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48화 (48/308)

[48]

* * *

한국의 아마추어 복싱은 아시아에서 최강이었다.

플라이급부터 주니어 웰터급까지 경량급과 가운데 중자를 쓰는 중량급은 아시아에서 한국을 상대할 팀이 없었다.

그러나 무거운 체급인 중량급부터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웰터급은 일본의 히로키에게 막혀 연일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 위 체급인 미들급부터는 국제 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못했다.

윤성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오늘 있을 경기를 위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잠 잘 잤냐?”

“푹 잤어요. 시험이 끝난 다음 바로 장거리 여행을 해서 그런가 정신없이 잤습니다.”

“잘했다. 오늘 상대할 놈은 필리핀 애야. 하도 이름이 이상해서 외우지도 못하겠던데 성적은 별로였어. 간단하게 잡아낼 수 있을 거다.”

“예선에서 경계해야 할 선수가 있던가요?”

“우리 쪽에서는 태국의 무앙수린이 있다. 그놈이 작년 킹스컵에서 우승했는데 펀치가 꽤 좋다고 알려졌더구만.”

“히로키는요?”

“히로키는 반대쪽에서 올라온다. 네가 무앙수린만 꺾으면 결승전에서 만날 것 같아.”

“좋네요?”

“뭐가?”

“그림이 좋잖아요. 예선에서 만나는 것보다 결승전에서 만나야 흥행이 되죠.”

“인마, 네가 프로냐. 흥행 따지게?”

“아마든 프로든 결정적인 순간 화끈하게 성적을 내줘야 사람들이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히로키는 결승에서 마주치는 게 좋아요.”

“음흉한 놈.”

“하하… 똑똑한 거죠.”

“하여간 조심해야 해. 히로키 그 자식이 봄에 있었던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알아요. 범 없는 곳에서 토끼가 날 뛴 것뿐입니다. 관장님, 혹시 세계 선수권하고 월드컵을 똑같은 수준으로 보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월드컵을 어떻게 세계 선수권하고 비교를 해. 그건 대륙 간 경기잖아. 대충 선수들 모아서 출전시키는 대회를 올림픽에 버금가는 세계 선수권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말이죠.”

“그래도 인마, 최선을 다해야 해. 히로키 그 자식은 만만한 놈이 아니야. 오죽하면 한국 킬러라고 불리겠냐. 유 사무장은 그놈 잡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더라. 그 사람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해.”

아시안게임에서 복싱은 예선을 포함해서 3일 동안 벌어진다.

준결승까지는 이틀 동안 끝내고 결승은 전 체급이 하루 만에 결판내는 방식이었다.

최강철은 3번의 경기를 KO로 장식하며 준결승에 올랐다.

폭풍 같은 전진.

수준이 떨어지는 아시아권 선수들은 최강철의 폭발적인 인파이팅을 견디지 못하고 퍽퍽 나가떨어졌는데 전부 2회전을 넘기지 못했다.

예상대로 준결승 상대는 태국의 무앙수린이었다.

그 역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태국 언론은 그가 킹스컵에서 우승한 전력을 떠들며 최강철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방방 뜨고 있는 건 일본 언론들이었다.

일본 언론은 히로키가 3연속 RSC로 상대를 압도하며 준결승에 진출하자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복싱의 영웅으로 탄생할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비록 한국에 최강철이란 강자가 있어도 히로키에게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워낙 한국 선수들에게 강했기 때문인데 예선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월드컵 우승 후 기량이 한층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은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웃었다.

놈들은 최강철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 히로키에게 당해왔으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최강철은 한국의 웰터급 역사상 독보적인 존재였고 차기 세계 챔피언으로 거론되던 마크 브릴랜드까지 쓰러뜨렸으니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봤을 때 히로키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 * *

“이봐, 김 상, 자네 나라에서는 최강철의 인기가 꽤 높다면서?”

“히로키보다 훨씬 높지.”

“에헤, 무슨 말이야. 히로키는 겐죠의 뒤를 이어 동양 챔피언이 확실시되는 친구라고. 비교할 걸 비교해. 일본에서는 히로키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일각에서는 현 동양 챔피언 겐죠보다 더 인기가 있다니까.”

동경신문의 마에다가 이제 막 링에 오르는 히로키를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항상 한국 선수를 박살 내온 히로키의 절대적인 팬이자 응원군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은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가소롭게 웃었을 뿐이다.

마에다와 김도환은 둘 다 복싱 전문 기자라 국제 대회가 있을 때마다 부딪쳐 온 사이였다.

비록 그가 일본인이었지만 워낙 자주 만났고 성격도 괜찮아서 몇 차례 식사와 술자리를 같이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히로키는 링에 올라 자신 있게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중이었다.

저 자식, 한국 웰터급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놈이었다. 오죽하면 전 국가 대표였던 마현석은 히로키를 한 번만 이길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을까.

마에다와 일본 언론은 아마추어 복싱 대회가 있을 때마다 히로키만 다뤘다.

다른 체급은 팡팡 나가떨어졌으나 한국 선수들을 박살 내며 우승을 차지하는 히로키를 한껏 치켜세워 한국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했다.

“김 상, 자네가 봤을 때 최강철과 히로키가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나?”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이 자식이 또 성질을 건드린다.

다른 때는 언제나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 꼭 이럴 때면 자신의 속을 박박 긁어왔다.

여러 번 같은 경험을 하면서 내기를 걸었다가 오천 원이나 잃었다.

대회 때마다 천 원씩 걸었으니 그동안 한국 선수들이 히로키에게 다섯 번이나 졌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할까?”

“해. 대신 오늘은 그동안 잃었던 거 전부 복구해야겠다. 오천 원 걸어.”

“좋지. 나도 자네 돈을 따먹을 때마다 부담이 됐다구.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또 미안해질 것 같아. 그러면 어쩌지? 오천 원이면 꽤 큰돈인데 말이야.”

“지랄 옆차기 하고 있네.”

“경험과 전통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야. 히로키는 유독 환국 복서들에게 강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이 자식아, 오천 원 말고 만 원으로 해. 네 말대로 정말 그렇게 되는지 두고 보자.”

“하하하… 화내지 말라구. 자넨 준결승부터 걱정해야 되는데 벌써 화내면 어떻게 하나. 최강철은 태국의 무앙수린부터 이겨야 해. 내가 알기로 무앙수린이 우승하면 태국 국왕이 엄청난 포상금을 준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최강철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거야. 왜냐하면 무앙수린이 죽기 살기로 싸울 거니까.”

* * *

최강철은 히로키가 결승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준결승에서도 RSC로 끝냈으니 벌써 4연속 RSC 승이다. 그만큼 일방적인 경기를 펼쳐왔다는 뜻이었다.

유광호는 그의 경기를 관전한 후 헐레벌떡 라커룸으로 들어와 입에서 게거품을 흘려냈다.

“아, 그 쌍놈의 새끼. 어째 예전보다 훨씬 세졌냐. 어이구, 미치겠네.”

“왜요?”

“상대한 놈이 한 대도 맞히지 못했어. 병신처럼 껄떡거리기만 하다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3번이나 쓰러졌다니까. 그 새끼, 아무래도 펀치력이 좋아진 것 같아.”

“그만하세요. 강철이 지금 경기 출전하려고 준비하는 거 안 보여요?”

유광호가 계속해서 히로키 이야기를 하자 윤성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고 무슨 마음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충분히 알지만 준결승을 치르기 위해 출전하는 선수에게 할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성호의 퉁방에 유광호의 입이 순식간에 닫혀졌다. 열이 받아 두서없이 떠들다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향해 최강철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사무장님, 진정하시고 경기나 지켜보세요. 사무장님 한은 제가 내일 예쁘게 풀어드릴게요.”

“하이고,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강철아, 준결승 일찍 끝내고 내려와라. 내가 저녁에 너 좋아하는 불고기 준비해 놓을게.”

링을 향해 다가가자 수많은 관중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대부분 인도 관중들이었지만 복싱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 선수단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경기를 끝냈거나 앞두고 있는 선수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이문영도 체조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최강철이 나타나자 이문영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저런 철부지 같으니라고.

링으로 걸어 들어가며 최강철이 입맛을 다셨다.

멀리 한국에서 날아와 자신의 경기를 중계 방송하기 위해 자리 잡고 있는 방송국 직원들도 보였다.

방송국에게는 복싱이 효자 종목이다.

준결승에 진출한 선수가 벌써 8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 하루 종일 복싱 중계만 하고 있었다.

국가 대표 복싱 감독을 맡고 있는 최철환이 먼저 걸어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윤성호와 최강철이 링에 도착하는 순간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강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의외로 많았다.

선수단은 물론이고 인도에서 활동하는 상사원들과 교민들까지 왔기 때문에 그 숫자가 100명이 훌쩍 넘었다.

링에 올라 기다리자 맞은편 코너에서 무앙수린이 나타났다.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무앙수린의 얼굴에 담겨 있는 비릿한 미소. 예감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목을 풀고, 팔과 다리를 쭉쭉 뻗어 몸을 이완시켰다.

예감은 좋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무앙수린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강철아, 처음 붙는 놈이니까 사이드로 돌면서 천천히 하자. 저 새끼 왜 자꾸 웃는 거야. 기분 나쁘게시리.”

“원래 태국 사람들은 저렇게 웃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꼭 어려운 것만 묻더라.”

“관장님은 만능이잖아요. 요리도 잘하고.”

“이 자식아, 농담하면서 긴장을 푸는 건 좋은데 내 속은 긁지 마라. 이젠 다시는 너 밥 안 줘!”

“에이, 왜 이러세요, 사내대장부가. 관장님은 너무 잘 삐지는 게 단점이야.”

“꼭 명심해.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알았습니다.”

심판이 부르는 걸 본 최강철이 순순히 대답하고 링 중앙으로 나갔다.

윤성호의 말은 타당하다.

준결승까지 올라왔으니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고 섣불리 상대했다가는 자칫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권투란 경기는 언제나 변수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는 야수다.

야수는 먹이를 사냥할 때 덥석 물지 않고 끊임없이 기다렸다가 결정적 순간에 목 줄기를 뜯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링은 내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쉬익!

경기가 시작되자 최강철은 스텝을 이용해서 오른쪽으로 돌며 레프트 잽을 던졌다.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간 레프트 잽이 가드를 바짝 올린 무앙수린의 글러브를 젖혔다가 돌아왔다.

무앙수린은 왼손잡이였는데 가딩이 매우 좋았다.

연속되는 레프트 잽에 이어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강하게 꽂히며 접근해 오는 무앙수린을 밀어냈다.

1라운드에서는 간만 본다. 어떤 작전을 가지고 나왔는지 확인하고 나서 죽일 생각이다.

무앙수린은 빠르지 않았으나 불곰처럼 우직하게 파고들며 펀치를 날려 왔다.

상대를 몰아넣는 기술이 뛰어났다. 스텝은 빠르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방향 선회와 압박이 훌륭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그의 압박을 풀어내며 점수를 차근차근 쌓아갔다.

비록 탐색전을 펼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나 무앙수린 정도의 스피드라면 아웃복싱만으로도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가 생긴 것은 1라운드를 30초 정도 남겼을 때였다.

천천히 압박 전술을 펼치던 무앙수린의 스텝이 갑자기 빨라지며 뒤로 빠지는 최강철의 얼굴을 향해 강력한 레프트 훅이 날아왔다.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었으나 반사 신경을 이용해 더킹으로 피했다.

하지만 무앙수린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몸을 링 줄로 밀며 대시해 왔다.

강하고 무자비한 연타가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놈은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발톱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균형을 잃은 상태였으나 방어 기술을 가동해서 펀치를 피하고 링의 반동을 이용하며 사이드로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분명히 펀치는 다 피했는데 뭔가가 자신의 눈에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심판이 급하게 다가와 무앙수린을 떼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의적이다. 놈은 자신의 빠른 발을 잡기 위해 펀치가 전부 빗나가자 근접해 있던 자신의 눈을 머리로 박은 것이 분명했다.

하아, 이 씨발 놈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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