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최강철의 도발에 마크 브릴랜드는 가소롭다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역시 통하지 않는 걸 보니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말을 꺼낸 이상 너는 본능적으로 턱을 보호하게 될 거야.
심판의 주의 사항이 끝나는 걸 확인한 최강철이 글러브를 내밀어 브릴랜드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브릴랜드는 비웃음을 남긴 채 자신의 코너로 돌아갔을 뿐이다.
전혀 통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효과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강철아, 오늘이 마지막이다. 작전대로만 하자. 씨발, 이번에는 정말 내 말 들어야 해.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너 이 자식, 오늘도 네 맘대로 하면 정말 죽여 버릴 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윤 관장이 짜놓은 전략은 훌륭했고 자신 역시 그런 전략을 생각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각의 링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다.
더불어 윤 관장은 자신이 어떤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작전 수립에 한계성이 있었다.
공이 울리고 링의 중앙으로 나가자 브릴랜드의 레프트 잽이 갑작스럽게 송곳처럼 날아왔다.
커팅할 새가 없다.
얼마나 빠른지 초감각의 운동신경이 아니었다면 정통으로 얻어맞을 뻔했다.
최강철은 온몸에서 일어나는 소름을 느끼며 천천히 한 발자국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인파이팅을 펼쳐 브릴랜드의 스피드를 압박하는 전술이었다.
자신은 초인이 아니라 인간의 범주에서 최상위의 능력을 받았을 뿐이다.
루시퍼가 엄청난 체력과 운동신경을 선물했지만 방금 브릴랜드의 왼손 잽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최강철이 다가서자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브릴랜드의 레프트 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잽을 커팅하고 돌진하기에는 브릴랜드의 스텝이 너무 정교했고 감춰두고 있는 오른손이 눈에 거슬렸다.
최강철은 위빙과 더킹, 그리고 스토핑까지 구사해서 레프트 잽을 피하며 브릴랜드의 스텝을 유심히 관찰했다.
놈은 자신의 왼쪽으로 돌고 있었는데 그가 가르곤에게 펼쳤던 전술과 유사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보폭이 크다.
브릴랜드는 왼발 축과 오른발 앞 축 간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놓은 상태에서 연속으로 레프트 잽을 던지며 돌고 있었다.
아웃복싱의 전형.
상대가 돌진해 들어올 경우, 균형을 유지하면서 카운터 블러우를 날리기 위해 보폭을 넓혀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압박 전술을 계속 유지했다.
놈의 오른손이 나오지 않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폭탄을 숨기고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는 적에게 서둘러 접근할 이유가 없다.
더 큰 이유는 경기가 시작되자 최강철의 강철 같은 심장과 천재적인 머리가 공조를 이루며 브릴랜드의 약점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브릴랜드였다.
자신의 레프트 잽을 피하면서 같은 레프트 잽으로만 응수하는 최강철의 소극적인 태도에 서서히 짜증이 난 게 분명했다.
브릴랜드의 레프트 잽이 칼날같이 예리했다면 최강철의 잽은 화살처럼 날카로웠다.
그랬기에 최강철도 몇 대 맞았지만 그 역시 안면이 몇 차례 흔들렸다.
“위잉.”
머리를 슬쩍 옆으로 젖혀 레프트 잽을 피하는 순간 브릴랜드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아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페이크였고 진짜 공격은 레프트 바디였다.
대구경 전선줄에 만 볼트 전류가 흐르는 소리.
브릴랜드의 스트레이트가 귓전을 스쳐 지나며 뿜어낸 것이다.
최강철은 전진 스텝을 멈추고 감각적으로 오른쪽 팔을 내려 암 블로킹으로 옆구리를 막은 후 곧바로 가상의 지점을 향해 레프트 훅을 날렸다.
정확한 타격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스텝으로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옆구리에 펀치가 얹힌 이상 후속 공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레프트 훅은 접근 경로로 파고드는 브릴랜드의 안면을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레프트 훅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을 뿐이었다.
영리한 놈.
반격까지 감안해서 콤비 블로우를 생략한 후 놈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레프트 잽을 날려 오고 있었다.
후후… 재밌다. 그리고 자신에게 당한 가르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브릴랜드의 스텝은 한 마리 우아한 백조를 연상시켰다.
좌우로 움직이는 사이드스텝은 물론이고 공격 시의 전진 스텝은 언제나 적의 반격을 고려해서 체중이 정확하게 양발 축에 배분되어 균형을 이루었다.
최강철이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을 가하는 순간 지체 없이 후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놈은 스스로의 스피드를 자만해서 치고 빠지는 작전을 펼칠 것이기에 먹이를 노리는 것처럼 최대한 많이 움직이도록 몰고 나갔다.
최강철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라운드 중반이 넘기 시작할 때였다.
판단이 섰고 행동이 뒤를 이었다.
이대로라면 1라운드는 놈이 원하는 대로 끝날 것이고 그것은 최강철이 원하는 바가 절대 아니었다.
브릴랜드의 계속되는 단발 공격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결국 놈의 정신을 흔들어놓을 만큼 강력한 공격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 시작은 원거리에서 묵직하게 날아온 좌우 훅을 피한 후였다.
더킹으로 훅을 피한 최강철의 몸이 백 미터 육상 선수처럼 브릴랜드의 몸통을 향해 진격했다.
그런 후 번개처럼 좌우 스트레이트를 터뜨렸다.
처음부터 맞을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도 예상했던 것처럼 나타났다.
브릴랜드가 넓은 보폭을 이용해서 급히 빠져나갈 때가 바로 함정을 놓고 기다렸던 순간이다.
껑충 뛰며 뒤로 물러서는 백스텝을 따라 최강철의 전진 스텝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브릴랜드의 스트레이트와 양 훅이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진즉에 이랬어야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큰 펀치는 피하고 작은 펀치는 맞았다.
브릴랜드의 복부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숏 훅이나 레프트 잽은 맞아 줄 필요성이 있었다.
최강철의 라이트 훅이 브릴랜드의 옆구리를 훑고 나온 것은 적의 레프트 쇼트를 맞고 난 후였다.
아쉽다. 주먹 끝의 감각이 스쳐 맞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 번 공격을 시작하면 그냥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파고들어 한 방이라도 맞춰야 연타를 멈췄다.
난타전이 벌어질 때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은 브릴랜드였다.
최강철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거의 10여 발의 콤비네이션 펀치를 뿜어냈는데, 공격을 끝내고 나면 긴 다리를 이용해서 사정없이 전권에서 물러났다.
그런 브릴랜드를 추격하며 최강철은 여지없이 받은 걸 돌려주었다.
세계 최고의 스피드를 가졌다고 하지만 최강철의 스피드는 그에 못지않았기 때문에 여지없이 한 방씩 허용했다.
최강철의 공격은 장담한 것처럼 턱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유리 턱이란 도발이 농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의 전광석화 같은 펀치들은 모두 안면에 집중되었다.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방식이었으나 최강철은 그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난전이다.
브릴랜드가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서 아웃복싱을 펼치고 있었지만 최강철의 대시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주먹이 한번 부딪칠 때마다 20여 차례 되었다.
“와아, 와아!”
어느새 관중들의 입에서 함성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조금만 더 경기가 격화되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은 두 선수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복싱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가 공격할 때 맞받아치면 되지 않느냔 생각을 가진다.
바로 카운터 블로우다.
그러나 카운터 블로우는 상대의 펀치가 무뎌졌을 때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 지금의 브릴랜드처럼 칼날같이 예리한 펀치 앞에서는 자실행위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안면을 노리고 번개처럼 날아오는 펀치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력으로 방어 기술들을 펼쳐야 하는데 언제 피하면서 때린단 말인가.
그래서 반격을 하기 위해서는 맞아줘야 한다는 거다.
윤 관장이 브릴랜드의 공격 시 복부를 노리란 말을 한 것은 치명타가 아닌 이상 공격을 흡수하면서 같이 때리라는 말이었다.
관중들의 눈으로 봤을 때는 엄청난 난타전으로 보였겠지만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1라운드는 철저한 탐색전이었다.
펀치를 맞춘 횟수는 브릴랜드가 많았다. 실제로 점수도 그가 몇 점씩 앞설 정도로 유효타가 많았다.
하지만 관중들은 그 누구도 최강철이 밀리는 경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라운드 내내 거칠게 브릴랜드를 압박해 들어간 최강철의 인파이팅은 관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강철아, 잘했다. 눈 괜찮냐?”
“괜찮아요. 잘 보입니다.”
윤 관장이 부풀어 오른 왼쪽 눈을 얼음으로 찜질하며 물어 오자 최강철이 입맛을 다셨다.
방어만 생각했다면 맞지 않아도 될 펀치들을 미끼를 물게 만들기 위해 여러 대 맞았기 때문에 왼쪽 눈이 조금 부어올랐던 것이다.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다. 저 자식, 큰소리 빵빵 치고 있지만 내가 봤을 때는 겁먹은 게 분명해. 원래 두려운 놈은 액션이 큰 편이거든. 네 펀치가 얼굴 근처에만 가도 미친놈처럼 도망가잖아.”
“그러다 이 모양 됐잖아요. 경기 끝나면 즉시 문질러야 하니까 계란 꼭 준비해 두세요.”
“알았다, 이 자식아!”
2라운드 공이 올리는 순간 최강철은 링의 중앙으로 나가면서 지체 없이 라이트 롱 훅을 날렸다.
파앙!
얼마나 강력했는지 브릴랜드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역시 노린 곳은 턱.
브릴랜드가 급히 물러서며 잽을 날려 오자 최강철이 하얀 웃음으로 지었다.
그러고는 곧장 전진 스텝을 밟았다.
모든 공격의 선봉은 언제나 레프트 잽이다. 브릴랜드도 마찬가지고 최강철도 그렇다.
최강철이 불쑥 전진하자 브릴랜드가 1라운드와 똑같은 패턴을 구사하며 레프트 잽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양 훅을 날려 왔다.
절대 한자리에 있지 않는다.
언제나 스텝을 변화시키며 펀치를 날리기 때문에 따라잡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더군다나 놈은 도망갈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펀치를 피하며 꾸준히 전진했다.
링이 좁다. 워낙 두 선수가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에 링을 한 바퀴 도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최강철의 눈이 번쩍 빛난 것은 브릴랜드의 스텝과 던져 온 레프트 잽이 미세한 불균형을 이루었을 때였다.
직감상 이런 상태에서 연속 공격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느껴졌다.
더킹으로 고개를 슬쩍 내렸던 최강철의 주먹이 불을 뿜으며 브릴랜드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날아갔다.
빠악!
걸렸다.
자신의 주먹에 닿은 감촉은 너무나 신선해서 살아서 팔팔 뛰어오르는 생선을 잡아먹은 기분이었다.
옆구리가 라이트 훅에 걸리는 순간, 강력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안면으로 쐈다.
하지만 브릴랜드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인상을 슬쩍 찡그리고 있었지만 아직 스텝이 팔팔하게 살아 있던 브릴랜드는 옆구리를 가격당하자마자 백스텝을 밟고 2m나 후퇴한 상태였다.
아, 그 새끼.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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