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44화 (44/308)

[44] 제7장 그곳으로 간다

고3이 되었으나 청춘들의 피는 쉽게 식지 않았다.

대학에 가기 위해 정신없이 공부하는 와중에도 친구들은 아시아 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경기가 있을 때마다 떼로 몰려와 응원을 하곤 했다.

특히 이성일은 전 경기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달려왔는데 수업은 아예 뒷전으로 미룬 채였다.

그들에게는 최강철이 영웅이다.

비록 같은 나이였으나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으면서 아마추어 복싱마저 휩쓸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영웅으로 보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시합을 끝내고 돌아온 교실은 여전했다.

교실은 대학 입시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어도 언제나 활력이 넘쳤다.

청춘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은 언제나 푸르렀고 유쾌했으며 웃음꽃이 가득했다.

최강철로 인해 블랙 서클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야수들이 사라진 교실은 청춘들의 낭만들이 자욱했으니까.

반에서 가장 활기차고 엉뚱한 신세원이 교탁으로 나선 것은 조례가 시작되기 10분 전이었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들고 있었다.

“야, 니들 어제 인간시장 4권 나왔다는 거 알아?”

“뭐라고, 정말이야? 그게 어제 나왔다고!”

신세원이 자랑스럽게 품에서 책을 꺼내 들어 하늘로 치켜들자 모든 학생의 시선이 단숨에 한곳으로 몰렸다.

바로 그가 들고 있는 반짝반짝한 책을 향해서였다.

인간시장.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했던 김홍신이 써서 공전절후의 히트를 친 소설이었다.

군부독재의 압박에 시달리며 절망했던 대중들은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의 활약을 읽을 때마다 통쾌함으로 몸부림을 쳤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주는 장총찬의 정의는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시원함을 선물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정문고 학생들에게도 인간시장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워낙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서점에서는 인간시장이 새로 나올 때마다 커다랗게 벽보를 걸어놓고 선전할 정도였는데 신세원이 운 좋게 구한 것 같았다.

책을 사는 것조차 힘들었다. 워낙 불티나게 팔려 나가서 새로 나온 인간시장의 연결권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제 밤새도록 읽었는데 죽여주더라고. 장총찬이 막 붕붕 날라다니며 나쁜 놈들을 때려 부수는데 몸이 덜덜 떨렸어. 다혜와의 알콩달콩. 와아, 미치겠더라. 이번 권에서는 다혜하고 키스하는 장면도 나와.”

“야, 인마. 내용 말하지 마!”

신세원이 슬쩍 내용을 말하자 친구들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그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책의 내용을 먼저 발설하는 건 사족을 멸할 정도로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놈이나 하는 짓이었다.

인터넷도 없고 당연히 게임도 없다.

그랬기에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건 맨땅에서 축구하는 것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분식집이나 드나드는 게 전부인 시절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던 건 시대적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아우성에 입맛을 다신 신세원이 교탁에서 물러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빌려달라고 손만 내밀면 즉시 빌려주겠다는 시선이었다.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전생에 읽었던 내용이지만 다시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보다 다른 친구들이 더 필요할 거다.

* * *

금년 들어 정문고는 교복 자율화가 시범 운영 되면서 학생들의 복장은 일률적인 교복에서 사복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신체를 구속했던 검은색 교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갖가지 옷들로 교실이 물들었다.

학생들의 자유 의지를 높여주기 위해서는 교복 자율화가 필요하다며 찬성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학부모들 중에는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다.

바로 없는 사람들이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는 자식들의 옷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교복 자율화가 되자 가난한 사람들은 커다란 고민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과 딸에게 추리닝을 입혀서 학교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냉정해서 새 옷을 사 입히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아 교실은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의 구분이 옷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이성일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낸 것은 점심을 먹은 친구 놈들이 뒤편에서 짤짤이를 시작할 때였다.

“강철아, 학생중앙 7월호 나왔다. 얘 봐라, 죽여주지 않냐?”

가방에서 화려한 표지의 책이 나오자 짤짤이를 구경하던 놈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은 학생중앙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눈들이 전부 하트로 변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표지 모델은 청초하고 너무 예뻐서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얘 이름이 강수연이란다.”

이성일의 설명을 듣고 나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얘가 강수연이라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렇구나, 맞다. 비록 어렸으나 그 아름다웠던 미소가 그대로 들어 있다.

강수연은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을 탄 전력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배우로 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사진 속 모습은 청춘의 가슴을 펄떡이게 만들 만큼 순수해 보였다.

“이 자식아, 그만 들여다봐라. 책 빵꾸 나겠다.”

“예쁘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래. 동명고. 우리 학교랑 그렇게 멀지 않아. 어때, 내가 소개시켜 줄까? 최강철 정도라면 충분히 어울릴 것 같은데?”

“미친놈아, 네가 얘를 어떻게 알아?”

최강철이 묻자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던 놈들도 전부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들어 있었다. 혹시라도 이성일이 강수연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성일의 얼굴에서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마, 여자를 처음부터 아는 놈이 어디 있어. 부딪치고 깨지면서 알아가는 거지. 생각 있으면 말만 해. 내가 쫓아가서 최강철이 사귀고 싶다는 걸 알려줄 테니까.”

그럼, 그렇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성일은 절대 강수연과 어떤 관계가 있을 놈이 아니다.

그럼에도 슬쩍 기대감이 있었던 건 사진 속의 그녀가 너무나 예뻤기 때문일 것이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벌떡 일어나 이성일의 멱살을 틀어쥐고 당장 소개시켜 달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 * *

복싱 기술과 피지컬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여유를 찾았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휴식이 필요했고 청춘으로 돌아왔으니 그 나이게 맞게 사는 법도 필요했다.

윤성호는 시합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체육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쉬었기 때문에 매주 월요일이면 복싱에서 물러나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이성일과 어울려 농구도 했고 친구들과 몰려가 분식집에 들러 라면과 떡볶이도 먹었다.

그런 시간을 보낼 때마다 즐거웠다.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시간이 흘러 아시안게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국가 대표의 소집령이 내려졌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을 꺾고 1위에 오르는 것이 체육부의 목표였기 때문에 국가 대표들은 3개월 전에 전부 태릉선수촌에 입소해야 했다.

그러나 최강철은 복싱 협회에 시험을 이유 들어 입소를 연기했다.

복싱 협회에서는 그가 고등학생 신분이었고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올해의 화두는 당연히 프로야구의 출범이었다.

1월 OB베어즈의 출범을 시작으로 프로야구단이 창단되었는데, 일본에서 넘어온 백인천 선수는 감독을 겸임하면서 4할 대를 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일본과 한국의 레벨 차가 있다 해도 이제 은퇴를 앞둔 사람이 꿈의 타율을 기록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시선을 한곳에 모은 것은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였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프로야구 출범에 이어 세계 야구 선수권을 서울에 유치했는데, 상당수의 국가 대표 선수들은 이 대회를 위해 프로야구 출범에 참여하지 못했다.

10개국이 참여해서 자웅을 겨뤘고 운명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풀 리그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이 대회 방식의 특성상 마지막 일본 경기는 전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끌어모았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양국이 모두 7승 1패로 동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몰린 가운데 잠실야구장에서 운명의 승부가 벌어졌다.

일본이 학생들의 교과서에 역사 왜곡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였기에 반드시 이겨야 되는 경기였다.

또다시 길거리가 한산하게 변했다.

어른들은 다방으로 몰려갔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잠실야구장으로 달려갔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잠실 주변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 속에 최강철과 윤성호, 이성일이 촌놈들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오늘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야구광인 윤성호가 같이 가자며 거금을 들여 표를 구해놨기 때문이다.

윤성호는 국가 대표 코치 자격으로 벌써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있었지만 오늘을 위해 휴가까지 내고 나왔다.

슬금슬금 포장마차 쪽으로 걸어가는 윤성호를 향해 최강철이 불쑥 물었다.

경기장 주변에는 빼곡하게 포장마차들이 들어 차 있었는데 마치 야시장처럼 보였다.

“관장님, 술 사려고 그러죠?”

“춥다. 이런 날은 오징어에 소주를 먹어줘야 해.”

“웬만하면 그냥 들어가요. 경기장에서 술 먹는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다들 마시는데. 소주를 마시면서 응원해야 흥이 나는 법이라고.”

윤성호가 만류하는 최강철에게 대답하며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포장마차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은 안주거리와 소주를 봉지에 담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잘못된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같아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당연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와아, 와아!”

경기장에 몰려든 관중들의 숫자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신축된 잠실경기장을 꽉 채웠는데 양국 선수들이 나오자 폭탄처럼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일방적인 응원의 물결.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한일 감정은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폭발 직전까지 몰렸기 때문에 관중들을 일본 대표단을 향해 쌍욕을 서슴지 않았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1회부터 내야수가 실책을 하면서 2점을 준 후 7회까지 단 1안타의 빈공을 하면서 한국 대표단이 일방적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것들이 국가 대표 맞냐? 어째 치지를 못하는 거야.”

“일본 투수가 대단해서 그래요. 일본 프로야구는 역사가 벌써 44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출범했으니 차이가 날 수밖에요.”

“넌 일본 편이냐?”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시비를 거는 윤성호를 향해 대답을 한 후 최강철이 고개를 홱 돌렸다.

소주를 마셔 얼굴이 붉어진 그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를 하고 싶어 했지만 눈치 빠른 최강철이 외면했기 때문에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운명의 8회말.

연속 2안타로 1점을 뽑은 후 1사 3루에서 김재박이 개구리 번트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자 잠실운동장은 난리가 났다.

관중들은 전부 일어서서 함성을 질렀는데 윤성호는 펄쩍펄쩍 뛰다가 금쪽같은 소주를 반이나 흘렸다.

“아이고, 심장 터져 죽겄네.”

“관장님, 장가는 가고 죽어야죠. 침착, 침착하세요.”

덩달아 펄펄 뛰던 이성일이 윤성호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참 대단한 콤비다. 이성일도 야구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윤성호가 입장권을 마련해 줬기 때문인지 오늘은 개인 비서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흥분은 이어진 찬스에서 한대화가 3점 홈런을 터뜨리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모두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고 서로를 껴안은 채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고 그날의 흥분을 직접 보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최강철은 기뻐서 서로를 끌어안고 펄쩍거리는 윤성호와 이성일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지금까지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미래의 역사는 바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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