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54화 (54/308)

[54]

* * *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귀국한 지 3일이 지났을 때였다.

벌써 다녀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과 달리 떨리지 않았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만 점심 식사에 초대했는데 눈이 돌아갈 정도의 만찬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먹어도 먹는 게 아니다. 그 비싸다는 등심과 회가 산더미처럼 나왔으나 선수들은 깨작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대통령은 선수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칭찬을 하다가 최윤희에게 한동안 질문을 던졌다.

역시 여자는 예쁘고 봐야 한다.

수영 선수답지 않게 잘 빠진 몸매와 예쁜 얼굴을 지닌 최윤희는 아시안게임이 끝나면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으며 빅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최강철에게 순서가 왔을 때 대통령은 아예 젓가락조차 놓고 끝없이 칭찬과 질문을 던져댔다.

무앙수린과의 시합에서 눈이 찢어질 때의 상황은 물론이고 부상을 당했음에도 결승전에 출전한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고는 히로키와의 시합 장면을 생생하게 말하면서 침이 튀길 정도로 칭찬을 했다.

얼굴이 다 붉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오직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칭찬을 해대니 송충이가 몸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자네,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이지?”

“예, 각하.”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프로에 데뷔해서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옳지, 나도 그 생각을 했어. 지금 웰터급 챔피언이 슈가레이 레너드잖아. 내 말 맞나?”

“예, 맞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과거가 비틀어진 것일까.

전생에서 슈가레이 레너드는 눈 부상으로 인해 금년 11월에 은퇴했었는데 지금 그는 여전히 강력한 챔피언으로 남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게으른 천재 복서였던 윌프레도 베니테스는 물론이고 링의 백작 아르게요, 무한 테크리션 아론 프라이어가 체급을 올렸고, 거기에 토머스 헌즈와 듀란까지 현재 웰터급의 판도는 군웅할거의 전장이 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18연속 KO승을 기록하며 신성으로 떠오른 마이클 보우, 23연승의 유리 체르챈코, 25연승 23KO승을 기록하고 있는 하드펀처 피터밀스 등 강력한 도전자들이 계속 생성되며 전 세계 복싱 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대단하더구만. 토마스 헌즈도 이겼고 듀란도 이겼어. 더군다나 타고난 천재라는 윌프레도 베니테스도 꺾었지. 내가 그놈 경기를 다 봤는데 한마디로 신이 내린 복서야.”

“이길 수 있습니다.”

“뭐라고?”

“제가 경력만 쌓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각하.”

“푸하하… 그렇지, 자신감이 있어서 좋아. 자네 경기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

대통령이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그의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권투광답게 최강철의 가능성을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최강철의 머리가 번쩍이며 돌아갔다.

더 럼블의 톰슨에게 제약 조건을 풀어달라고 말한 게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으나 확실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병역에 관한 규정이 그만큼 풀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대통령의 웃음에 기대어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약 조건이 있습니다.”

“제약 조건이라니, 그게 뭔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병역은 면제되나 아마추어 복싱으로 5년간 봉사해야 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미국으로 건너가 싸우고 싶지만 그 규정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허어, 그런 게 있었어? 어이, 비서실장!”

“예, 각하.”

대통령이 부르자 비서실장 장세동이 급하게 다가왔다.

그는 얼굴이 슬쩍 굳어져 있었는데 최강철을 잠시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장세동의 얼굴은 금방 부드럽게 변하며 대통령을 향해 돌아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한테 왜 그런 제약 조건이 있는 건가?”

“저도 잘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습니다. 즉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즉시 해결해. 말도 안 되는 족쇄로 젊은 친구들을 묶어놓는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참, 어이가 없구만.”

“알겠습니다, 각하. 관계 기관에 즉시 시달해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히 전두환은 통이 컸다.

세계 선수권대회 때와는 달리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200만 원이란 거액의 포상금을 내렸다.

하지만 들어온 돈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각종 격려금과 포상금이 지급되었는데 전부 합하자 1,800만 원이나 되었다.

전두환이 먼저 인심을 썼기 때문에 관련 단체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은 돈이었다.

다시 살게 된 삶에서 처음으로 통장을 개설해 돈을 저축했다.

아버지에게 이 돈을 주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은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 독약이 되고 슬픔과 고통을 준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큰형과 둘째 형은 이것보다 적은 돈을 가지고 싸우다가 부모님과 가족들의 품을 떠난 후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을 막고 싶었다.

아버지는 너무 착해서 맺고 끊는 게 부족했고, 사람들에게 쉽게 속을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이었다.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 난 것은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그가 받아 든 성적은 338점이었다.

340점 만점이었으니 2개가 틀렸는데 국어와 영어가 각각 1문제씩이었다.

몰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 고의로 틀린 것이었다.

만점을 받게 되면 사회의 관심이 한 몸에 쏠리는 것이 싫었다.

자신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면 안 된다. 복싱으로 성공하기 위한 계획이 공부로 인해 방해받은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학교는 난리가 났다.

정문고 역사상 최고점을 획득한 최강철의 성적은 선생들이 그토록 원하던 서울대 어느 학과라도 갈수 있는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 * *

“성일아, 우리 술 한잔할까?”

“얼씨구. 이 자식아, 술도 못 마시는 놈이 무슨 술을 마시자고 그래. 농담이지?”

“농담 아니야, 인마. 오늘따라 술이 당겨서 그래.”

“하이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러 입시 원서를 낸 최강철은 따라온 이성일과 함께 오랜만에 종로 거리를 거닐다가 불쑥 술을 마시자는 제안을 했다.

그 제안에 이성일이 하품을 흘려냈다.

무려 6년을 사귀었지만 그는 최강철이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마실 거야?”

“저기 들어가자. 맥주 한잔해.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뭔데?”

이성일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는다는데, 갑자기 최강철이 이상한 짓을 하자 그의 눈이 금방 불안해졌다.

학력고사가 끝나면 고3들은 자유인이 된다.

술을 마셔도 학교에서는 참견하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용인하는 분위기였기에 종로에는 청춘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종로 한편에 있는 맥주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생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켰다.

맥주집은 청춘들로 바글거리는 중이었다.

맥주가 나오자 최강철은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성일의 잔에 맥주잔을 부딪친 후, 길게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마셔!”

“아, 정말 미치겠네. 너, 이 자식. 문영이란 애 때문에 그러냐?”

“여기서 걔가 왜 나와?”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렇고 뉴델리에 가서도 친하게 지냈다며. 왜, 걔가 연락을 안 받아?”

“인마, 걔는 내가 찼어.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그랬다.”

“거짓말!”

“정말이야.”

사실이다.

대회 폐막식 날 최강철은 웃으며 다가온 그녀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애초부터 사귈 생각이 없었으니 그녀에게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뻤다며?”

“예뻤지.”

“그런데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어?”

“착해서.”

“착해서?”

“그래, 착한 애를 울리면 안 되잖아.”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이 자식아, 예쁜데 거기다 착하기까지 하면 좋은 거잖아.”

“그건 좋은 게 아니야. 예쁘고 안 착해야 내가 부담스럽지 않다.”

“하아, 미치겠구만.”

이성일이 답답한 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긴,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놈의 기준에서는 이문영 같은 여자가 최상의 조건을 가진 여자였을 테니까.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사는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건 그렇고, 성일아, 우리 미국 가자.”

“미국엔 왜. 여행 가자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난 미국에 가서 복싱을 하겠다고. 난 네가 같이 가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때?”

“얼씨구. 학교는 어쩌고, 인마.”

“나는 입학하면 바로 휴학계를 낼 거야. 너도 그러면 안 되겠냐?”

빤히 쳐다보며 묻자 이성일의 눈이 금방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비록 삼류 대학이지만 원서를 냈고 미달이라 합격이 보장된 상태였다.

“내가 거길 가면 뭐 해. 설마 네 말동무나 돼 달라는 건 아니지?”

“넌 내 트레이너다. 돈을 받고 나와 같이 싸우는 거야.”

“난 권투도 잘 모르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야지. 세계 최고 복서의 트레이너를 하는데 그 정도 노력도 없이 공짜로 놀고먹을 생각했어?”

“음…….”

이성일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혀 뜻밖의 제안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미국이 어디 옆 동네도 아니고 영어조차 못하는 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심각해진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냐. 생각해 보고 말해.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받아들일 테니까.”

“가자.”

“뭐라고?”

“간다고, 이 새끼야. 친구 놈이 가자는데 내가 어딜 못 가겠냐? 좆도 가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지, 뭐. 트레이너가 별거겠어? 그게 설마 수학 공식 푸는 것보다 더 어렵겠냐?”

“정말이냐?”

“내가 영어를 못해서 힘들겠지만 네가 없어서 심심한 것보다는 낫겠지.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 * *

톰슨이 불쑥 찾아온 것은 입시 결과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의 얼굴은 만면에 웃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미스터 최, 자네의 병역 제한 조건이 풀렸네. 일주일 전에 우리 쪽으로 통보가 왔더구만. 이제 미스터 최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썼네. 힘깨나 쓴다는 놈들한테 들어간 돈만 해도 만 달러는 될 거야.”

톰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하자 최강철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는 자신을 아직도 어리숙한 고등학생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럼블이 미친 짓을 하지 않았어도 대통령이 나섰으니 자연스럽게 풀릴 일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대통령의 힘으로 제약 조건 정도 푸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이제 자네와 계약을 하고 싶네.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나?”

“좋습니다. 하지만 먼저 계약 조건을 봐야 하겠습니다.”

사업의 기본은 계약서다.

계약서는 차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 해결사 역할을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보증서이기도 했다.

더 럼블에서 제시한 계약금은 십만 달러. 우리나라 현재 가치로 거의 칠천만 원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5년 계약에 데뷔전의 대전료는 만 달러였고, 게임을 이겨 나갈수록 50%씩 증가해 나간다는 조건이었는데 상한액은 삼십만 달러였다.

대신 지면 동일한 조건으로 깎인다. 철저한 탑앤 업다운 방식으로 철저하게 능력에 따라 대전료를 책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챔피언에 올랐을 때는 별도 계약을 통해 대전료를 산정하는데 주변 여건과 흥행성을 감안한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최강철은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좋은 조건이다.

극동에서 내민 조건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자라 해도 터무니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참 동안 계약서를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들고 톰슨을 바라봤다.

“이것이 내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입니까?”

“미스터 최, 우리는 자네를 더 럼블의 미래라고 생각해서 최상의 조건을 제시했네. 뭐가 부족한 점이 있단 말인가?”

“나는 5년이란 장기 계약은 싫습니다. 3년으로 하시죠. 대신 그 기간 동안 일 년에 최소 5번을 싸우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음… 받아들이지. 하지만 재계약할 때의 우선권은 우리가 갖겠네.”

“또 한 가지, 나는 코치 둘을 데려갈 생각입니다. 내 전담 코치로 그들을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굴 말하는 것인가?”

“나를 지금까지 가르쳤던 윤성호 관장과 이성일 코칩니다.”

“미국에는 자네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줄 트레이너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을 마다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릴세.”

“선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에 맞는 트레이너들이 함께할 때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나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사람들이니 자격은 충분합니다.”

“허, 그것참.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윗선과 상의해 보겠네.”

“그들과 함께 살 집까지 마련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방금 내가 말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된다면 그때 도장을 찍는 걸로 하죠.”

톰슨이 계약서를 뜯어고쳐서 가져온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원했던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었기에 최강철은 두말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급했던 것일까.

더 럼블 쪽에서 계약금이 들어온 것은 계약서에 사인을 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야말로 총알같이 빠른 조치였는데 럼블 측에서는 최강철을 혹시라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통장에 들어온 돈을 바라보며 최강철은 한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계약금과 포상금으로 받은 금액을 합하자 무려 8천 5백만 원이나 되었으니 상당한 거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숨에 깔려 있는 무거움은 기쁨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 돈의 용도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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