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 * *
청와대에서 빠져나올 때 비서실장으로부터 제법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봉투 전면에는 ‘대통령 전두환’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일종의 격려금.
작은 돈이 아니다. 아버지의 월급이 겨우 25만 원이었으니 이 돈이면 조카의 병원비 때문에 얻은 빚을 갚을 수 있다.
봉투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청와대를 빠져나와 복싱 협회로 갔다.
축하연은 취소되었지만 아직 행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사의 내용은 포상금 전달식이었다.
물론 협회장과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돈을 받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 충분히 참을 만했다.
25일 동안 동고동락했던 유광호를 비롯해서 김동길 일행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윤 관장과 함께 복싱 협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으나 조만간 다시 만날 거라는 기약이 있으니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었다.
택시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최강철은 협회에서 포상금으로 준 봉투를 열어봤다.
봉투에는 5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피겨스케이팅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김연아나 마라톤 금메달을 딴 황영조는 몇 억씩 포상금을 받았는데 겨우 50만 원이라니 한숨이 나올 일이다.
물론 단순 비교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현재는 포상금을 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때였고, 협회의 운영도 회장 개인의 영향력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으니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복싱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대에서 내 나이에 가장 커다란 돈을 만질 수 있는 것은 복싱이 유일했다.
슈가레이 레너드나 베니테스, 헌즈, 듀란 등의 대전료는 한 방에 최소 300만 불 이상이었고 특급 스타들의 슈퍼 매치는 600만 불 이상이 상회하기도 했다.
1달러에 662원. 대충 계산하면 슈퍼 매치 한 번에 40억이란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이 40억이지 웬만한 중소기업 몇 개를 살 수 있는 돈이고, 지금 개발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잠실 땅을 수십만 평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멀뚱히 서 있는 윤 관장을 향해 봉투를 건넸다.
옆에서 뭐 하는 짓인가 쳐다보던 윤 관장이 자신에게 돈을 건네는 최강철을 향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냐?”
“이 돈은 관장님이 가지세요.”
“이 자식아, 이거 포상금이야. 네가 우승해서 받은 돈이라고!”
“그러니까 말이죠. 서독까지 가느라 가진 돈 탈탈 털었잖습니까. 이건 관장님이 가시셔야 할 돈입니다.”
“이 미친놈이…….”
“저는 대머리 대통령이 준 격려금 있으니까 이건 관장님이 가지셔도 됩니다. 그래야 앞으로도 절 잘 먹여주실 거 아닙니까.”
최강철의 손이 거둬지지 않자 윤 관장의 표정에 망설임이 생겨났다.
맞다. 제자를 따라 서독에 가기 위해 있는 돈은 물론이고 지인들에게 빚까지 얻었기 때문에 당분간 살림이 빠듯한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건 자신의 돈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반으로 나누자.”
“괜찮아요. 이번에 쓰신 돈이 이것보다 더 많다는 거 알아요. 괜히 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받으세요.”
최강철이 억지로 윤 관장의 주머니에 봉투를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마침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뛰어갔다.
윤 관장이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온 봉투를 꺼내며 뭔가 소리를 질렀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윤 관장은 자신을 위해 아무런 계산 없이 많은 돈을 썼으니 이 정도의 돈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동네 아줌마에게 새로 배웠다며 저녁 반찬으로 불고기를 내놓으셨다.
누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나들은 소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가 접시에 한가득 불고기를 내놓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그래, 우린 이렇게 살았지. 소고기는 둘째 치고 삼겹살 한번 제대로 구워 먹은 적이 없었으니 누나들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우리 집의 반찬은 언제나 된장찌개가 주 메뉴였고 김치와 콩나물무침, 깍두기가 전부였다.
주말이면 어머니는 특식을 마련했는데 삼양라면 2개에 국수를 한 묶음 풀어서 끓여주시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라면 스프의 그 달콤함. 라면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우리 6남매는 아귀처럼 떠먹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곤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아주 오래전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일을 나갔던 큰형이 바나나 2개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바나나는 부의 상징이었고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귀중한 과일이었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자식들과 두 명의 조카들을 모두 합하면 10명이나 되었기에 똑같이 나누어 분배했는데 어렸던 나는 한입에 털어 넣은 후 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하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콤했던 바나나 향기는 어느새 침샘을 자극해서 녹기 시작했고 금방 목구멍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울었다. 생전 처음 먹었던 바나나가 사라지는 게 억울했고 다시는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나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만들었다.
즐거운 저녁 식사였다.
불고기란 특식이 나왔다는 이유도 있지만 최강철이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곁들어지면서 가족들은 오랜만에 웃음 속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물론 누나들은 최강철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과 악수하고 직접 이야기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
부모님과 누나들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기에 최강철은 저녁을 먹는 동안 끝없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야 했다.
그 당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대통령을 나라님이라 부르며 극도의 존경을 가지고 대했다.
배우지 못한 것보다 뿌리 깊게 내려온 유교 사상이 그런 사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과연 이분들은 알까?
청와대에 들어 앉아 있는 그 사람과 하수인들이 삼두육비의 괴물보다 훨씬 잔인했고 치사하며 간교한 자들이었음을.
누나들이 설거지를 위해 상을 들고 부엌으로 갔을 때 담배를 빼어 무시는 아버지 앞으로 대통령이 준 격려금을 내놓았다.
아버지는 놀란 눈을 한 채 봉투를 만지시지 못했는데 전면에 쓰여 있는 한문과 봉황 무늬에 압도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글은 읽으실 줄 알지만 한문은 읽지 못하셨기 때문에 겉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지 못하셨다.
“이게 뭐여?”
“돈 입니다. 오늘 청와대에 갔더니 대통령께서 격려금을 주셨어요.”
“어이구!”
봉투의 정체를 알게 되자 아버지는 펄쩍 뛰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정말 많이 놀라신 모양이었다.
“봉투 안에 30만 원이 들어 있어요. 이 돈으로 정국이 병원비 때문에 진 빚 갚으세요.”
“허어…….”
아버지의 손이 어렵게 움직였다.
그러고는 빳빳하게 봉투 속에 담겨 있는 돈을 힘들게 꺼내 든 채 한동안 바라보셨다.
아버지의 눈에 들어 있는 것은 탐욕이 아니었다. 망설임과 갈등, 그리고 이 돈이 지닌 가치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이었다.
“이걸… 내가 써도 되겄냐?”
“그럼요. 저 때문에 생긴 돈이지만 아버지 것이기도 해요. 아버지로 인해 제가 태어났으니 이 돈은 아버지가 쓰시는 게 맞아요.”
“그려, 손이 부끄럽지만 내가 쓸란다. 네 엄마가 돈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니라서… 미안혀다.”
“아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년 만 기다려 주시면 아버지께 황금을 가져다 드릴게요.
그러니 지금은 힘들어도… 견뎌내고 참아주세요.
* * *
부모님은 없는 돈을 또 털어 동네잔치를 벌이셨다.
친분이 있는 어르신들과 회사 동료분들까지 와서 하루 종일 잔치를 벌였는데 최강철은 유치하지만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인사를 다녔다.
아버지께서 자랑하기 편하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고 술 취한 아버지의 너스레가 한없이 정겨웠다.
학교 정문에는 현수막이 내용만 바뀌어 걸렸다.
국가 대표가 되었을 때와 비슷했는데 이번에는 ‘정문의 히어로 최강철, 세계 선수권대회 제패’란 말이 쓰여 있었다.
그 문구를 보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내세울 게 별로 없는 학교라 해도 너무 자극적인 문구라 남들이 볼까 봐 무서웠다.
학교 측에서는 교장선생님의 지시로 인해 보충 수업을 제시해 왔으나 최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전교 수석이 25일 동안 수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걱정스러워 제시한 것일 테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걱정이었다.
벌써 고2 과정은 모두 예습이 끝난 상황이었다.
틈틈이 시간 날 때 공부를 했지만 루시퍼가 선물해 준 두뇌는 그 시간만으로도 전 과정을 빠삭하게 그의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았다.
대회가 끝나고 난 후 보통의 삶이 찾아왔다.
이성일과 함께 학교를 다녔고 수업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공부에 매달렸다.
윤성호의 체육관은 이제 관원이 300명을 훌쩍 넘기고 있었는데 그가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게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윤 관장은 뻔뻔하다.
체육관 건물 전면은 물론이고 주변에 온통 금메달이 목에 척 걸린 최강철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냐!”
그의 변명이었다.
관원들을 끌어 모으는 데 이것만 한 홍보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 *
극동프로모션의 정기수는 앞좌석에서 내려 급하게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눈을 감은 채 편한 자세로 있던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차에서 내린 후 허름한 파란 대문 집을 바라보았다.
“여기야?”
“예, 회장님.”
정기수의 대답에 중년 사내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사내는 대한민국 복싱계의 대부이자 극동프로모션의 회장인 안재만이었다.
그가 직접 여기까지 온 것은 당연히 최강철 때문이었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마크 브릴랜드를 KO로 때려눕히고 우승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후 즉시 정기수를 보내 계약을 타진했으나 최강철이 단칼에 거절했다는 소리를 들은 그는 최충일의 세계 타이틀전 때문에 필리핀에 있다가 일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급거 귀국했다.
안재만이 한국 복싱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선수를 보는 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온갖 권모술수에 능했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한다.
어떤 경우라도 뛰어난 기대주가 있다면 즉시 달려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극동의 돈줄이 되도록 만들었다.
복싱의 세계는 정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유망주들이 매니저들과의 의리 때문에 계약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돈으로 매수했고 그게 안 되면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복싱에서 그의 지위를 이용하면, 관장이고 선수고 전부 구정물에 처박을 수 있었기에 그의 협박을 무시하고 버텨낸 자는 한 놈도 없었다.
“그거 꺼내.”
“예, 회장님.”
안재만이 턱짓으로 지시하자 정기수가 급히 차 트렁크에서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선물 상자들은 한눈에 봐도 꽤나 비싼 물건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안재만은 거침없이 대문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두들겼다.
양철 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어둠을 뚫고 발소리가 들려온 후 문이 삐죽 열렸다.
“누구시유?”
“최우용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최강철 군에 대해서 의논할 게 있어서요.”
“아… 예, 들어와유.”
착한 류순덕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들였다.
비록 밤이었으나 아들 때문에 왔다는 손님들을 세워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저녁 8시.
이미 저녁 식사가 끝날 시간이었으니 손님으로 오기에는 적당한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시간을 선택한 것은 최강철이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된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에 들어서자 안방에서 조그만 텔레비전을 보던 최우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로 이 늦은 밤에…….”
“아이고, 아버님. 일찍 찾아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여기 정 부장 아시죠?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하던데.”
“예,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우리나라 최고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극동프로모션의 회장 안재만이라고 합니다. 정 부장과 같이 일하는 사람이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안재만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최우용이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했다.
그는 아직도 이 사태에 대해서 어찌 대응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안재만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이건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미국 부자들만 마신다는 최고급 양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머니 옷이고요. 백화점에서 산 거라서 잘 맞으실 겁니다.”
그가 불쑥 선물을 내밀자 최우용과 류순덕이 얼떨결에 받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안재만은 여유롭게 그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 하며 정 부장에게 눈치를 준 후 슬그머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촌것들이다.
입은 것은 둘째 치고 상황 판단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오늘 일은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