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문성길이 링 위에 올라 손짓하는 순간, 국가 대표 코치진은 물론이고 개별 훈련을 하던 선수들이 행동을 멈추고 몰려들었다.
문성길과 최강철은 한 살 차이에 불과했다.
대표 팀에서는 막내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용하게 훈련만 하던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역량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무시무시했다.
물론 체급은 달랐으나 아마추어 복싱에서 그들은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영웅들이었다.
문성길의 KO율은 80%를 훌쩍 상회했기 때문에 밴터급에서는 하드 펀처로 유명했고 한국형 탱크라 불리며 상대들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최강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최강철의 아마추어 전적은 지금까지 33전승에 32KO승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장본인이었다.
문성길이 링 위에 올라 기다리자 최강철이 윤성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겠냐는 시선이었으나 윤성호는 여유 있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여 링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뭐야, 이거.’
그의 신호를 받으며 최강철이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한 스파링이 아니라 도발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의 성격상 체급이 다르다고 해서 봐준다거나 대충할 생각이 없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코치진이 주시하는 걸 보면서 최강철은 천천히 글러브를 끼었다.
그러고는 링 위에 올라가 문성길과 마주 섰다.
“형, 진짜 할 겁니까?”
“오래전부터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너와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붙어보겠냐.”
“다칠지도 모릅니다.”
“이 자식아, 권투 선수가 맞는 걸 두려워하는 거 봤어? 나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걱정해. 비록 내가 체중은 적게 나가지만 맞으면 아플 거다.”
“좋습니다. 해보죠.”
글러브를 팡팡 두드리며 눈빛을 세우는 문성길을 향해 최강철이 입꼬리를 올렸다.
스파링도 시합이다. 비록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그 누군가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게 되는 순간 시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난 승부가 시작되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
공이 울리는 순간 문성길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빠르다. 하긴 단순히 주먹만 셌다면 주먹 하나로 천하를 호령했을까.
문성길의 스피드는 웰터급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는데 펀치의 스피드도 대단했다.
최강철은 신장과 리치에서 차이 나는 문성길의 공격을 받아내며 방어에 집중했다.
얼마나 강한 펀치를 가졌는지 어떤 테크닉으로 상대를 무너뜨려 왔는지 보고 싶었다.
문성길은 타고난 인파이터였다.
이전 스파링에서도 그랬지만 상대의 펀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탱크처럼 전진해서 상대를 박살 내는 스타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리치 차를 극복하기 위해선지 문성길은 최강철의 품으로 뛰어들어 와 마음껏 주먹을 날렸다.
폭발적인 콤비네이션.
문성길의 펀치는 주 무기인 훅과 별 차이가 없는 스트레이트의 연사부터 시작되었는데 과감하게 레프트 잽을 생략하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강력하고 빨랐기 때문에 같은 체급의 선수들이었다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최강철은 파고드는 문성길의 공격을 받으며 위빙과 더킹, 스토핑과 패링까지 선보이며 펀치를 흘려냈다.
주먹이 근질거렸으나 참았다.
시시때때 나타나는 바늘 끝 같은 허점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이번 라운드는 문성길의 공격을 받아주기만 할 생각이었다.
“야, 정말 좋다. 방어 기술이 죽여주는구만.”
“형, 주먹이 워낙 세서 간신히 막았어요.”
“한 라운드만 더 부탁해. 지금까지 한 것처럼 주먹 내지 말고 몇 대 더 맞아줘. 그러고 나서 네 펀치를 구경하자.”
1라운드가 끝나자 문성길이 웃으며 말했기에 최강철은 실소를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스텝을 멈춘 상태에서 문성길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최대한 방어 기술을 펼쳤지만 얻어맞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문성길의 펀치는 매서웠고 천부의 반사 신경이 있어도 피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하지만 그의 주문대로 한 라운드를 더 방어에 치중하면서 보냈다.
줄 때는 홀딱 벗고 주라는 말이 있었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훈련도 되었다.
가슴 속으로 바짝 파고들어 미친 듯이 콤비네이션을 터뜨리는 문성길의 펀치는 지금까지 익혀온 방어 기술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네. 실컷 팼더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다. 여기에 와서 이렇게 신나게 펀치를 날린 건 처음이었거든. 강철아, 이제 네 꼴리는 대로 해봐.”
“아플 겁니다.”
“이 자식아, 그렇다고 죽이지는 마라.”
체급이 다르다는 건 신체가 다르다는 걸 의미하고 펀치력과 리치 면에서 월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최강철은 지금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부숴온 사람이었다.
쐐액!
3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최강철의 레프트 잽이 화살처럼 날아가 접근하는 문성길의 안면에 꽂혔다.
급하게 가드로 흘려내기 위해 애를 썼으나 최강철의 레프트 잽은 그의 가드를 무력화시키며 단박에 균형을 무너뜨렸다.
스텝을 쓰기 시작했다.
문성길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주기 위해 사용하지 않던 스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자 최강철의 몸이 빠르게 링을 누비기 시작했다.
밴텀급의 스피드를 무색할 정도로 빠른 스텝.
링을 돌면서 던지는 최강철의 레프트 잽은 공간을 가르고 지나 정확하게 문성길의 접근을 차단했는데, 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대단한 맷집을 지녔다는 문성길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시작은 레프트 잽이었으나 곧 최강철의 펀치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완벽하게 가드를 올린 문성길의 전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온갖 방어 기술을 동원해서 펀치를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피지컬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 문성길의 몸은 최강철이 공격할 때마다 강가의 수초처럼 연신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대시하며 펀치를 날려 왔다.
역시 탱크라 불릴 만하다.
힘을 뺀 상태에서 날린 펀치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스냅이 들어갔기 때문에 충격이 컸을 텐데, 문성길은 맞으면서도 접근전을 펼치기 위해 전진 스텝을 밟았다.
최강철이 윤성호를 슬쩍 바라본 것은 이 스파링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외곽으로 돌면서 아웃복싱을 통해 펀치를 쏟아내는 순간부터 최강철은 문성길의 공격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거리 싸움에서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강철의 스텝은 문성길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어쩌다 근접된 펀치들도 전부 스토핑과 패링, 암 블로킹에 차단당했다.
최강철이 외곽으로 돌던 스텝을 멈추고 대시해 들어오는 문성길을 향해 폭풍 같은 콤비네이션을 터뜨렸다.
들소처럼 돌진해 오던 문성길의 몸이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전환한 최강철의 펀치 세례에 의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보여준다.
마크 브릴랜드를 무너뜨린 후 1년 동안 진화된 자신의 콤비네이션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생각이다.
치기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다.
단 하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건 그 누구도 나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투지였다.
“그만해, 이 자식아. 아파죽겠어.”
코너에 몰려 정신없이 얻어맞던 문성길이 몸을 돌리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온몸을 웅크린 채 방어만 하다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지 링 줄에 기댄 채 숨을 헐떡거렸다.
“무식한 놈아, 너 내가 몇 대 때렸다고 이럴 수 있냐? 아무리 그래도 봐주면서 해야지. 너랑 나랑 체급이 다른데 이럴 수 있어!”
“권투 선수는 맞는 게 두렵지 않다면서요.”
“인마, 그건 그냥 해본 소리지. 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아이고, 머리야.”
글러브를 벗으면서 문성길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턱을 만졌다.
1, 2라운드 때 자신이 때린 것보다 훨씬 많은 펀치를 맞았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안다.
최강철은 펀치에 힘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게임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여러 번 그로기에 몰려 허우적댔다.
맷집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최강철의 면도날 같은 펀치를 맞고 견딘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무서운 놈이다.
화려한 전적과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세계 선수권대회에 우승했다는 것 때문에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가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체급이 차이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은 체급이었다 해도 최강철과 붙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놀란 사람들은 링 사이드에서 두 사람의 스파링을 지켜본 코치진과 선수들이었다.
김동길과 정용범을 상대로 스파링하는 걸 보면서도 혀를 내둘렀지만 최강철이 작정한 듯 문성길을 향해 콤비네이션을 쏟아내자 소름이 다 돋았다.
펀치에 힘을 빼고 친다는 것이 눈에 보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강한 맷집을 자랑하던 문성길이 수시로 그로기에 몰렸다.
그때마다 최강철이 펀치를 회수하지 않았다면 문성길을 벌써 캔버스에 누워서 사경을 헤맸을 것이다.
“성길이가 임자 만났네. 죽다 살아났어.”
“그러게 왜 건드려. 저 자식은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그렇지, 선배를 저렇게 쥐 잡듯 잡냐. 아휴, 살 떨려.”
김동길이 먼저 말하자 보고 있던 허영모가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마구 쓰다듬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얻어터진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지만 말과는 다르게 문성길을 동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와 문성길은 한 체급 차이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붙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 * *
이문영은 매일같이 최강철이 앉아 있는 언덕으로 나왔다.
가끔가다 오던 윤성호의 발걸음이 끊긴 것은 오로지 그녀 때문이었다.
그는 한시도 최강철이 없으면 불안했기 때문에 자주 언덕에 와서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그녀가 나타난 이후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문영은 최강철의 옆자리에 앉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문성길 선수하고 스파링했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이게 뭔 줄 아니? 바로 부처님 손바닥이야.”
최강철이 의문을 가지고 쳐다보자 이문영이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눈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이문영은 훈련하는 것보다 자신이 뭐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다.
분명 저녁 식사 하면서 선수들이 떠들었던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
“그 손바닥 크기도 하네. 한번 만져봐도 돼?”
“어머, 이거 왜 이러세요. 숙녀 손을 함부로 만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말고.”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떠는 이문영의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이 피식 웃었다.
왜 그랬을까.
앞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조그맣고 부드러운 손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문영은 최강철의 웃음을 보면서 마주 웃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후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이라도 하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 저녁에 공부한다면서?”
“응.”
“정말 전교 수석 한다는 거 맞아?”
“누가 그러디?”
“그 소문 듣고 물어봤더니 윤 코치님이 줄줄 이야기해 주더라. 정말 특이한 놈이라면서.”
“하여간 그 양반, 입이 싸도 보통 싸야지. 특이한 놈은 아냐. 그냥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특이한 거 맞아. 복싱하면서 전교 수석을 한다는 게 특이하지 않으면 뭐가 특이해.”
“그런가?”
“너 정도면 공부 안 해도 대학교에 갈 수 있잖아.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어?”
“좋은 대학교 가고 싶어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교 가면 좋잖아.”
“쳇, 말도 안 돼.”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이미 갈 학교 정해져 있어. 체육 특기생으로 갈 거야. 내가 이쪽 세계에서는 좀 하거든.”
“어디?”
“안 가리켜 줘. 비밀이야.”
“별게 다 비밀이다.”
또다시 웃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국가 대표란 타이틀이 있으니 분명 서울의 명문 대학교에 콘택트가 되었을 것이다.
“강철아, 내일 그거 한대.”
“뭐?”
“불암산. 아휴, 미치겠어. 왜 그런 걸 하는지 몰라.”
“좋잖아. 체력 단련도 되고.”
“여자한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난 힘들어 죽을 거야. 불암산이 얼마나 높은데 거기까지 뛰어갔다 오냐고!”
이문영이 말과 똑같은 표정을 만들었다.
정말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불암산 달리기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선수들을 상대로 남녀 가리지 않고 시행하는 행사였다.
태릉선수촌이 생긴 이래 전통처럼 해오는 행사였기 때문에 열외는 한 명도 두지 않았다.
경쟁. 맞다, 경쟁을 통한 투지를 키우기 위함이다.
각 종목의 선수들은 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전력을 다했는데 1위로 도착하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했다.
“강철아, 나 내일 가다가 쓰러지면 좀 업어줘. 그래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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