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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47화 (47/308)

[47]

여자한테 빠져? 내가?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돌아온 인생인데 섣불리 여자에 빠져 허우적댈까.

이문영의 접근을 그대로 방치한 것은 돌아온 후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 대하여 여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즐거웠다.

이런 즐거움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설렘과 이성의 향기로 인해 솟아나는 활력은 고된 훈련과 공부로 지친 몸을 어루만져 주는 청량제였다.

그래, 이런 여유, 이런 즐거움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 * *

“오늘도 데이트했냐?”

“데이트 아닙니다.”

“자식이, 내숭은. 데이트가 별거냐. 매일 붙어서 알콩달콩 하면 데이트지?”

“관장님, 문영이는 그냥 친구라고요!”

“남자하고 여자는 그냥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생각해 봐라. 같이 있으면 만지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그리고 으응… 그런데 친구가 어떻게 되냐? 개풀 뜯어먹는 소릴 하고 있어.”

“하여간, 관장님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니까. 왜 왔어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성호를 향해 연필을 내려놓으며 최강철이 가자미눈을 만들었다.

그러자 윤성호가 비실비실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최강철은 독방을 썼다.

저녁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윤성호가 선수촌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얻어낸 것이었다.

2인실이었지만 방은 그리 크지 않아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장이 전부였다.

“내일 불암산 달리기가 있다는 말 들었지?”

“그런데요?”

“선수촌장님이 1등 한 팀한테 저녁 회식 비용으로 10만 원을 쏜단다. 어쩔래?”

“저보고 1등 하라고요?”

“우리 복싱단 전통이 막내가 1등하는 거라더라. 그러니까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어.”

“저는 안 되겠는데요. 내일 문영이랑 같이 뛰기로 했어요.”

“지랄한다. 이 자식이 아주 푹 빠졌구만.”

“빠져서 그런 게 아니라 걔가 다리 아프다네요. 어차피 1등은 우리가 맡아놨잖아요. 누가 복싱단을 이기겠어요.”

“그래서 안 할 거냐?”

“성길이 형한테 부탁해 놓을게요. 그리고 관장님 눈에는 공부하는 거 안 보이세요. 이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어이구.”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시험 때까지 훈련을 오전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정 좀 봐줘요.”

“난 도대체 네 속을 모르겠다. 권투하는 놈이 대학 가서 어쩌려고 그래?”

“입학한 후 곧바로 휴학하고 미국으로 떠날 거라고 몇 번을 말해요. 공부는 꿈을 이루고 돌아와서 할 겁니다. 관장님도 이제 서서히 준비해 놓으세요.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꿈을 이룰 날이 말입니다.”

* * *

다음 날 아침.

태릉선수촌의 전통인 불암산 달리기가 시작된 것은 정확하게 오전 10시였다.

이미 운동장에는 60여 명의 선수가 출발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옆으로 슬쩍 다가온 문성길은 체육복을 입은 채 운동장으로 나온 최강철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나중에 꼭 갚아. 알았어?”

“예.”

“인마, 뭘로 갚아야 할지 안 물어봐?”

문성길이 눈살을 올리며 묻자 최강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속셈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게 뭔데요?”

“흐흐… 나도 같이 행복해 보자. 네 여자 친구한테 한 명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 좀 해주라.”

“그건 안 되겠는데요. 형 얼굴 가지고는 힘들어요.”

“이 자식아!”

“크큭… 말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대답을 해주자 문성길이 날아갈 것처럼 출발선으로 뛰어가는 걸 보며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자신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이니 아직도 새파란 청춘이다.

이제 20살에 불과한 청춘은 그 누구든 사랑을 꿈꾸며 좋은 사람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는 법이다.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처럼 이문영이 나타났다.

아주 잠깐 언덕에서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미 선수촌에서는 소문이 다 났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이 붙어 있자 운동장에 모여 있던 선수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처음부터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1등을 하려는 마음이 없으니 이문영의 부탁대로 그녀와 같이 뛰며 천천히 불암산을 오를 생각이었다.

선수들은 호각이 울리자마자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모든 선수의 마음에는 경쟁심이란 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뒤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건 이문영도 마찬가지였는지 산책하듯 가자던 말과 다르게 열심히 뛰었다.

아무리 뛰어도 최강철에게는 산보 가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한 건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올 때였다.

말이 씨가 된 것처럼 바위를 헛디딘 이문영이 넘어져 발목을 접질렸는데 일어나지 못했다.

하아, 어이없는 일이다.

최강철은 넘어져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문영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손조차 잡지 못하게 만들더니 이제 와서 일부러 넘어져 아파죽겠다며 자신에게 업어달라는 이유 말이다.

다가가 등을 대자 이문영이 살포시 업혀 왔다.

긴장감 때문인지 아프다던 비명은 사라졌고 대신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모든 선수가 내려갔기 때문에 주변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속임수를 알면서도 속아준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잘 속는다고 믿었으나 그건 단순한 여자들의 생각일 뿐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금처럼.

이문영을 업고 산책하듯 내려왔다.

어차피 순위는 상관없었으니 괜히 여자를 업고 무리를 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런 불상사도 없기 때문이다.

최강철이 걸음을 멈춘 것은 산을 거의 내려온 능선에 도착했을 때였다.

능선에는 사람들이 전부 보였는데 아직 내려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면서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가볍게 몸을 푸는 중이었다.

“이제 내려.”

“조금 더 가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계속 꾀병 부릴 생각이야. 너 남자 등에 업혀서 사람들 앞에 나가면 시집 못 간다.”

“알고 있었어?”

“내가 바본 줄 아냐. 얼른 내리기나 해. 저 사람들, 우리 때문에 해산 못 하잖아.”

“칫, 알았어.”

눈치도 빠른 여자다. 웬만한 여자는 속인 게 들통 나면 오리발부터 내밀었을 텐데 이문영은 즉시 내린 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우다.

남자 등에 업혀 유람 다녀온 것처럼 편하게 와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으니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불여우가 분명했다.

최강철은 선수단이 퇴촌하는 것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선수단은 3일 후 뉴델리로 떠나지만 그는 학력고사를 치른 다음 떠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가 오랜만에 돌아오자 가족들이 전부 몰려나와 반겼다.

특히 집에는 강원도에서 장기 하사로 근무하는 둘째 형이 휴가를 나와 있었는데 최강철을 보자마자 품에 안고 놓지를 않았다.

작은 형은 군대에 말뚝을 박기 전까지 그와 친구처럼 지내며 사이좋게 지냈다.

둘째 형은 집안의 커다란 우환거리였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아버지의 근심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학력고사를 위해 마무리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꾸준히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자신은 있었으나 시험이란 것은 언제나 긴장감을 준다.

어머니가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간 최강철을 붙잡은 것은 시험을 일주일 정도 남겨놨을 때였다.

어머니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엄마, 왜 그러세요?”

“강철아… 강철아, 권투 그만두면 안 되겄냐?”

“무슨 말씀이세요?”

최강철이 물으며 의아한 듯 물어보자 안방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는데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권투를 혀. 사람 잡는 권투를 왜 하냔 말이여. 지발 그만둬. 응, 그거 하지 마!”

사람 잡는 권투란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무슨 이유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며칠 전 세계 타이틀전에서 링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김득구 선수가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안 맞고 잘할게요.”

“안뎌, 나는 니가 누구 때리는 것도 싫고 맞는 것도 싫다. 그러니 지발 그만둬. 강철아, 엄마 말 좀 들으면 안 되겄냐. 이눔아, 그러다… 그러다 잘못되면 워쩌!”

“…엄마.”

“이눔아, 누군 죽고 싶어서 죽는다냐.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싸우다 죽는 거지. 내가 너 거기 갔을 때 핵교에 댕겨왔어. 너네 선생님도 그러더라. 강철이 정도면 좋은 대학교 가서 잘살 수 있다고 혔어. 그런데 뭐 하러 그 짓을 혀.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권투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이 커다란 충격과 불안을 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헛기침만 하고 있다가 어머니가 최강철의 팔을 붙들고 소리를 높이자 슬그머니 나서서 말렸다.

“그만혀. 저도 생각이 있지 않겄어.”

“뭘 그만해유. 당신은 우리 아덜이 죽어도 괜찮아유. 여태꺼정 그렇게 야기해 놓고 그런 소리를 하면 워쩌유!”

“그럼 워쩌. 시험 끝나면 금방 떠나야 하는 눔한테 지금 그런 야기를 하면 쟈는 어쩌라고. 내가 뭐라고 그랬어. 시합 댕겨오면 그때 야기하자고 그랬잖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쥬, 불안해서……. 거기 가서 큰일 나면 어쩌유. 우리 아덜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덜이잖아유.”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마치 아기 사슴의 울음처럼 뾰족하게 방 안을 적셨다.

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먹먹하다.

최강철은 그저 다가가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예전의 그 앙상했던 가슴이 아니라 운동으로 인해 떡 벌어진 가슴은 이제 어머니를 충분히 안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알아요, 어머니.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바보 같은 삶을 살면서 어머니를 버리는 짓을 다시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과 걱정 어린 한숨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고사장으로 정해진 고등학교에 도착하자 수많은 현수막과 피켓이 나부꼈다.

각 학교의 후배들은 선배들이 시험을 잘 치라며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정문에는 학부모들이 붙여놓은 엿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차분히 고사장에 들어가 시험을 쳤다.

이 또한 권투 못지않게 내가 준비한 것이었고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였다.

“강철아, 잘 봤냐?”

“예, 선생님.”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담임선생인 박문기는 추위로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최강철이 나오자 부리나케 뛰어와 결과부터 물어봤다.

최강철의 담담한 대답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그는 최강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마디만 가지고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최종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제자의 얼굴과 표정에서 자신감을 읽은 그의 얼굴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봄 햇살처럼 활짝 펴졌다.

그래, 그런 거지.

사람들은 모두 걱정을 지닌 채 살아간다.

아들이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모님도,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담임선생님도, 그리고 저기 모여 자식들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삶의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걱정거리를 품은 채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 * *

부모님과 이성일, 학교에서 나온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아마추어 세계에서는 마지막이 될 아시안 게임을 정복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지 얼굴을 비추고는 곧장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돌아가셨다.

뉴델리까지의 비행시간은 9시간이나 되었기에 내일 당장 벌어지는 예선에 지장이 있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루한 비행이 끝나고 뉴델리 공항을 빠져나오자 그를 픽업하기 위해 윤성호와 유광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광호는 이번에도 선수단을 지휘하기 위해 왔는데 게이트가 열리며 최강철이 모습을 드러내자 막냇동생 반기듯 달려왔다.

“오느라고 고생했지?”

“아니에요.”

“시험은 잘 봤냐?”

“그냥저냥 봤습니다.”

“그래, 그까짓 시험이 뭐가 문제겠냐. 얼른 가서 쉬자. 당장 내일이 시합인데 컨디션 조절조차 못 해서 큰일이다.”

“괜찮을 겁니다. 우리 강철이는 그야말로 강철 같은 놈이거든요. 더군다나 내일은 약한 선수와 붙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예요.”

옆에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성호가 대신 대답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최강철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윤 코치, 왜 그래, 뭔 일 있어?”

“저 자식이 나를 먼저 가라고 등 떠밀었다니까요. 시합 전날까지 오면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냉정하게 잘랐다고요. 완전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놈입니다.”

“어이구.”

기가 막힌 듯 유광호가 앓는 소리를 냈으나 윤성호는 여전히 최강철을 잡아먹을 것처럼 째려보며 침을 튀겨댔다.

“그동안 나 없이 밥은 잘 처먹었냐. 난 이 자식아, 네가 없어서 그런지 며칠째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

“관장님이 해주는 밥보다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이 더 좋죠. 얼굴 봐요. 피둥피둥 살이 올랐잖아요.”

“그런 자식이 왜 맨날 체육관에 와서 처먹었어!”

“그거야, 당연히… 공짜니까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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