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61화 (61/308)

[61]

* * *

시합 당일이 다가오자 전 미국이 들썩였다.

래리 홈즈와 맞상대하는 선수가 미국 백인들의 희망 게리 쿠니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국은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 미국인들은 게리 쿠니가 흑인인 래리 홈즈를 이기고 세계 챔피언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동안 헤비급의 인기는 래리 홈즈로 인해 시들해진 상태였다.

오랜 장기 집권을 했음에도 아웃복싱을 하면서 상대를 야금야금 처단하는 래리 홈즈의 경기 스타일이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게리 쿠니의 등장은 미국 백인들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비록 지금은 슈가레이 레너드를 비롯한 슈퍼스타들이 천하를 호령하며 웰터급을 복싱의 중심 체급으로 만들었으나 과거에는 헤비급이 단연 복싱 팬들에게는 인기 절정이었다.

향수다.

미국인들은 게리 쿠니가 래리 홈즈를 꺾고 또다시 헤비급을 천하의 중심지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합에서 미국인들의 기대가 어떤지는 미국 대통령의 처신으로 충분히 나타났다.

그는 게리 쿠니가 이겼을 경우 축하의 인사까지 계획하고 있었는데 래리 홈즈에게는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았다.

* * *

“어이, 토머스. 우리 너무 빨리 온 거 아냐?”

“크크크… 할리, 너 언더 카드에 나오는 애들 이름 확인했어?”

“언더 카드로 나오는 애들을 뭐 하러 확인해.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스포팅뉴스의 할리가 눈을 오므렸다.

토머스의 질문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스포츠라인의 민완 기자 토머스는 복싱에 대해서 닥터라고 불릴 정도로 정통한 놈이었기에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런 놈이 한 시간이나 먼저 서둘러 오자고 했을 때는 그저 뉴스거리를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이유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토머스의 웃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완된 표정은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긴, 래리 홈즈와 게리 쿠퍼의 대결에 온 나라의 정신이 팔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

“뭐야, 지금 나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재밌어서 한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이제 그만 장난치고 말해. 뭐야?”

“2년 전 기억 나? 세계 선수권대회.”

“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오래전 일을 새삼스럽게 왜 꺼내고 그래?”

“때가 됐거든.”

“무슨 때?”

“2년 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리를 놀래게 만든 놈, 그놈이 오늘 언더 카드로 출전한다.”

“뭐라고? 정말이야!”

“이제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구만. 맞아, 최강철. 그놈이 오늘 나온단 말이지.”

“아이고.”

“브릴랜드까지 때려눕힌 동양의 갈색 폭격기. 내가 허리케인이라고 불렀던 놈이지.”

“우와, 미치겠네. 그런데 왜 난 몰랐지?”

“럼블에서 극비로 데려온 모양이야. 내가 톰슨을 조졌더니 그저 웃기만 하더군.”

“음흉한 놈이구만.”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벌써 4개월 전에 미국으로 넘어와 있었어. 레드불스에서 데리고 온 한국 트레이너진과 훈련하고 있었단다.”

“왜 그랬지?”

“뭐가?”

“그놈은 상품이 좋잖아. 충분히 홍보할 수 있었을 텐데?”

할리가 의문을 나타냈다.

어쩌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차기 세계 챔피언감이라고 불리던 마크 브릴랜드까지 깨뜨린 놈을 데려왔으면 당연히 홍보를 때려야 정상인데, 럼블 측에서는 어떤 액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머스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최강철이 백인이고 미국인이었으면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그놈은 한국인이라고. 자넨 우린 미국인들의 정서를 잘 알잖아.”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려고 그랬다?”

“빙고. 그래서 이런 빅 이벤트에 출전시킨 거겠지.”

“이유가 조금 약해.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메인 게임에 배치해야 되는데 놈은 언더 카드라고.”

“럼블 측에서는 간을 보는 거야. 최강철이 어떤 빅뱅을 터뜨릴지 자신이 없었던 거지. 메인 게임에서 죽을 쓰면 그것도 뉴스거리야. 돈 킹이 형편없는 놈을 데려왔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쪽팔리잖아.”

“그렇기도 하겠구만.”

“자, 슬슬 가보자고. 이제 조금 있으면 그놈 차례야. 희대의 풍운아인지, 아니면 잠깐 떴다가 사라져 버리는 허수아빈지 우리 두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되겠지.”

* * *

최강철은 라커룸에서 출전 준비를 마친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진행 요원이 바라보는 앞에서 낀 8온스 글러브가 마치 가죽 장갑을 낀 것처럼 느껴졌다.

밴딩을 두껍게 했기 때문에 글러브는 자신의 주먹과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긴장 안 했지?”

“긴장되는데요.”

“데뷔전이라고 긴장하면 안 돼. 넌 아마추어에서 무적의 챔피언이었어. 프로라고 하지만 웬만한 놈들은 아마추어보다도 못하단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최강철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함일 뿐이다.

루카스의 시합이 담긴 비디오를 본 결과 놈은 아주 지능적이었고 거칠었으며, 펀치력과 투지가 좋았다.

더군다나 오늘 경기는 아마추어처럼 3라운드가 아니라 6라운드였고 8온스 글러브를 끼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추어시절 12온스를 끼고 싸울 때처럼 대줘서는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게 될지도 몰랐다.

“처음엔 아웃복싱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성일이가 분석한 것처럼 작전대로 밀고 나가.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충해서는 안 돼. 알지?”

“압니다.”

“잘해줄 거라고 믿는다.”

윤성호가 최강철의 어깨를 힘 있게 주물렀다. 그의 손에 담긴 것은 희망과 간절한 기원이었다.

톰슨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경기 출전 준비를 알리는 진행 요원의 사인이 왔을 때였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코빼기를 보이지 않았는데 럼블이 주최하는 시합이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건 같았다.

“강철, 컨디션은 어떤가?”

“좋습니다.”

“재밌게 해. 알았지?”

“그럼요.”

웃는 톰슨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똑같은 말이다. 반드시 이기라거나 잘 싸우라는 말 대신 그는 재밌게 하라는 말을 썼다.

상황 파악이 된 후 그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미국에 들어온 지 4개월이 지났지만 돈 킹의 얼굴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럼블의 관심도 기대 이하였다.

말로는 럼블의 미래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떠들고 있었으나 아직 그들은 완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웃어주었다.

재밌게 하라는 말 대신 간절한 눈으로 이겨주기를 바란다는 말이 톰슨과 돈 킹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올 때까지 참아준다.

* * *

언더 카드였기에 관중이 적을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틀렸다.

25,000명을 수용하는 시저스 팰리스호텔의 특설 링은 이미 10,000여 명의 관중이 들어와 시합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거대한 관중석이었기에 VIP석을 중심으로 빈자리가 많이 보였으나 워낙 많은 관중이었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오금을 지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관중들이었다.

제3경기 언더 카드의 출전 선수로 최강철이 소개되었으나 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그의 모습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싸늘했던 반응을 넘어선 야유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노랭이, 여기는 뭐 하러 왔냐! 피 떡이 되어 기어나가려고 온 거냐?”

대체적으로 비슷한 야유였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최강철이 피식 웃었다.

저들은 반대편에서 미리 올라와 기다리고 있는 루카스가 미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경원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 탓이다. 이곳에 몰려든 관중들 대부분이 게리 쿠니를 응원하러 왔으니 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미국인과 싸우러 온 자신에게까지 연결된 것이다.

너희들의 반응이 그렇다면 그 분위기에 맞춰준다.

통로를 따라 링에 오른 최강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코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몸은 라커룸에서 충분히 풀었기 때문에 야유하는 관중들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강철아, 내가 말한 거 잊지 마. 놈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때릴 때 레프트 잽을 내면서 오른쪽 어깨가 뒤로 빠져. 그때가 콤비네이션의 시작이야. 스텝은 오른손잡이와 상대할 때면 언제나 좌측으로 세 번 움직이다가 공격하는 특징이 있고 펀치를 맞추지 못했을 때 뒤로 한 발 물러나. 꼭 기억해야 해.”

“알았다.”

“그리고 상대가 러시가 들어오면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어. 어퍼컷이 즉효다.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이성일의 말을 들으며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벌써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지만 막상 링에 올라오자 이성일은 속사포처럼 자신이 분석했던 내용들을 떠들어댔다.

이성일이 분석해서 내놓은 것들은 지금 말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스트레이트와 훅의 빈도, 레프트 잽을 낼 때의 특징 등 세세한 것까지 분석해서 내놨는데 제법 전문가티가 났다.

“꼭 이겨줘.”

“알았어.”

“이 자식아, 너 때문에 날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아리따운 아가씨를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까 지면 죽을 줄 알아!”

“수많은 아가씨 누구?”

“우리 학교에 있는 여대생들이 다 잠재적인 내 고객들이야.”

“크크크… 지랄한다.”

최강철이 유쾌하게 웃었다. 편하다. 이성일과 함께하면 언제나 이렇게 마음이 편해진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는 간단했다.

자신의 국적과 이번이 데뷔전이라는 소개만 간단하게 했는데 심지어 아마추어 전적조차 이야기하지 않았다.

몰라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38전 37KO승이란 전적은 아마추어에서 신화로 불릴 정도였으나 사회자는 그러한 사실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다시 한번 운집된 관중들 쪽에서 야유의 함성이 흘러나왔다.

가볍게 링으로 나가 팔을 든 후 코너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루카스가 소개됐다.

미친놈들.

루카스의 전적과 사이즈가 소개되자 미국 관중들이 열렬하게 환호를 터뜨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직 모든 관중이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함성 소리가 마치 폭탄 터지는 것처럼 들렸다.

“저 씨발 놈들, 지랄하는구만. 깡그리 무시해 버려.”

“저런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권투는 주먹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최강철의 대답에 윤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바셀린을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12온스와 다르게 8온스는 펀치를 맞았을 경우 커팅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는 정성을 다해 쉽게 찢어지는 부위를 마사지했다.

심판이 부르는 손짓을 본 이성일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허옇게 질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그런 놈의 가슴을 툭 쳐주며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인마, 그러다 쓰러질라.”

“강철아, 제발 이겨야 해. 꼭 이겨야 한다.”

“응, 알았어.”

심판의 신호에 의해 링 중앙으로 나가자 마주 다가온 루카스가 예리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선 제압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비디오에서 본 것처럼 두꺼운 목을 지녔고 어깨가 벌어졌는데,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에는 자신감이 읽혀졌다.

자신을 열렬하게 응원하는 관중들의 분위기에 잔뜩 고무된 모습이었다.

천천히 주먹을 부딪치고 코너로 돌아왔다가 공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꺾은 후 링의 중앙으로 나갔다.

이제 시작이다.

열광적으로 떠드는 관중들의 함성은 이미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들소처럼 링의 중앙을 점유하며 뛰어나오는 루카스의 모습만 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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