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류순덕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안방에서 물러났다.
남정네들의 대화에 여인네가 끼면 안 된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그녀는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류순덕이 사라지자 안재만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버님, 강철이가 정 부장에게 그랬다는군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저희들과 계약을 하겠다면서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답니다.”
“무슨 계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유?”
“후원 계약이죠. 아버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권투 선수는 프로모션에 소속되어 시합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저희 극동은 국내에서 가장 큰 프로모션이라 강철 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줄 수 있습니다.”
“강철이는 아직 고등학생이구먼유. 한창 공부하는 애가 무슨 돈을 번다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프로로 데뷔해야죠. 강철 군같이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은 유능한 프로모션에서 후원하면 챔피언도 될 수 있습니다. 세계 챔피언 말입니다. 저희 극동은 최강철 군의 가능성을 무척 높게 보고 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도와줄 생각입니다. 그러니 아버님, 강철 군을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강철이 다니는 체육관은 따로 있구먼유. 그런데 어뜩히 바꿔유. 내가 알기로는 강철이가 관장님을 무척 좋아하고 따르던데 그 양반하고는 상의가 된 거유?”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성호, 그 친구는 옛날에 한국 챔피언을 하다가 복싱에 자질이 없어서 그만둔 사람입니다. 전문적으로 복싱 트레이닝을 배우지 못했고 성격도 나빠서 대형 체육관 코치를 하다가 여러 번 그만둔 사람이에요. 강철 군과 같은 유망주는 그런 사람과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장래를 망칠 사람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런 소리하기 뭐 하지만 그 친구는 사생활도 아주 난잡하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돈을 무척 밝힌다는 소문도 있어요. 강철 군이 그 사람과 함께하면 돈 문제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할 겁니다.”
“그런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사실입니다. 복싱 관계자들에게 확인해 보면 금방 드러날 일을 제가 뭐 하러 거짓말하겠습니까.”
“허어, 그것참.”
“저희 극동프로모션은 세계 챔피언만 해도 3명을 키워냈고 현재 동양 챔피언을 4명이나 보유하고 있어요. 전문 트레이너들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에 강철 군은 몇 년 이내에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님, 강철 군의 장래가 걸려 있는 일입니다. 현명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더군다나 강철 군도 저희와 계약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니 망설일 일이 아닙니다.”
“강철이가 정말 그랬어유?”
“그럼요, 아버님 계실 때 이야기했다고 하던데요. 정 부장이 저번에 집에 왔을 때 강철 군이 분명히 그랬답니다. 세계 선수권대회 갔다 와서 계약하겠다고요. 듣지 않으셨나요?”
“글씨유, 그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희는 강철 군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세계 챔피언을 만들기 위해 데려가려는 겁니다. 아버님, 저희들에게 강철 군을 맡겨만 주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세계 챔피언을 만들어놓겠습니다.”
열정적인 음성.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음성은 혼돈에 빠진 최우용의 정신을 옭아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누가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색안경 끼고 보겠는가.
더군다나 최우용은 평생을 운전만 하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안재만이 품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내 든 것은 최우용의 시선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한 후였다.
“아버님, 저희는 최강철 군을 데려가기 위해 거액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여기 들어 있는 건 2천만 원입니다. 지금까지 신인 선수한테 이런 돈을 준 적은 국내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저희들이 이런 거액을 강철 군에게 주는 것은 반드시 챔피언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버님, 여기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시죠.”
안재만이 다른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최우용 앞으로 내밀었다.
최우용의 시선은 서류에 가 있지 않았다.
다른 봉투에서 꺼내진 천만 원짜리 수표 2장. 바로 2천만 원이란 거액을 보며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돈이면 손자를 수술시켜 살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알아듣기 힘든 병명을 대면서 수술만 하면 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워낙 비용이 커서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었다.
한 해 한 해, 손자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큰아들의 눈물과 함께 고통이 쌓여갈 때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의 못남이 한스러웠다.
여름철이 되어 비가 올 때마다 방 안에는 온갖 그릇과 대야가 가득 들어찼다. 워낙 낡은 집이었기 때문에 수리를 해도 그때뿐이라 비가 올 때면 전 가족이 비를 피하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돈이면 괜찮은 집을 사서 그런 고생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시집가야 하는 둘째 딸의 혼수 비용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 돈이면, 이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계약서를 내밀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회장이란 사람의 시선이 더없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에게 맡긴다면 아들의 장래가 보장될 것처럼 신뢰에 가득찬 시선이자 간절함이었다.
“그런데 강철이하고 계약하는 건데 왜 저한티 하라는 건가유?”
“강철 군은 아직 미성년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을 찾아온 거지요.”
“그럼 제가 도장을 찍으면 되남유?”
“그렇죠. 그러시면 됩니다.”
안재만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만세를 외쳤다.
이젠 되었다. 촌것의 눈에 들어 있는 돈에 대한 탐욕.
없는 것들에게는 역시 돈만큼 강한 유혹도 없다.
최우용을 처음 봤을 때 배우지 못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란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것은 그가 계약서의 내용을 앞장만 대충 읽어보고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계약서에는 최강철에게 불리한 내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애비라는 작자는 그게 어떤 족쇄인지도 모르고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당최 모르겄네유. 우리 아덜한테 잘못되는 건 아니겄쥬?”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재만이 확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한참을 망설이던 최우용이 눈앞에 놓여 있는 돈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장롱을 열어 도장을 꺼냈다.
그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최강철이 들어섰다.
“아버지, 그 도장 꺼내지 마세요. 그 도장은 함부로 쓰시는 게 아닙니다.”
최강철은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버지가 들고 있는 도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들을 지켜보던 최우용이 꼭 쥐고 있던 도장을 넘겨주지 못하고 안재만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결국 아픔을 가득 담은 채 웃고 있는 아들의 손에 도장을 쥐어주고 말았다.
아들은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자신은 배운 게 없어서 아는 것이 없었으나 아들은 누구보다 똑똑했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으니 지금 이 상황은 아들에게 맡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는 아들에게 도장을 내어준 후 깊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최강철은 아버지로부터 도장을 건네받은 후 안재만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 후 싸늘한 눈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게 극동이 저를 스카우트하려는 노력이고 방법입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게.”
“그러죠.”
최강철이 불안해하는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미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며 안재만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 눈에 담겨 있던 돈에 대한 욕심은 오로지 당신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랬기에 더 분노가 솟구쳤다.
아버지는 아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걸 직감했던지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계셨다.
“아버지, 이젠 괜찮으니까 편하게 계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려, 그려라.”
아버지를 진정시킨 최강철이 극동에서 내민 돈을 힐끔 쳐다본 후 계약서를 들어 올려 꼼꼼히 살폈다.
계약서의 내용은 볼 필요 없다.
단지 그가 궁금했던 것은 얼마나 대단한 사기를 치려고 이런 짓거리를 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보면서 최강철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웃음이 떠올랐다.
완전 노예 계약이다. 그것도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용어를 잔뜩 써놓아 아버지가 봤을 때는 지구 반대쪽에 있는 딴 세상 언어로 보일 정도였다.
“계약금 2천만 원이군요.?”
“맞네, 신인에게는 최고의 계약금일세.”
슬쩍 긴장한 표정으로 있었던 안재만이 최강철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잠시 긴장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차피 닥칠 일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나마나 이놈은 정 부장이 제시한 계약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나는 윤성호와의 의리 때문이고 또 하나는 돈 때문이다.
이 영악한 놈은 시간이라는 우군을 만들어 나중에 접촉해 온 대한과 우리를 경쟁시켜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약서를 살피는 최강철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놈이 전문 용어가 가득 들어 있는 계약서 내용을 본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최강철의 입에서 계속 질문이 쏟아져 나오자 급격하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계약 기간은 선수 생활 은퇴할 때까지이고, 위반할 경우 계약금의 10배를 물어줘야 한다고 되어 있네요. 맞나요?”
“그게… 그러니까 그건 혹시나 해서 만들어놓은 걸세.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내용이지.”
“또 보죠. 대전료의 50%를 극동에서 가져가는 것으로 되어 있군요. 더군다나 매니저와 코치 비용은 선수가 지불하고 각종 경비도 선수의 대전료에서 제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네요. 요즘 프로모션은 선수들 대전료를 이렇게 많이 챙깁니까?”
“허어, 이 사람아 프로모션도 먹고 살아야지.”
“선수 등을 쳐서 말이죠. 제가 알기로 시합에서 얻어진 이익의 상당 부분을 프로모션이 가져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수의 대전료는 프로모션의 이익금과 각종 경비를 제하고 산정되는 건데 거기서 또 50%를 뗀단 말입니까?”
“그건 당연한 권리일세. 권투 선수가 시합을 하기까지 프로모션이 하는 일을 생각해 봐.”
“크큭… 최초 5번의 시합은 50만 원, 승률이 80%를 넘으면 그다음 시합은 100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네요. 이게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최고의 대우라니 정말 놀랍군요.”
“우리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타이틀전에 나가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어.”
“그렇겠죠.”
“더군다나 우리는 자네의 병역 제한 조건을 풀어줄 수 있네. 극동의 인맥을 통해서 정부 쪽에 줄을 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정 안 되면 돈을 써서라도 자네를 군대에 안 가게 만들 수 있단 말이야.”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나?”
“필요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거 들고 당장 나가세요. 나는 극동과 계약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노예 계약을 가져와서 아버지를 속이려 했다니 정말 가증스럽군요.”
“이봐, 말조심해. 어린 친구가 어디서 함부로 떠들어!”
“남의 집에 와서 소리를 지르는 건 당신입니다. 다시 한번 말할까요? 난 극동과 계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가주세요.”
“흐흐… 어린놈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져서 좋은 조건에 스카우트를 하려고 했더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만. 나보고 일어나서 가라고 했어? 건방진 놈. 이 판에서 네가 나를 이렇게 모욕 줘놓고 클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우리 극동과 계약하지 않으면 글러브를 벗어야 할 거다. 대한을 믿는 모양인데 부질없는 짓이야. 왜냐하면 우린 같은 밥을 먹고사는 한 가족이거든. 내가 작정하고 너를 죽이겠다면 넌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알겠어?”
“그렇군요.”
“지금은 그만 갈 테니 잘 생각해 봐. 프로 복싱으로 전향하고 싶으면 결국 내 손을 잡아야 할 거다. 내가 아니면 너는 누구와도 계약하지 못할 테니 말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들어!”
“누가 죽는지 두고 보죠. 회장님 말대로 약한 자는 죽습니다. 대신 강한 자는 살아남아 세상을 호령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당신이 저한테 한 짓을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잘 가세요.”
큰일 날 뻔했다. 오늘따라 윤 관장이 집안에 일이 있다고 일찍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안재만의 술수에 넘어가 커다란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최강철은 씩씩거리며 나가는 안재만과 정기수의 뒷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머리 같은 자들.
선수들의 등을 쳐서 고혈을 갉아먹는 안재만의 행동을 확인하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기다려. 안재만.
반드시 너의 비열하고 더러운 행동에 대해 철퇴를 내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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