렌 버핏을 떠올렸기 때문인데 버크셔 해서웨이는 그가 운영하는 투자 전문 회사였다.

일종의 모험이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가는 무려 1,450달러를 기록하고 있어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과감하게 버크셔 해서웨이를 선택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그가 삶을 버릴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주식 중 하나였는데 무려 21만 달러를 기록한 꿈의 주식이었다.

물론 기다림의 과정이 필요했고 지금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으니 현명한 판단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15만 달러는 미국 시장을 간 보기 위한 푼돈에 불과했다.

진짜 승부는 그의 기억이 명확해진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되면 역사는 또 하나의 전설을 보게 될 것이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그의 대전료 중 10%씩을 가져가는 것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2만 달러씩을 손에 넣었지만 최강철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쓸데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성일의 집안은 그와 비슷했기에 목돈이 들어오자 부모님부터 생각했고 윤성호는 아직 어린 동생들을 위해 써야 할 곳이 많았다.

럼블 쪽에서는 한 달이 지났으나 기다리라는 말만 하면서 시합 날짜를 잡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전적이 쌓이면서 괜찮은 상대를 골라내는 게 쉽지 않다는 변명이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란 걸 안다.

럼블이 지금 소속 선수들의 시합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돈 킹이 탈세와 횡령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향한 것은 주식 매수를 모두 끝낸 다음 날이었다.

최강철은 시합이 끝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가서 경영학 수업을 들었다.

그가 주로 들은 수업은 빈 스카터 교수의 경제학 원론이었다.

뭔가를 배운다는 생각보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학풍과 수업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눈치가 보였으나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편안하게 수업을 받았다.

학생들의 숫자는 70여 명이나 되었고 모두 수업에 정신이 팔려 맨 뒷 자석에 앉아 있는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서로서의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기에 상대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 친 그녀의 모습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비춰지며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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