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 * *
3학년 담임선생 박문기는 역사를 가르쳤다.
그의 별명은 불도그로 통했으나 워낙 학생들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최강철이 대표 팀 소집에 응하기 위해 교무실로 인사차 들어가자 박문기의 안색이 잔뜩 흐려졌다.
그로서는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교 수석, 그것도 정문고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최강철이 학력고사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태릉선수촌에 들어간다는 것은 담임선생으로서 절대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최강철은 서울대에 근접한 놈이었다.
정문고의 역사는 30년이나 되었지만 지금까지 서울대에 진학한 졸업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었다.
“강철아, 앉아라.”
“예, 선생님.”
“나는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부를 잘하든지 권투를 잘하든지 둘 중 하나만 잘했으면 얼마나 좋아. 정말 답답하구나.”
무슨 말인지 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강철아, 너는 정말 뛰어난 놈이다. 뭐를 해도 성공할 놈이야. 하지만 선생님은 네가 공부하기를 원해. 권투는 반짝하다가 그만이지만 서울대를 가서 열심히 하면 넌 평생 동안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어.”
“압니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이냐. 이런 중요한 시간에 한 달 반이나 공부를 하지 못하면 결국 네 인생 전부를 실패하게 될지도 몰라. 그까짓 금메달 따서 뭐 한단 말이냐. 너 같이 똑똑한 놈이 정말 프로로 가서 피터지게 주먹질을 하겠다는 거야?”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길도 명확하게 서 있고요. 맞아요, 저는 프로로 전향해서 돈을 벌 생각입니다.”
“왜, 부모님 때문이냐?”
“부모님은 저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죠.”
“대학은 어쩌고!”
“거기서도 틈틈이 공부할 생각입니다. 저는 권투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서울대에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음…….”
최강철이 대답했으나 박문기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서울대는 전국에서 날고 기는 놈들만 모이는 곳이라 아무리 최강철이라 해도 전력을 다해 공부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 * *
뉴델리 아시안게임은 야구, 농구, 축구 등 23개 종목을 겨루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아시안게임은 일본의 독무대였다.
일본은 지금까지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해 왔는데 거의 전 종목을 석권해 왔다.
체육부에서 이번 대회만큼은 일본을 제치고 1위를 해야 한다며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은 스포츠 쪽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정부의 방침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복싱과 양궁, 수영, 유도 등에서 강세를 보여 다른 종목에서 선전만 해준다면 1위라는 꿈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최강철은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리고 태릉선수촌으로 떠났다.
인도 뉴델리로 출발하기 전 잠깐 다시 들르겠지만 한 달 반이란 긴 시간 동안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걱정하는 눈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번 아시안게임을 대비해서 태릉선수촌으로 들어 온 종목은 복싱과 유도, 레슬링, 역도, 체조 등 5개 종목뿐이었다.
다른 종목들은 태릉선수촌이 워낙 좁아 별도로 지정된 장소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23개 종목이나 되다 보니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태릉선수촌의 정문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윤성호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이 자식아, 왜 이렇게 늦었어. 30분이나 기다렸잖아!”
“버스가 어디 제 맘처럼 움직이나요. 시내에서 조금 막혔고 차 갈아타느라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어요.”
“하여간 잘 왔다. 들어가자.”
윤성호가 팔을 번쩍 들어 최강철의 어깨에 올려놨다.
나름대로 반가움의 표현이었겠지만 작은 키의 그가 팔을 올려놓고 걷자 마치 딸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를 배정받은 후 먼저 들어와 훈련받고 있는 선수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거기에는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만났던 김동길과 허영모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머지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도 최강철은 막내였다.
가운데 있던 선수가 불쑥 나서서 입을 연 것은 최강철이 운동 장비를 챙겨 훈련을 준비할 때였다.
“반갑다. 나는 문성길이야. 네가 그렇게 잘 친다며?”
“열심히 하다 보니 성적이 좋게 나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성격도 싹싹하고 좋네.”
“고맙습니다.”
“앞으로 너는 물 당번이다. 훈련 끝나면 청소는 기본이고. 알지?”
“예.”
“원래 막내는 그런 거니까 억울해하지 마라. 네가 없어서 지금까지 내가 전부 했거든. 힘들더라도 참아. 시간 날 때마다 도와줄게.”
“예.”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최강철이 웃음을 지었다.
돌주먹 문성길.
한국 복싱 역사상 탑5에 들어갈 정도로 펀치력과 테크닉을 보유한 그는 세계 챔피언까지 지낸 천재 복서였다.
여기서 그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보게 되자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인상이 나쁘지는 않다.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그의 성격은 사내다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 * *
선수들의 땀은 진하다.
하루 종일 금메달을 목표로 뒹구는 그들의 땀은 소금기에 젖어 더없이 짰다.
국가 대표 코치진이 마련해 놓은 훈련 스케줄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아침 7시에 기상해서 1시간 동안 로드워크로 하체를 단련했고 아침을 먹은 후 근력 강화 운동과 섀도복싱, 산악 체력 훈련을 소화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코치진과 함께 실전 훈련을 시행했는데 코치들이 돌아가면서 공격과 방어 능력 향상을 위해 집중 조련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후 5시가 되면 모든 일과가 끝나고 휴식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갔으나 최강철은 일과가 끝나면 저녁을 먹은 후 공부를 했다.
피지컬이 완성 단계에 들어서면서 그의 체력은 살인적인 훈련에도 꼿꼿하게 버틸 만큼 강해져 있었다.
뉴델리로 출발하기 전날 학력고사를 봐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공부해 왔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복습했다.
그런 최강철을 보면서 선배들은 괴물이라 불렀다.
태릉선수촌에 들어와 유일한 즐거움은 체조 선수들을 본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남자 체조 선수들과 같이 훈련했는데 일과가 달랐기 때문에 다른 종목 선수들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식사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부딪혔다.
예쁘고 늘씬하다.
다른 종목도 아니고 체조라 그런지 여자들의 몸매는 예술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선배들은 여자 체조 선수들을 볼 때마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부 총각들로 구성된 그들은 마치 군대에 온 사람들처럼 식사 시간이 될 때마다 넋을 잃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최강철이 이곳에 와서 가장 좋아한 시간은 저녁을 먹은 후 운동장이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상상이자 계획이다.
미래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상상이겠지만 최강철에게는 구체적인 계획이었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오늘따라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갖가지 문양의 구름들이 노을을 맞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했고 산은 붉게 타오르며 자신의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뒤편에서 갑작스럽게 음성이 들려온 것은 노을에 시선을 맞춘 채 인천에 있는 큰누나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큰누나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사람 중 하나였다.
언제나 푸근한 마음으로 자신을 감싸주었고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위로하며 언제나 가슴 아파 했다.
“오늘도 여기 있네요?”
청아한 음성. 여자다.
의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노을을 고스란히 맞으며 다가온 여자가 보였다.
이런…….
이문영이다. 체조 국가 대표 선수 중 가장 예쁘고 늘씬해서 선배들은 물론이고 선수촌에 들어온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여자라고 불리기엔 뭐 하다. 아직 고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와 나이가 같다.
“아, 나를 압니까?”
궁금했다. 그녀의 질문 속에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럼요. 노을 속의 남자. 제법 멋있잖아요. 이름이 최강철 맞죠?”
“그렇긴 한데…….”
막상 여자가 다가와 말을 붙이자 혼란스러움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돌아와 살면서 가족들을 제외한 여자와 대화를 한 건 미팅 때 잠시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다. 더군다나 서 있는 몸의 굴곡이 너무 완벽해서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시 앉아도 돼요?”
“그러세요.”
최강철이 엉덩이를 밀어 자신의 옆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자 이문영이 살며시 다가와 자리를 차지했다.
“저는 이문영이에요, 체조 선수. 아시죠?”
“예?”
내가 어떻게 알아. 식당에서 본 게 전부인데.
질문에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눈꼬리를 살며시 치켜 올렸다.
“알 텐데요. 식당에서 계속 봤잖아요.”
“그건… 선배들이 하도 예쁘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강철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디 예쁜 여자가 흔한가요.”
“솔직해서 좋네요.”
최강철의 대답을 들은 이문영의 시선이 노을 쪽으로 향했다.
그런 후 손가락을 들어 하늘 한쪽에 차지하고 있는 구름을 가리켰다.
“저 구름은 꼭 양 떼 같아요. 맞죠?”
구름은 보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그녀의 눈에는 가리킨 구름이 양 떼를 닮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최강철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바짝 다가와 앉은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풍겨 나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몸은 더없이 싱싱했고 더없이 주책맞은 청춘이었다.
“복싱 선수라면서요?”
“예.”
“엄청 유명하다던데 왜 나만 몰랐지.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운이 좋았습니다.”
“호호… 아직 나이도 어린 사람이 겸손까지 하네. 고3이죠?”
“예.”
“나도 고3이에요. 우리 친구 하는 거 어때요? 선수촌에 들어와서 혼자 지내다 보니 심심하거든요.”
“거긴 비슷한 나이들이 많을 텐데?”
“걔들은 여자죠. 강철 씨는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가 똑같다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설렘이 없잖아요, 설렘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하는 거야.”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의 얼굴이 더없이 귀여웠다.
안아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최강철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기만 했다.
루시퍼, 이놈. 나에게 보너스로 여복도 준 걸까?
* * *
국가 대표 코치진의 최대 고민은 실전 훈련이었다.
근력 강화 운동과 체력 단련은 정해진 스케줄에 의해 지속적으로 해왔고 공방에 필요한 세세한 기술들도 상승시켰지만, 실전을 통한 경기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스파링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코치들이 고안해 낸 것이 한 체급 위의 선수들과 스파링을 하는 것이었다.
스파링은 시합이 아니기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지만 경기 감각을 끌어 올리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최강철이 상대한 사람은 주니어 웰터급의 김동길과 미들급의 정용범이었다.
실전 훈련으로 들어가자 즐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비록 전력을 다하는 건 아니었으나 김동길과 정용범은 뛰어난 테크닉과 펀치력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이 익힌 기술들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었다.
3라운드의 스파링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김동길과 정용범은 혀를 내둘렀다.
최강철의 공격과 방어가 너무 뛰어나 스파링에 불과했는데도 녹초가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전혀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스파링 훈련을 시작한 지 10일이 지났을 때 발생했다.
밴터급의 문성길이 최강철과 스파링을 하고 싶다며 글러브를 꼈던 것이다.
“정문이가 감기가 들려서 훈련할 수 없단다. 강철아, 오늘 네가 한번 상대해 줘.”
변명은 페더급의 박정문이 아파서 스파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자신의 주먹을 마음껏 던지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성길은 돌주먹이라 불릴 만큼 강한 주먹을 가지고 있어 바로 위 체급과 스파링을 하면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뭐, 겁나면 안 해도 돼. 내 주먹이 워낙 세서 말이야.”
문성길의 도발에 최강철은 웃지 못했다.
밴터급과 웰터급은 무려 4체급이나 차이가 있었고 피지컬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최강철을 끌어들인 건 선배들한테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성호를 포함한 국가 대표 코치진이 문성길의 도발을 들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절대적인 호기심도 담겨 있는 것이었다.
문성길은 현재 밴터급에서 승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풍운아였고 월등한 펀치력과 테크닉으로 한국 복싱의 미래라 불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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