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 * *
서울대 합격 발표 날이 다가오자 가족들은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대학, 특히 천재들만 응시한다는 서울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최강철의 성적이 더없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들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머니가 따라나섰다.
어딜 가는 걸 극히 싫어하는 분이셨으나 아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막내 누나 최강숙도 회사에 휴가를 낸 채 채비를 했고 이성일은 벌써부터 도착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네 명이 한 몸처럼 택시를 타고 서울대로 향했다.
“여그가 서울대냐?”
“예, 엄마.”
“아이구, 엄청 크네. 내가 말이여. 살아생전 서울대를 구경할 줄은 몰랐구먼.”
“엄마, 나도 그래. 우리 강철이 아니면 서울대를 구경이나 했겠어요? 다 잘난 우리 동생 덕분이야.”
서울대 정문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누나가 도란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굳어져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정문을 통과해서 길게 뻗어 있는 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사람들의 행렬.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오늘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학생들과 가족들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몰려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어머니와 누나를 뒤에 남겨둔 채 이성일과 함께 벽보가 붙어 있는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뻔한 결과였으나 벽보에서 자신의 수험표를 확인한 순간 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세, 강철아 축하한다!”
“축하는 무슨. 인마, 창피해. 놓고 말해.”
합격을 확인한 이성일이 방방 뜨면서 끌어안자 최강철은 질색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런 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어머니와 누나는 다가오는 최강철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나 합격했어요.”
“정말이여?”
“예. 경영학과 수석 합격이에요.”
“아이고야, 우리 아덜! 잘했다, 잘했어. 우리 아덜 만세다.”
“강철아, 축하해! 우리 동생, 정말 축하해.”
어머니와 누나가 최강철을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오늘도 우신다.
어머니는 기뻐도 슬퍼도 마냥 울기만 하신다.
하지만 막내 누나는 그렇지 않았다.
“강철아, 여기서 잠깐 기다려 봐! 아버지한테 전화하고 올게. 큰오빠랑 큰언니, 둘째 언니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 합격되면 빨리 전화 달라고 했거든.”
최강철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어깨에 팔을 올려 감싸 안은 채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기쁨으로 인해 가족들과 웃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눈물을 흘린 채 서럽게 우는 아들을 달래느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웃음과 눈물.
모든 것은 인생사의 한 장면에서 본다면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결과에 따라 웃음과 눈물을 흘려낸다.
사내가 다가온 것은 어머니가 합격 기념으로 최강철이 좋아하는 불고기를 만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실 때였다.
“최강철 선수, 나 알죠?”
안다.
여러 번 인터뷰를 했고, 줄곧 따라다니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로 썼던 사람이었으니 모를 리 없다.
스포츠서울의 김도환 기자였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소문을 듣고 왔지. 나는 자네에 관한 일이라면 어디든 쫓아갈 준비가 되어 있거든.”
“고생하시는군요.”
“정말 대단하구만. 나는 소문을 듣고 정말 놀랐네. 자네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서울대를 합격하다니, 그것도 경영학과에. 국민들이 알면 깜짝 놀랄 거야.”
그의 눈에 들어 있는 것은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강철이 누구란 말인가.
각종 국제 대회를 휩쓸며 복싱판을 뒤엎어 버린 풍운아였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과 훈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순수한 실력으로 서울대에 합격했으니 이건 완전히 특종감이다.
더군다나 그가 확인한 최강철의 학력고사 점수는 338점이었다.
만점에서 단 두 문제만 틀렸다는 이야기다.
“쓰실 건가요?”
“당연히 써야 되지 않겠나. 링의 풍운아가 꾸준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놀라 자빠질 걸세.”
“제가 원하지 않아도 쓰실 생각입니까?”
“자네가 왜? 이처럼 좋은 일을 왜 쓰지 말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구만.”
“그냥 제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쓰지 말아주세요.”
“이건 특종이라고!”
“김 기자님, 다음부터 제 얘기 안 쓰실 생각이십니까? 저 삐지면 오래 가는 놈입니다.”
“하아, 이 사람아. 이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 나쁜 일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가?”
“대신 정말 특종 하나 줄게요.”
“특종? 뭔데?”
최강철이 불쑥 말을 꺼내자 김도환의 눈이 백열등처럼 반짝거렸다.
그로서는 서울대에 입학한 것이 엄청난 특종거리를 잡은 것이었지만 은근하게 협박하는 최강철의 말을 듣자 마음이 찜찜했는데 갑자기 진짜 특종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감이 확 몰려왔다.
“저는 3월 달에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돈 킹이 운영하는 더 럼블과 계약이 되었어요.”
“헉, 그 말이 정말인가! 언제 계약했는데?”
“일주일 전에 했습니다.”
“계약 조건은?”
“그건 비밀입니다. 더 럼블에서 강하게 요청했거든요. 원래 사업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허이구…….”
“기사로 쓸 때 그냥 좋은 조건이라고만 하세요. 더 럼블에서 최강철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고 스카우트했다는 정도로만 써도 특종감으로는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고, 알았네. 그래도 기사로 쓸려면 조금 더 자료가 필요하니까 몇 가지만 더 묻자고. 그래도 되지?”
“그러세요. 대신 서울대 이야기는 빼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 * *
최우용은 멍하니 앉아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를 유지하는 토목광구는 겨울이 되면 조금 한가해진다.
보수 공사가 겨울철에는 쉬었기 때문에 제설 작업을 위해 대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눈발이 서서히 날리고 있어 어쩌면 밤새도록 작업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
벌써 이 일을 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청주에서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운전을 배운 후 무작정 상경해서 운 좋게 평생 직업을 잡았으니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매년 계약을 새로 했으나 특별한 하자 없이 성실하게 일해온 덕에 나이가 58살이 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
이제 이 일도 2년 후면 정년이다.
기준에 60살이 되면 계약직들도 정년 처리가 되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운전원들의 꿈은 개인택시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 꿈을 이룬 사람은 드물었다.
택시를 살 수 있는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면허를 받는 것조차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두렵다. 아직 막내아들의 학비와 결혼 못 한 자식들의 혼수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쳐온다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사무실에 출근해서 안절부절못하며 전화기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리를 비웠을 때 전화가 온다면 큰 낭패였다.
아들의 합격 발표가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권투로 세계를 제패하면서도 공부를 잘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서울대를 응시했다.
점수가 워낙 좋아서 합격할 거라 예상했지만 긴장으로 연신 침을 삼키며 전화를 기다렸다.
합격만 한다면 막노동을 해서라도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줄 작정이었다.
너무나 자랑스럽다.
아들을 볼 때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이런 아들을 준 하나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자 최우용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사무실에 전화는 단 두 대뿐이다.
저승사자인 김 주사 자리와 사무실 경리와 잡무를 도맡아서 보는 여직원 자리였다.
전화는 김 주사 자리에서 울렸는데 마침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최우용은 부리나케 뛰어가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출동 대기를 하고 있던 운전원들과 작업원들의 눈이 한꺼번에 쏠렸다.
그들 역시 최강철이 서울대에 응시했다는 것과 오늘이 발표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보세유.”
-아버지?
“강순이냐?”
-아버지, 강철이가 합격했어요!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이래요.
“아이고, 그것이 정말이여?”
-그럼요. 아버지, 축하드려요.
“그려그려. 지금 강철이는 어디 있는겨?”
-엄마랑 같이 있어요. 조금 이따가 집으로 갈 거예요.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일찍 들어오세요. 엄마가 불고기 해놓는다고 그랬어요.
“저그… 그기 어떻게 될지 모르겄다. 오늘 눈이 온다고 해서 말이여…….”
흥분해서 떠드는 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도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하늘에 붕 뜬 것처럼 어지러웠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놈이 또 장한 일을 해내고 말았구나. 우리 아덜눔이.
“어찌 된겨?”
최우용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가만히 서 있자 옆에서 기다리던 박 반장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의 태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반장님, 우리 아들 눔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구먼. 그것도 경영학과 수석 합격이라네.”
“아이고, 시상에! 정말이여?”
“지금 전화 왔잖어.”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그러면 춤이라도 춰야지. 난 깜짝 놀랬잖어. 잘못된 줄 알고. 여보게들, 최 씨 아들 강철이가 서울대에 합격했다네! 그것도 수석 합격이라는구먼!”
두 사람의 대화를 동료들은 다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반장은 호탕하게 웃으면 다시 한번 크게 최강철의 합격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직원들은 벌 떼처럼 일어나 최우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의 너스레는 빛을 잃었다.
“축하해요, 최 씨 아저씨. 올해 복이 터졌네요. 복이 터졌어.”
“도대체 전생에 얼매나 착한 일을 했길래 그런 아들을 얻은 거여? 정말 부러워죽겠네요.”
“술 사야 돼, 밥도 사고. 알었지?”
“그럼유, 사야죠. 허허…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사지, 뭐. 집이라도 팔 테니께 걱정하지 마러.”
최우용의 얼굴에서 뒤늦게 햇살처럼 밝은 웃음이 흘렀다.
현실.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현실이 뒤늦게 그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고 있었다.
합격 발표가 난 후 이모들을 비롯해서 친척들의 축하 전화가 줄을 이었고,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직접 집까지 찾아와 어머니를 만나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학교 정문에는 또다시 현수막이 내걸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대생을 배출한 이사장은 최강철의 입학금 전액을 내놓았고 학부모회에서도 장학금을 주었다.
4학년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학비가 필요 없었으나 사람들은 그가 서울대에 들어가 준 것만 가지고도 앞다퉈 돈을 들고 왔다.
최강철은 그 돈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다.
통장에 들어 있는 돈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어머니에게는 엄청 큰돈이었다.
“너두 써야지. 강철아, 여그 이건 네 용돈으로 써.”
어머니가 학부모회에서 준 장학금 20만 원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언제나 돈이 아쉬웠음에도 어머니는 그에게 들어온 돈을 전부 받는다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최강철은 어머니가 내민 봉투에서 3만 원을 꺼내고 다시 돌려 드렸다.
“이거면 됩니다. 저는 쓸 데가 별로 없어요.”
봉투를 받으시는 어머니의 시선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겼지만 최강철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직 부모님은 그가 더 럼블과 계약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 권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어머니는 자신이 곧 다가올 3월에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사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해야 되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압구정동으로 향했다.
통장에 들어 있는 돈으로 집을 살 생각이었다.
그도 안다.
이 돈으로 지금 한창 개발 중인 잠실 땅을 산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사는 것이었다.
무작정 가장 커다란 부동산을 향해 들어갔다. 지금은 복덕방이라 적혀 있었는데 압구정동이라 그런지 40대 중년 남자가 자리를 차지한 채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학생, 어쩐 일로 왔어?”
못 알아본다.
신문과 방송에서 제법 얼굴이 팔렸지만 링 위에 있을 때와 사복을 입고 나왔을 때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을 사려고 왔습니다.”
“학생이?”
“그렇습니다.”
“어허, 이 사람. 자네, 지금 농담하는 거야?”
“저분들 마저 상담하시죠. 그런 후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그것참 별일이네. 일단 거기 앉아 있어.”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상담하고 있던 사람들은 조건에 맞는 집이 없었던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년 사내가 다가온 것은 손님들이 문을 나서고 난 후였다.
“자네, 학생 맞지?”
“대학생입니다.”
“허허… 그래, 월세를 구하는 건가?”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집을 사려고 왔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건가? 여긴 압구정동이야!”
“압니다. 그래서 온 거니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기 현대아파트 시세가 얼마나 됩니까?”
눈빛을 세운 최강철의 시선을 마주한 중개업자의 눈이 그때서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의 눈은 장난하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정말 살 생각인 모양이구만.”
“그렇다고 했을 텐데요.”
“현대아파트는 꽤 비싸. 한강이 보이는 곳은 훨씬 더 하고. 자네, 얼마 정도를 예상하고 있나?”
“6천 정도 있습니다.”
“에이, 이 사람아. 그것 가지고는 턱도 없어. 현대아파트는 최소 1억은 줘야 해.”
“그렇습니까?”
기가 막힌 일이다.
1983년도에 이미 현대아파트의 가격이 이 정도로 비쌀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왕 사는 거 나중에 가장 많이 오를 아파트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그럼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은 어디가 있죠?”
“어디 보자, 강북도 괜찮은 데는 어렵겠고. 대치동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있는데 자네가 말하는 돈하고 시세가 비슷하구만.”
“무슨 아파트죠?”
“은마아파트. 위치가 좋지 않아서 그런가 아직 거기는 가격이 오르지 않았어. 어떤가, 볼 생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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