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57화 (57/308)

[57]

* * *

조카의 수술은 오래 걸렸다.

심장 수술은 워낙 조심스럽고 커다란 수술이었기에 무려 6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수술이 시작될 때부터 큰형은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고 형수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

“괜찮을 겁니다. 형수님, 그만 우세요.”

“삼촌,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눈물 속에 담겨 있는 감사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서울대에서 심장 전문의로 가장 유명하다는 최재순 박사를 섭외하고 수술 날짜 잡은 건 최강철이었다.

아시안게임 선수단을 이끌던 임준현에게 전화해서 부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긴장한 채 왔다 갔다 하던 형은 한쪽에 앉아 계신 부모님을 잠시 쳐다보더니 최강철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강철아, 형하고 잠깐 나갈래?”

“예.”

수술 시간은 벌써 3시간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초조함이 가슴속에 든 사람은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습관처럼 찾아오는 담배의 위안이 필요하다.

형을 따라 병원 밖으로 나와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담배 배웠냐?”

“전 복싱 선수잖아요. 담배 안 피웁니다.”

“…그렇지. 내가 아무래도 정신이 없나 보다.”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철아, 형은… 이제 아무런 바람도 없다. 그동안 아들놈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어. 능력 없는 부모를 만나 수술조차 받지 못하고 어린놈이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전부 원망스럽더라. 돈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아버지께 손을 내밀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런데 네 덕분에 수술을 시켰으니 내가 바랄게 더 뭐가 있겠냐.”

“…형.”

“이젠 괜찮다. 그놈이 죽는다 해도 형은 이젠 괜찮을 것 같아. 수술까지 시켜봤는데도 잘못된다면 그것도 그놈 복 아니겠냐. 고맙다, 강철아.”

큰형이 길게 내뿜은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동안 느껴왔을 큰형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담배 연기가 사라져 가는 것처럼 큰형의 고통도 그렇게 사라져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큰형이 전생처럼 부모님과 가족들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카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집도의는 수술이 잘됐다면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무뚝뚝했던 형의 눈물을 그때 처음 봤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큰형은 그동안의 고통과 설움을 한꺼번에 폭죽처럼 쏟아냈다.

그의 눈물은 슬픔이 기쁨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 * *

최강철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처분했는데 950만 원을 받고 넘겨줬다.

이사하기 전 혼자 다니며 새집에 새로 산 가구와 전자 제품들을 들여놓았다.

가족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장롱과 소파, 텔레비전은 물론, 냉장고까지 전부 장만했고 심지어 어머니와 누나들의 화장대까지 준비했다.

이사하기 삼일 전, 가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던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해서 가족들이 전부 새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나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실부터 안방, 그리고 자신들의 방을 보면서 누나들은 연신 소리를 질러댔는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처럼 두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엄마, 저기 봐봐. 공원이 보여요. 이리 와보라니까.”

막내 누나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베란다로 향했다.

어머니는 화려하게 빛나는 새집을 보면서도 웃음을 짓지 못하셨으나 막내 누나의 힘에 이끌려 억지로 베란다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도 어머니는 자신이 권투를 계속한다는 것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다.

“돈… 많이 들었겄다.”

“조금요.”

“네가 번 돈인데 이렇게 다 써서 어쩌. 내가… 강철아, 아버지가 미안하다.”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아버지, 이제 여기서 행복하게 사시면 돼요. 우리 가족 모두 웃으면서 살 수 있어요.”

“그려그려.”

“이사를 한 다음에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던 개인택시를 살 겁니다. 면허도 제가 알아볼 테니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가능하겄냐?”

“할 수 있어요. 아버지, 제가 알아서 다 처리해 놓을게요.”

“그려라.”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최강철의 말이라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집 판 돈을 내놓지 않았어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그에 대해 한 번도 말씀을 하지 않았다.

이사를 하고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복싱 협회의 사무장 유광호에게 부탁해서 관계 기관의 높은 양반을 소개받았더니 일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국은 역시 줄이다.

서민들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높은 놈들이 나서면 안 되는 게 없다.

개인택시를 사서 아파트에 세워놓았다.

아직 면허가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버지는 조만간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바쁜 일들을 모두 끝내고 나자 벌써 3월이 가까워져 있었다.

* * *

윤성호, 이성일과 모여 자주 식사를 했다.

같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취업 비자 등 준비할 것이 많아 수시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성일은 매일 체육관에 나와 복싱에 관한 기술들과 전술에 대해 공부했는데 유명 선수들의 시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본 건만 해도 3백 개가 훌쩍 넘었다.

윤성호가 복싱 협회의 지원을 받아 체육관을 운영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테이프들이었다.

철들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 이성일은 최강철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선지 권투에 대해 미친놈처럼 공부를 했다.

“성일아, 여권은 다 준비됐냐?”

“응, 벌써 했지.”

“영어 공부는?”

“야, 머리 아퍼 뒈지겠어. 복싱 공부 하는 것도 힘들어죽겠는데 영어까지 하려니까 대가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야. 저녁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잘 안 돼지?”

“그냥 외워. 외우다 보면 금방 늘 거야. 그렇죠, 관장님?”

“지랄한다. 우리가 넌 줄 아냐?”

윤성호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최강철을 노려봤다.

그 역시 지금 영어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천천히 하세요. 꾸준히 하다 보면 조금씩 늘 겁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되는 거냐. 톰슨한테는 연락이 왔어?”

“왔어요. 다음 달에 취업 비자가 나올 거래요. 우린 취업 비자가 나오는 대로 떠날 겁니다.”

“정확히 언제?”

“3월 중순쯤이면 될 거라네요.”

“그래봤자 보름정도 남았다는 거잖아.”

“마무리 잘하세요. 괜히 처리가 덜 된 것 때문에 나중에 다시 돌아오지 말고요.”

“할 게 뭐 있겠어. 체육관도 다 넘겼기 때문에 짐만 싸면 된다. 내가 마누라가 있냐, 뭐가 있냐. 이젠 홀가분하게 떠나기만 하면 돼.”

윤성호가 쉽게 말하며 소주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게 본심이 아니란 걸 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도 떠난다는 건 수많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법이다.

* * *

“저 새끼냐?”

“예, 형님.”

“복싱 선수라더니 몸이 좋구만.”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놈입니다. 그 전에는 세계 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했고요. 큰 형님께서 특별히 조심해서 잘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죽이는 것도 아닌데 뭘 조심해? 팔다리만 한 짝씩 부러뜨리면 되는 거 아냐?”

“맞습니다.”

“애들은?”

“연장 챙겨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놈 집 앞에 공터가 있습니다. 거기서 기다리라고 해놨습니다.”

“몇 명이나 왔냐?”

“형님하고 저까지 합해서 열 명입니다. 놈이 아무리 잘 쳐도 연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겁니다.”

“오늘따라 손맛이 좋아. 도끼를 쓰고 싶은데 그건 안 된다며?”

“피는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전부 쇠파이프로 무장시켰습니다.”

“하아, 이런 씨발. 저런 새끼는 도끼가 제격인데 아쉽구만.”

감자탕집 안에 있는 최강철 일행을 바라보며 김춘식이 혀를 길게 빼어 물었다.

놈은 영등포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흑사파의 행동대장으로 별명이 도끼였다.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손도끼를 썼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데 잔인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신군부의 칼날이 시퍼랬지만 전부 삼청교육대에 붙잡혀 간 것은 아니다.

그들의 정권 획득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조직들은 그 당시에 오히려 위세를 더하며 더 잘 먹고 잘살았다.

“형님, 나옵니다.”

“착한 놈일세. 오래 기다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유정의 춘희는 대기시켜 놨냐?”

유정은 도끼가 자주 가는 룸싸롱의 이름이었고 춘희는 그의 단골 파트너였는데 밤일을 아주 잘했다.

김춘식의 말을 들은 똘마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놈도 2차를 생각하자 기분이 절로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럼요. 원래 이런 일이 끝나면 가는 거잖아요.”

“얼마 받아 왔어?”

“큰형님이 30만 원 주셨습니다.”

“괜찮네. 오랜만에 똘똘이 목욕시킬 수 있겠구나.”

“예, 형님.”

“가자, 얼른 일 끝내고 거나하게 한잔 빨자.”

최강철은 유광호와 이성일이 집으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버스를 탔다.

감각이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것은 뒤쪽에서 따라붙은 두 놈의 얼굴을 확인한 후부터였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놈들의 면상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뒷골목에서 기생하는 인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쪽 자리에 앉은 놈들의 면상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어차피 놈들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일을 벌이지 못할 테니 분명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세울 것이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놈들이 따라 내렸으나 최강철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집을 향해 움직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의 거리는 1㎞가 넘었는데 밤이라 그런가 인적이 점점 뜸해졌다.

놈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것은 앞쪽에서 거무스름한 그림자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였다.

여덟이다.

거기다가 손에는 쇠파이프를 들었는데 전부 몸이 날렵한 놈들이었다.

최강철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다가온 놈들을 향해 돌아섰다.

앞을 막은 놈들은 부하들이고 일을 꾸민 건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놈들일 것이다.

“니들 뭐냐?”

“그 새끼 말버릇하고는. 어른한테 말할 때는 ‘요’ 자를 붙이는 거야, 공손하게.”

“주접떨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뭐야?”

최강철이 똑바로 쏘아보며 이를 드러내자 김춘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본능적으로 뒤춤에 넣어두었던 도끼를 쓰다듬었다.

뿜어져 나온 최강철의 기세가 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호오, 멀리서 봤을 때는 모르겠더만 성깔 있는 새끼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걸 보니 넌 아직 더 커야겠다.”

“극동의 안재만이 보내서 온 거겠지?”

“얼씨구,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희한한 놈일세.”

“기다리고 있었거든. 너희 꼬라지 보니까 한 놈씩 하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결국 떼로 덤빌 거 같구만. 그렇지?”

“하아, 쪽팔리게 이 새끼가 정곡을 찌르네. 용태야!”

“예, 형님.”

“오늘 있었던 일 큰형님한테는 말하지 마라. 저 새끼 뒈지면 사고였다고 그래. 알았어?”

“왜 이러십니까? 절대 피는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저놈 말 못 들었어? 어린 새끼한테 쪽팔리면 안 되잖아. 그러지 않아도 오늘따라 손맛이 땡겼는데 아무래도 도끼 좀 써야겄다. 복싱 선수라고 했으니까 모가지는 피하지 않겠어?”

서용태가 뭐라고 더 입을 열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김춘식이 이미 뒤춤에서 도끼를 꺼낸 후 시퍼런 눈으로 비키라는 시늉을 했기 때문이다.

미친 도살자. 도끼의 다른 별명이었다.

놈은 한 번 열받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 금방 웃다가도 주먹을 날릴 정도였다.

최강철은 김춘식이 손도끼를 꺼내 오른손에 드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극동의 정기수가 조심하라며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예상을 하고 있었다.

톰슨에게 전화가 왔을 때 극동에 관한 일을 이야기 해줬더니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뭔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도끼를 꺼내 드는 김춘식을 퍼런 눈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미국으로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서 사고를 치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었으나 최강철은 김춘식을 향해 하얀 웃음을 지은 채 다가갔다.

두려움? 그런 건 없다.

강철 같은 심장을 장착한 채 새로 살아오는 동안 두려움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의 뇌 속을 파고드는 건 오직 하나.

도끼를 든 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김춘식을 처단하는 것뿐이었다.

가슴속에서 전사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지독하고도 잔인한 전사의 피는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최강철로 하여금 김춘식이 휘두른 도끼를 향해 폭발적으로 달려 나가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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