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제6장 자체 발광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일 것이다.
그토록 비참했던 삶을 뒤로하고 이런 영광을 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뜨거운 감성에 젖게 만들었다.
태극기가 올라가는 순간 울려 퍼진 애국가의 연주가 웅장했고 아름다웠다.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동안 전생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번 생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을 것이며 전생에서 하지 못했던 영광과 환희를 느끼며 살아갈 것이라고.
유광호도 울었고 자신을 가르쳤던 윤 관장은 통곡을 터뜨렸다.
사람은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모든 시상식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돌아오자 치료를 받고 있던 김동길이 그를 반겨주었다.
“강철아, 고맙다.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 자식아, 이럴 땐 우쭐거려도 괜찮아. 세계 최고가 되었는데 뭣 때문에 활짝 웃지 못하냐. 혹시 나 때문이야?”
“아닙니다. 형은 패배자가 아니잖아요. 비록 결승에서 졌지만 제가 봤을 때 형은 최고였어요.”
“미치겠네. 넌 어째 볼수록 애 늙은이 같냐.”
김동길이 다가와 최강철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비록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따뜻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최강철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윤 관장과 코치진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동료라는 것.
아무런 사심 없이 축하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다.
* * *
유광호는 시상식이 끝나고 일행이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미친 듯 주최 측이 마련해 놓은 국제전화박스를 향해 달려갔다.
시차가 8시간이나 차이가 나니 지금쯤 한국은 10시가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이 아니라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복싱 협회 회장은 물론이고 주요 간부들은 사무실에 모여 자신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교환이 떠드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린 후, 통화음이 찰칵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 사무장?
“회장님 접니다.”
-어떻게 됐어!
“최강철이 금메달을 땄습니다. 브릴랜드를 때려눕혔어요. KO로 말입니다. 3라운드 2분 42초 녹아웃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김동길은 아쉽게 졌지만 강철이가 금메달을 땄으니 복싱 협회에 경사가 났습니다.”
-우하하하… 수고했네, 수고했어.
복싱 협회 회장인 남인구가 기쁨에 겨워 마구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2년 전에 협회장이 됐는데 각종 국제 대회에서 죽을 쓰는 바람에 그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좌불안석했다.
-유 사무장,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시합 내용이 어땠나. 브릴랜드 그 자식은 세계 최고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겼어. 정말 믿겨지지 않는구먼.
“처음에는…….”
유광호가 경기 내용을 말하는 동안 협회장은 연신 감탄사를 흘려냈다.
워낙 국제전화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오래 통화할 여건이 아님에도 회장은 거의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며 유광호를 괴롭혔다.
-자네들 귀국이 모레지?
“예, 그렇습니다. 강철이와 동길이가 부상을 조금 입었지만 귀국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걔들 고생했으니까 몸보신 확실하게 시켜줘. 돈 걱정하지 말고. 알았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들어올 때 애들 광 좀 내놔. 협회 차원에서 환영 행사를 마련해 놓을 테니 말이야.
* * *
윤성호는 저녁을 먹으며 코치진과 함께 얼근해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웬만해서는 과음을 하지 않던 그의 혀가 꼬부라질 정도였다.
“내가 말입니다. 저놈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아세요. 크윽… 쟤 처음에 왔을 때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멸치 같았다니까요.”
영웅담이다.
세계 선수권대회, 그것도 황금 체급이라는 웰터급에서 차기 세계 챔피언으로까지 거론되었던 브릴랜드를 꺾고 자신의 제자가 챔피언에 등극하자 그의 입에서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일들이 주절주절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유광호를 비롯해서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계속 듣고 있었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괴물.
웰터급의 신성에서 벗어나 세계를 재패한 최강철의 이야기를 그들은 처음 듣는다.
식사 자리가 파할 때까지 최강철은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윤 관장을 기다렸다.
술에 취했으니 자신이 숙소까지 돌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최강철은 윤 관장을 등에 업고 버스에 올랐다.
그만큼 윤 관장은 술에 취했는데 그에게 업어달라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었다.
그와는 한방을 썼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릴 때도 업어서 침대로 데려왔다.
무겁지는 않았다.
복싱 선수 출신이었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체육관의 관장이었으니 몸매 하나는 여전히 잘빠져 군살이 없다.
윤 관장은 업힌 채 최강철의 귀를 잡아당기기도 했고 양발로 허리를 붙잡으며 응석을 부기기도 했다.
웃음이 나왔으나 참았다.
“관장님, 일어나 봐요.”
“인마, 나 술 취한 거 안 보여? 일어날 힘 없다.”
“취하긴 뭘 취해요, 그것 마시고. 괜히 취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요.”
침대에 누워 있는 윤 관장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자 석상처럼 누워 있던 그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최강철을 째려봤다.
“이 자식아, 기분 좋아서 지금 한창 느끼고 있는 중인데 꼭 산통을 깨야겠어?”
“안 취한 사람이 취한 사람 흉내 내니까 그렇죠.”
“내가 술 취한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관장님 주량에 그 정도는 새 발의 피죠. 속일 사람을 속이세요.”
“귀신같은 놈. 그래, 뭐. 왜 그러는데?”
“관장님, 우리 미국 갑시다.”
“미국? 거긴 왜?”
갑자기 최강철의 입에서 미국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던 윤성호의 눈이 두꺼비처럼 커졌다.
전혀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까, 더 럼블에서 왔다는 톰슨을 잠깐 봤어요. 내일 시간 내서 한번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요.”
윤성호의 눈은 이제 완전히 깨어났다.
더 럼블은 그도 알고 있는 세계 최고의 프로모션이다.
복싱 세계에서는 돈 킹이 이끄는 더 럼블을 전설로 치부하고 있는데,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슈퍼스타로의 고속 성장이 보장되는 지름길이다.
그랬기에 그는 최강철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널 스카우트하겠다고 하디?”
“그런 말은 아직 안 했습니다.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요?”
“인마, 넌 아직 학생이야. 혹시…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냐?”
“그럴 리가요. 가도 졸업하고 가야죠.”
“미리 계약해 둔다고?”
“봐서요. 톰슨이 어떤 조건을 들고 나오나 눈으로 확인해 봐야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윤성호의 시선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최강철을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막상 품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자 두 눈이 캄캄해졌다.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최강철의 무시무시한 재능은 자신의 능력 범위를 훨씬 뛰어넘었다.
더군다나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그 시기가 조만간 찾아올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갑자기 제자의 입에서 더 럼블이라는 거대 프로모션의 이름이 나오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
보내준다. 자신이 기른 제자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극동의 떨거지들이 찾아왔을 때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더 럼블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제자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후원자를 만나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자신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같이 가야죠.”
“톰슨 만나는 데 말이야?”
“그것도 그렇고 저는 계약 조건에 전담 트레이너로 관장님을 지정할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같이 가야 합니다.”
“싫다… 인마.”
윤성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이 미친놈.
미국에 가면 날고 기는 트레이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동네 체육관 관장을 전담 트레이너로 삼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놈은 분명 지금까지 자신한테 얻어먹은 것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왜 싫어요?”
“난 비행기 타면 멀미 나. 그래서 못 가.”
“그런 양반이 여긴 어떻게 왔어요. 치사하게 나 혼자 그 먼 땅에 보낼 생각이에요. 정말 그런 겁니까?”
“아니… 이놈이 왜 도끼눈을 치켜뜨고. 너 스승한테 그래도 되는 거냐?”
“톰슨하고 이야기 잘되면 갑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미녀들이 득실댄대요. 거기서 참한 아가씨 구해서 관장님도 장가가야죠.”
“이 자식아, 난 한국 여자 아니면 결혼 안 해!”
* * *
톰슨은 쟈칼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초조하게 최강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의 경기만 생각하면 저절로 오한이 돋는다.
아마추어 최강의 테크니션이라 불리는 마크 브릴랜드가 사냥개에 쫓기는 토끼처럼 몰리다가 결국 쓰러지는 장면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마추어에서 사용하는 12온스 글러브만 아니었다면 승부는 훨씬 일찍 결판났을지 모른다.
그만큼 최강철의 펀치는 기가 질리도록 빠르고 날카로웠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가 최강철을 만났다.
기회를 봐서 일행이 전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명함을 전해주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오늘 여기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볼수록 야수의 기운이 철철 넘치는 놈이다.
더 럼블이라는 타이틀을 확인했음에도 놈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만나자는 자신의 제의를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계약서는 처음부터 만들 생각도 가져올 이유도 없었다.
오늘의 만남은 더 럼블과 최강철의 인연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자리였지 덥석 미끼를 던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즐겁다. 오랜만에 나타난 새끼 호랑이의 재롱을 볼 생각에 술이 저절로 당겼다.
최강철이 나타난 것은 그가 마티니를 두 잔째 마시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톰슨 씨. 이분은 저의 트레이너이신 윤성호 관장님입니다.”
의문을 나타낼 사이도 없이 최강철이 가볍게 묵례를 한 후 옆에 서 있는 사내를 소개해 왔다.
크큭… 이놈 의리도 있는 모양이다.
“반갑소, 나는 더 럼블의 톰슨이오.”
“윤성호요.”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그 정도는 알아들었는지 윤 관장이 마주 손을 잡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윤성호는 처음부터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던지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를 시키더니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후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톰슨이 그런 윤성호를 잠깐 바라본 후 최강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제 경기는 정말 화끈했어. 보는 내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할 만큼 멋진 경기였네.”
“고맙습니다.”
“24번의 경기 중 23번을 KO로 이겼더군. 이번 대회에서 미스터 최의 경기는 내가 다 봤네. 서독의 그 멍청이가 도망만 다니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전적이 깨지지 않았을 텐데 아까운 일이야.”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죠.”
“그건 그렇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를 만나자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스카우터가 최고의 복서를 만나자는 건 뻔한 일이지. 알고 나온 거 아닌가?”
“저를 스카우트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네.”
“계약서는 가져오셨습니까?”
“오늘은 상견례만 하려고 했어. 하지만 자네가 마음의 결정만 내리면 언제든지 가져오지.”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오셨죠?”
“고등학교 2학년, 18살. 24전 24승 23KO. 각종 수상 경력도 말해야 되나? 집안 형편은 지금 알아보는 중이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중요한 건 알아보지 못하고 오셨군요.”
“무슨 소린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1년 반이란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남자라면 3년 동안 무조건 군대에 가야 되죠. 제가 이번 대회에 우승하면서 군 면제 조건은 해결했지만 아마추어 복싱 쪽에서 5년간 헌신해야 된다는 제약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이제 럼블에게 제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년 반 후에 계약을 하시죠. 단 제 트레이너는 이분으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한국 정부 쪽에 아마추어 복싱에서 5년간 썩어야 한다는 제약을 풀어주세요. 그러면 그때 럼블과 좋은 인연을 맺겠습니다.”
“허어…….”
“실망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 상품 가치가 최고라는 것을 그 1년 반 동안 확실하게 보여 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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