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56화 (56/308)

[56]

* * *

최강철은 은마아파트에 들어서면서 눈을 부릅떴다.

대단지다. 28개동으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부동산에서는 여러 채의 매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강철은 단지를 한 바퀴 주욱 돌아본 후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공원과 가장 가까운 아파트를 선택했다.

“자네 눈썰미가 좋구만.”

“그런가요?”

“이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곳이지. 그래서 다른 동보다 조금 더 비싸고.”

“방 구조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야지. 그런데 정말 살 생각인가?”

중개업자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아직도 어린 최강철이 집을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도 있겠지만 집주인이 의사라더니 집 안이 깨끗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파란 대문 집에 비한다면 궁궐처럼 크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다른 데는 안 보고?”

“이 집이 마음에 듭니다. 얼마죠?”

“여긴 5천 7백만 원이네. 집주인이 한 푼도 깎을 수 없다고 못을 박은 집일세. 다른 집은 얼마간 흥정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잘 생각해.”

“괜찮습니다. 제가 사겠습니다.”

“허허, 젊은 사람이 화통하구먼.”

중개업자의 얼굴에는 최강철에 대한 칭찬보다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아마 그는 젊은 나이에 집을 사겠다고 덤비는 이 청년이 재벌집 막내아들 정도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위치가 좋지 않아 집값이 오르지 않고 있는 이 아파트를 덥석 무는 걸 보면 세상 물정 모른다고 판단했겠지.

하지만 그는 모르는 것이 있다. 이 아파트가 머지않은 장래에 수십 배 뛰어오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강철은 그날 곧바로 은행에서 돈을 찾아 계약금을 치렀다.

예전의 삶이었다면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그는 단호하게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아버지의 명의가 아니라 그의 명의였다.

그 작은 집을 가지고도 군대에서 사고 친 후 돌아온 둘째 형은 재산 때문에 큰형과 칼부림을 했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빌미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사 날짜는 한 달 후였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먼저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필요했다.

부모님과 누나들은 자신이 한 일을 알게 되면 기절을 할지도 몰랐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최강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일을 저질렀으니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그랴?”

잠시 말을 끊고 아버지와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했다.

가족들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최강철이 입을 열자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젠 그가 어떤 말을 해도 화낼 것 같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우리 이사 가요.”

“무신 이사?”

“제가 오늘 집을 샀습니다. 강남에 있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예요.”

“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겨? 난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겄네.”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했더니 포상금이 꽤 나왔어요. 그리고… 제가 프로로 데뷔하려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포상금과 계약금을 합해 집을 샀어요.”

폭탄선언이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권투로 얼마나 번다고 집을 산단 말인가. 더군다나 서울대에 합격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최강철이 더 이상 권투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둘째 누나 최강희가 비실비실 웃으며 농을 걸어왔다.

“강철아, 만우절 되려면 멀었다. 얘가 서울대 들어가더니 거짓말만 늘었네.”

“글쎄 말이야. 최강철, 너 자꾸 그러면 콧구멍에 하얀 털 나.”

막내 누나까지 거들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얼굴에서는 금방 웃음기가 사라졌다. 최강철이 굳은 얼굴로 그녀들의 웃음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들, 정말이야. 한 달 후에 이사를 해야 해. 아버지, 34평 아파트예요. 우리 식구 살기에 충분할 정도로 큰 집입니다.”

“너, 그게 정말이여?”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정말입니다. 여기 계약서가 있으니까 보세요.”

최강철이 계약서를 꺼내 앞으로 내밀자 그때부터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금액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는데 가족들로서는 처음 보는 거액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기 때문일까.

가족들은 전부 계약서에 시선을 던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버지, 한 달 후에 이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 집을 내놓아야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셔야 돼요.”

“난 당최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리고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였다.

“도대체 이게 뭔일이여! 포상금은 그렇다 쳐도 계약금이 뭐여? 지금 잘난 서울대생이 권투를 하겠다는겨? 강철아, 너 정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엄마.”

“이거 도로 갔다 줘.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어? 지발 정신 좀 차려, 이눔아!”

“이미 늦었어요. 내가 받은 계약금을 돌려주려면 이 돈의 두 배를 줘야 한단 말이에요. 엄마, 학교는 나중에 꼭 복학해서 공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학교 안 댕기고 정말로 권투하겠다는겨? 그게 말이 되냐, 이 미친 눔아!”

사실을 말하면 난리가 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머니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오랜 시간 앉아서 설득했으나 결국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누워 더 이상 최강철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착한 분이셨지만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절대 꺾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랬기에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대신 아버지와 누나들에게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거듭 설명해서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비록 어머니가 울며불며 안 된다고 고함을 질렀으나 나머지 가족들이 행동으로 옮겨 나가자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을 내놓았고 이사 갈 집에 들여놓을 세간살이를 전부 새것으로 장만했다.

가장 좋아한 것은 누나들이었다.

그동안 다 큰 처녀들이었음에도 방이 없어 함께 살았기 때문에 누나들은 시간이 갈수록 가슴 떨리는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집안이 다시 폭풍에 휩싸인 것은 신문에서 그의 계약 소식이 터졌기 때문이다.

<링의 풍운아, 최강철. 세계 최고의 프로모션 돈 킹의 더 럼블과 계약>

뒤늦게 사실을 안 아버지와 누나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제 20살에 불과한 아들이자 동생이 집안을 위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건너가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그들을 슬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러나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떠난 다음 어머니를 잘 돌봐주세요.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꼭 다시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잖아요.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 제 결정을 믿고 지켜봐 주세요.”

* * *

빠직!

신문을 구기는 안재만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스포츠서울에서 단독으로 보도한 오늘 날짜 신문에는 최강철의 계약 소식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극동프로모션을 운영해 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 된 밥에 코가 빠졌다.

최강철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부터 안재만은 본격적으로 움직여 대한이 최강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

프로 복싱에서 대한은 유일한 극동의 라이벌이었지만 동업자였기에 아마추어 삼두마차 중 두 명인 문성길과 김동길을 양보받고 두말없이 최강철을 포기했다.

대한이 포기한 이상 최강철은 그의 밥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중소 프로모션은 그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제 최강철이 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극동뿐이었다.

천천히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놈이 할 수 있는 건 복싱밖에 없을 테니 제 발로 걸어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그때 슬쩍 헐값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두 눈이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야, 정 부장! 넌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새끼야, 죄송은 서부에나 가서 해. 이젠 어쩔 거야! 다 된 밥에 재가 왕창 쏟아졌으니 어쩔 거냐고! 우와, 미치겠네. 이 새끼 때문에 대한에 문성길과 김동길을 통째로 양보했는데 럼블로 튀었으니 우린 뭐냐. 우리가 닭 쫓던 개냐?”

한마디로 좆 된 거지 뭐긴 뭐야.

고개를 팍 숙인 정기수가 입안에서 목구멍까지 나온 욕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길래 씨발 놈아, 최선을 다해서 접근하자고 했잖아. 모든 일은 네가 다 저질러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기수는 시퍼런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안재만의 눈을 피한 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개개 봐야 피를 보는 건 자신이었다.

안재만은 독한 놈이었다. 예전에 커다란 조직에서 놀았다더니 이렇게 화를 낼 때 보면 꼭 살모사처럼 눈빛이 변했다.

더 불안한 것은 여기서 안재만이 그냥 끝내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흐흐… 나를 엿 먹였다, 이거지. 이 개새끼가…….”

놈이 잔인하게 웃었다. 안재만이 이렇게 웃을 때는 뭔가 지독한 결정을 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결정이 무엇인지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 최강철은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자고 아시안게임도 제패한 놈입니다. 함부로 다루게 되면 우리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크크크… 의심 한두 번 당해봐. 그래도 괜찮아. 빠져나갈 구멍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나는 나한테 기어오른 놈을 절대 두고 보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이 새끼야.”

* * *

최강철은 기차에 몸을 싣고 구미로 향했다.

서울에서 구미까지는 기차로 6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멀었다.

그가 구미에 간 것은 거기에 큰형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형은 국민학교조차 나오지 못했다. 워낙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고 형이 어렸을 적에는 학교를 가는 걸 사치라고 생각할 때라 배우는 걸 쉽게 포기했다고 들었다.

큰형과 그는 17살이나 차이가 난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최강철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큰형에게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큰형의 얼굴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람을 알아보기 전 큰형은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입대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큰형은 막노동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왔다.

아직 어린 동생들의 먹성은 대단했고 아버지의 벌이로는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이다.

큰형은 착했다.

그럼에도 그가 부모님을 버린 것은 둘째 조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울분으로 인해서였다.

돈이 없어서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큰형의 심정은 모든 사람에게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에서 내려 큰형이 살고 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구미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서 서울 못지않은 성세를 누리는 도시였다.

그러나 큰형이 사는 집은 더없이 초라했다.

공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아들의 병원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어졌기 때문에 지하 단칸방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강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형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달려 나왔다.

형수도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지독한 놈이 결국 그녀를 독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이고, 삼촌. 여긴 어쩐 일이야. 아즉 학교 안 갔어?”

“학교는 3월 달에 개학이에요. 아직 멀었어요.”

“그럼 놀러온 거야?”

“그런 거죠. 조카들도 보고 싶고, 형 얼굴 좀 보려고요. 큰형 아직 안 왔어요?”

“이제 올 때 되었어. 일단 들어가요. 그러잖아도 아들놈들이 삼촌 보고 싶다고 매일같이 징징댔어.”

형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서자 큰 조카 놈이 맨발로 달려 나왔다.

조카 놈들은 유독 그를 따랐는데 집에 올 때마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큰조카를 들쳐 안고 안으로 들어서자 둘째 조카 놈이 누워 있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버둥거리며 일어나 기어왔다.

벌써 4살인데도 허약한 몸은 일어서기도 힘든 것 같았다.

큰형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이들을 주기 위해 가져온 팽이를 가지고 놀아줄 때였다.

초췌한 얼굴. 삶의 지독한 고난이 큰형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왔냐?”

“예.”

“오면 온다고 연락이나 하지 그랬어. 집안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괜찮아요. 있는 거 그냥 먹으면 되죠.”

아버지를 닮아 무뚝뚝한 형이 최강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후 씻으러 나갔다.

뒤돌아서서 나가는 큰형의 등이 좁아 보였다.

형수가 부랴부랴 준비한 저녁을 먹으며 큰형은 다시 한번 최강철이 서울대에 들어간 것을 칭찬했다.

큰형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막냇동생이 서울대에 들어간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상을 물리고 형수까지 방에 앉았을 때 최강철은 잠시 동안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져온 통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냐?”

“돈 입니다.”

“무슨 돈?”

형은 통장을 열어보지 않은 채 최강철을 향해 의문이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그런 형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통장에 천만 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 돈이면 정국이 수술시키고 전세로도 옮길 수 있을 거예요.”

뒤늦게 통장을 열어본 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이를 악문 채 최강철을 쏘아봤다.

“어디서 난 돈이냐?”

“저는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그래서 계약금으로 받은 돈입니다.”

“이 미친놈이… 학교는 가지 않고 권투를 계속한단 말이야? 너 미쳤어!”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공부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보고 네가 매 맞아서 번 돈으로 수술시키고 전세를 얻으란 말이냐? 가져가라. 난… 그렇게 못해.”

목소리가 약하다.

통장을 다시 내밀었으나 큰형의 손길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큰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형수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안다. 비겁한 양심을 숨기기 위해 형은 지금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 돈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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