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35화 (35/308)

[35]

* * *

경기장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비록 서독 출신이 결승에 오른 것은 헤비급의 쥬르겐 판크레헬이 유일했으나 워낙 복싱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에 관중들이 5천 명이나 입장한 상태였다.

대회 주최 측에서 적극적으로 유치한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유한 선수들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2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일행은 마지막 작전 회의를 거친 후 가볍게 몸을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긴장된 시간이었으나 몸을 풀면서 땀이 서서히 배어 나오자 천천히 육체가 화살처럼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사각의 링에 올라 맹수를 사냥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시합이 진행될 때마다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결승전답게 체급마다 치열한 난타전을 펼치며 명승부를 연출했기 때문에 관중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윽고 김동길의 차례가 다가왔다는 걸 들으며 최강철은 몸 풀던 것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도 그의 시합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준결승 때처럼 응원을 하기 위해 그의 라커룸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말했다.

전사의 고독은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해야 되는 것이라고.

그 역시 동의했다. 스스로 맹수의 우리에 들어가는 전사에게 응원이란 행동은 부질없는 짓이다.

* * *

유광호는 혼자 링 사이드에서 김동길의 시합을 관전하며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그를 괴롭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일방적인 경기.

지금까지 해왔던 김동길의 불같은 투지는 가르시아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르시아의 스피드와 펀치력은 정말 대단했다.

모스코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전적이 말해주듯 그의 펀치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경기가 시작되면서 처음 얼마 동안은 팽팽하게 맞섰으나 김동길은 가르시아의 힘에 의해 조금씩 밀리더니 3라운드에 들어와서는 일방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겠다는 김동길의 투혼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3대를 맞으면 반드시 1대는 돌려주면서 끝까지 가르시아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유광호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울리자 안타까운 한숨을 길게 내리 쉬었다.

즐기자고, 원 없이 싸워왔으니 후회하지 말자고 이야기했으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쉬움을 숨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대로 우승자는 가르시아였다.

점수가 워낙 많이 차이 나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어려운 경기였다.

시상식을 마치고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김동길의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불과 10일 사이에 6경기를 치렀고 워낙 난타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힘들게 걸어 나오는 김동길에게 다가가 유광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어깨를 크게 벌려 안아주었다.

최선을 다해 싸운 너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맙다, 김동길. 정말 잘 싸워주었다.

* * *

안내 멘트에 의해 최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동길의 경기 결과가 궁금했으나 알 방법이 없어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나가보면 알겠지.

그가 나가는 길에 시합을 마친 김동길이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김동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강철은 윤 관장과 함께 천천히 라커룸을 벗어났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귀가 먹먹하게 울릴 정도로 관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합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관중들은 다음 경기를 기다리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실내라 그런지 소음이 증폭되면서 수많은 차가 한꺼번에 경적을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상대로 반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먼저 보인 것은 유광호였고 그 뒤로 코치진이 걸어왔는데 그들의 어깨에는 누군가의 팔이 걸쳐져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차갑게 굳어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쳤을 때 박태현 코치의 어깨에 걸쳐 있는 팔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동길의 얼굴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눈과 코, 그리고 입술까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이겨주기를 바랐는데 결국 패배를 한 게 분명했다.

눈이 마주치가 김동길의 얼굴에서 희미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강철아, 미안하다.”

“뭐가요?”

“쪽 팔리게 졌어. 저 새끼 정말 강하더라. 내가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어.”

“괜찮아요. 형이나 나나 언제까지 이길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도 진다는 건… 정말 싫다. 지고 싶지 않았는데 졌어.”

“후회되나요?”

“아니, 후회는 하지 않아. 난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까.”

“그러면 되었어요. 누가 뭐래도 나는 형을 존경합니다.”

“그런 소리는 인마, 선생님들한테나 하는 거야. 강철아, 잘해라. 너는 꼭 이겨줘. 알았지?”

“예, 그럴게요.”

최강철은 자신에게서 떨어져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김동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위로를 했고 그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으나 그 등이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유광호와 국가 대표 코치인 최철환이 멀어져 가는 김동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교대하듯 최강철의 뒤를 따라왔다.

복도를 통해 스텝들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거의 폭탄처럼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먼저 나타난 최강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을 고스란히 맞았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이곳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은 자국 선수가 출전하는 헤비급 경기보다 그가 출전하는 웰터급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재 웰터급은 황금기를 맞고 있는 프로 복싱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체급이었고, 마크 브릴랜드와 최강철의 대결에 대해 서독 신문이 지속적으로 이틀 동안 때렸기 때문에 관중들의 시선은 이번 경기에 집중된 상태였다.

천재 복서로 명명되며 화려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마크 브릴랜드, 그리고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날아온 갈색 폭격기, 허리케인 최강철의 대결은 뮌헨의 복싱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최강철은 경기 진행 요원이 몸과 글러브를 검사한 후 링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며 관중석을 바라봤다.

정말 빈틈없이 관중들로 들어차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체육관을 가득 적시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관중 앞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시합하는 걸 봤지만 직접 그런 현장에 자신이 서자 묘한 흥분감이 전신을 감싸며 휘돌았다.

* * *

더 럼블의 부사장 톰슨은 최강철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연히 마크 브릴랜드 때문이었다.

더불어 각 체급의 우승자들을 면밀히 체크하고 스카우트할 대상을 조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결국은 마크 브릴랜드 때문에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계 선수권대회라고는 하나 아마추어 복싱의 한계로 봤을 때 더 럼블에 스카우트될 정도의 선수를 찾는 건 호수에 빠진 돌멩이를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프로 복싱과 아마추어 복싱의 수준 차는 하늘과 땅만큼 커서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자라 해도 프로무대에 올려놓으면 제대로 버티는 놈들이 없었다.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였고 프로라는 야수의 세계에 대한 적응력의 문제였다.

3라운드만 소화하는 아마추어 복싱과는 다르게 프로 복싱은 기본적으로 10라운드를 소화할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커다란 반칙이 아닌 이상 레퍼리가 경기를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나도 온실에서 자라온 아마추어 선수들은 잡초처럼 살아온 프로 복서들의 밥이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마크 브릴랜드가 주목받는 건 그만큼 그의 기량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준다.

더 럼블이 그를 주목하고 있는 건 온실 속에서 자라왔으나 프로에서 통할 정도의 가공할 스피드와 펀치력, 그리고 테크닉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프로에 무사히 적응만 할 수 있다면 판타스틱 4로 불리는 헌즈와 레너드, 듀란, 헤글러와 승부를 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성공만 한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었다.

톰슨이 최강철은 주목하게 된 것은 마크 브릴랜드의 경기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브르노와의 경기를 본 후부터였다.

감탄이 나왔다.

적의 약점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단박에 목 줄기를 뜯어버리는 강렬한 야수의 본능이 최강철의 몸에서 올올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8강전이 벌어질 때 미리 와서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가장 좋은 링 사이드의 클래스 A석에 앉았다.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최강철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가르곤과의 경기를 보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아웃복싱의 정석을 보여준 건 물론이고 인파이터가 아웃복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쓰는 기술들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경기를 1분 남기고 터졌다.

아웃복싱을 하던 최강철이 마지막 1분 남기고 몰아붙이는 장면을 아직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최강철을 보면서 톰슨은 아마추어 복싱이 온실 속의 화초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란 걸 느꼈다.

놈은 야수였다.

철저하게 계산해서 먹이를 노리며 야금야금 접근한 후 목 줄기를 뜯어버리는 포식자 중 최상위의 맹수 말이다.

즐거웠다.

유능한 스카우터는 천재를 알아본다. 하지만 성공한 스카우터는 맹수를 찾아내서 키운다.

관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굴 줄 아는 맹수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결판이 난다.

최강철이 만약 마크 브릴랜드마저 넘어선다면 놈은 확실한 맹수일 것이고 화려한 테크닉에 밀려 찌그러진다면 고양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최강철이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는 얌전한 천재보다 프로 복싱을 단숨에 휘어잡을 야수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최강철은 맞은편 복도를 통해 다가오는 마크 브릴랜드를 바라보며 글러브를 툭툭 쳤다.

놈은 여섯 명의 스태프들에 끼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마치 세계 챔피언이 입장하는 것과 비슷했다.

브릴랜드가 링에 오르는 순간 최강철은 아주 오래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아무런 효과도 없을 수 있으나 저놈의 심장이 크지 않다면 조금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뭐 하냐, 너?”

“환영 인사 하는 거죠.”

“인마, 저 자식은 너하고 싸우러 온 놈이야. 미쳤어?”

윤 관장이 최강철의 행동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승전, 그것도 최강의 적과 상대해야 하는 최강철이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의 얼굴은 태연했다.

“관장님, 저놈하고 체육관에서 부딪친 거 기억하시죠. 거기서 내가 쟤한테 그랬거든요. 다시 반갑게 만날 거라고.”

“퍽이나 반갑겠다. 저놈 눈빛 봐라. 저게 반가워하는 눈빛이냐?”

“곧 온순하게 변할 겁니다.”

“어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야, 심판이 부른다.”

코너 끝에 매달려 있던 윤 관장이 최강철의 등을 떠밀었다.

심판은 양쪽 선수들을 링 가운데로 부르고 있었는데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 주의 사항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시간이 선수들에게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뇌관 앞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심판의 목소리가 붕 떠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흥분한 관중들이 함성을 마구 내질렀기 때문에 그 음성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심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브릴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크, 다시 보니까 반갑다. 내가 말했잖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네 턱이 유리턱이라고 소문이 나 있더라. 부서지면 큰일이니까 가드 잘 올리고 있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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