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34화 (34/308)

[34]

* * *

최우용은 아침 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고 아들이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기사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신문에는 단신으로 간략하게 경기 결과가 나왔는데 아들의 인터뷰 내용도 담겨 있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많은 내용을 말했겠지만 오직 신문에는 그 내용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들이 떠난 지 벌써 15일이 지났으나 소식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워낙 먼 곳이었기 때문에 전화조차 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소식을 접하게 되자 날아갈 듯 기뻤다.

신문을 보면서 남편이 기뻐하는 모습에 류순덕이 조바심을 냈다.

“뭐여유?”

“강철이가 준결승에 올랐다는구먼.”

“그럼 거기 있는 게 강철이 소식인겨?”

“응.”

“어디 다친 데는 없데요?”

“이 사람아, 그런 건 안 나왔어. 요기 요맨큼만 나왔는데 그런 게 나왔겄어.”

최우용이 기사가 나온 부분을 짚으며 말하자 류순덕이 고개를 길게 빼서 남편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요즘 들어 글자를 배우고 있으나 국민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류순덕이 깨알처럼 적혀져 있는 신문을 읽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기사를 읽어달라고 독촉한 것은 아들에 대한 걱정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아내의 성화에 최우용이 함박웃음을 매달고 천천히 기사를 읽어주었다.

그러자 뒤늦게 나타난 딸들이 난리를 치면서 좋아했다.

하지만 류순덕의 얼굴은 좋은 소식을 접했음에도 웃음을 담지 못했다.

아들이 인터뷰 한 내용을 들은 그녀는 식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그저 가슴을 졸일 뿐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

그런 아들이 남을 때리고 맞아야 하는 권투를 한다는 게 싫었다.

이제 언제 다칠지 모르는 그런 험악한 짓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저 남들처럼 공부 열심히 하고 평범하게 자라 행복하게 살아주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최 씨, 축하혀!”

“허허… 고마워유.”

작업반장과 동료 운전원들이 다가와 손을 붙들고 난리를 치는 통에 최우용이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데 익숙하지 못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박 반장이 불쑥 입을 연 것은 직원들의 축하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그나저나 신문에 보니까 오늘 시합이 벌어진다고 하데. 전화라도 해보지그려.”

“서독까정 어떻게 전화를 해유.”

“국제전화 있잖여.”

“난 전화번호도 몰러. 나중에 신문에 나오겄지. 자, 그만하고 일들 나갑시다. 김 주사 들어오믄 또 잔소리 들어야 하잖어.”

“그려, 그놈 상판대기 나타나믄 골치 아퍼. 다들 가세.”

성질이 지랄 맞은 김근조의 이름이 나오자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박 반장이 먼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그 뒤를 직원들이 주욱 따랐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가을이 되면서 국도 주변에 나뭇잎이 잔뜩 떨어졌고 포장 보수 공사도 여러 건이 있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수많은 생각이 떠올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운전을 할 때 정신이 분산되면 사고 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들이 자꾸 링에서 쓰러지는 환상이 자꾸 그를 괴롭혔다.

다행스럽게 일을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운행 일지를 적었다.

이 일만 끝나면 퇴근이 가능했기에 운전원들의 하루 일과는 운행 일지를 적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적막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은 저승사자 김근조가 관장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누구 하나 떠들지 않고 자신들의 할 일만 했다.

따르릉따르릉!

고요한 사무실에 울린 전화벨 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끌어모았다.

이 시간이 되면 전화 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전화벨은 김근조가 서류를 찾느라 일어난 사이에 끊임없이 울려댔다.

“여보시오, 어디라구요? 서독, 최우용 씨 말입니까?”

뒤늦게 전화를 받았던 김근조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최우용을 바라보았다.

국제전화란 것은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그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최 씨, 아들 전화라네. 받으시오.”

김근조가 내민 전화기를 향해 최우용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서독에서 온 전화라면 최강철이 자신을 찾는 게 분명했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저 강철입니다.

“아이구, 어찌 된겨. 거기서 여그가 얼만데 전화를 혀?”

-기쁜 소식 전해 드리려고요. 아버지, 저 결승전에 진출했어요.

“정말이냐! 잘혔다. 잘혔어.”

소식을 전해 들은 최우용이 펄쩍 뛰었다.

김근조를 비롯해서 나머지 직원들이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최우용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오직 아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뿐이었다.

-아버지, 이틀 후에 결승이에요. 꼭 이기고 돌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려그려. 강철아… 꼭 몸조심혀야 헌다.”

* * *

청와대.

전두환의 앞에는 쿠데타의 주역들인 장세동과 허삼수, 허화평이 고급 소파에 좌우로 앉아 있었다.

총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대한민국 정치판을 완전히 뒤집은 채 정권을 잡은 그들의 앞에는 최고급 쌍화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전두환이 커피를 싫어했기 때문에 회의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였다.

오늘 회의는 정부의 조직 축소에 관한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전두환이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낸 건 정부 조직 축소안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일행들이 느긋하게 차를 마실 때였다.

“자네들, 그거 알아?”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질문.

아무리 세 사람이 심복들이라도 해도 이럴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같이 지내온 세월 동안 익혀 온 것이 있으니 심복들은 미소만 지은 채 전두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입술 끝이 올라가 있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반대로 눈꼬리가 뱀처럼 올라가면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나타내기 때문에 지금처럼 미소를 지으면 반병신이 된다.

“김동길이 하고 최강철이 결승전에 올랐다는구만.”

“복싱 세계 선수권대회 말씀이군요.”

“맞아.”

“저도 들어오면서 들었습니다.”

“그것참 기특한 놈들이야. 지금까지 거기서 금메달 딴 놈들이 없다면서?”

“예, 각하. 워낙 세계 수준이 높아서 한 번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어떨 것 같나?”

“두 놈 다 잘하는 모양입니다. 특히 최강철 이놈은 22번이나 연속으로 KO승을 거두다가 이번 준결승에서 아쉽게 판정으로 이겼다더군요. 하지만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동길과 결승에서 싸우는 쿠바의 카를로스 가르시아는 저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최강철과 싸우는 마크 브릴랜드는 천재 복서라고 불리는데 차기 세계 챔피언이라 소문날 정도로 뛰어나다고 합니다.”

비서실장 장세동이 선수를 쳐서 대답했다.

전두환이 워낙 권투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웬만한 권투 정보에 관해서는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어렵다는 거야?”

“…예.”

“권투가 유리한 게 어디 있어. 일단 부딪치고 부셔봐야 결과가 나오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워낙 대단한 놈들이라서요.”

“결승전이 언제라고 했지?”

“모레 현지 시각 2시부터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슨 일들 있나? 별일 없으면 모여서 오랜만에 같이 복싱이나 보지?”

“저, 각하, 저희들은 스케줄이 없는데 방송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방송사에서 중계 팀을 파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뭔 소리냐? 그렇게 중요한 경기에 왜 중계 팀을 파견하지 않았단 말이야!”

“88올림픽 유치에 홍보를 올리느라… 그리고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지금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서 방송사 측이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런 병신 같은 놈들, 그거 지금이라도 할 수 없어?”

전두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그가 화를 냈다는 건 당장 내일 아침 KBS와 MBC가 초토화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자가 화를 냈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위성 중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틀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에잉, 쯧쯧… 그것참 아쉽구만. 결승전을 봤으면 딱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다음 기회로 미루시죠. 내년 2월 달에 최충일 세계 타이틀전이 벌어진다니까 그때 모여서 진하게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해.”

결전 전야.

윤 관장이 들고 온 마크 브릴랜드의 시합 영상을 보면서 최강철은 눈을 지그시 오므렸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빠른 놈이었다.

자신 역시 스피드라면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했지만 마크 브릴랜드의 스피드는 달리는 표범을 연상시킬 만큼 빨랐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하다면 괜찮겠지만 마크 브릴랜드의 균형 감각은 탁월해서 어느 순간 어느 각도에서도 펀치가 나왔다.

못 치는 펀치가 없다.

아마추어의 강자들은 스트레이트에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마크 브릴랜드는 면도날처럼 예리한 스트레이트와 강한 훅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어퍼컷과 복부 공격도 능란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작전을 짜는 건 관장님 임무잖아요.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이 자식아, 네가 언제부터 내 작전을 그렇게 잘 따랐어. 뻑 하면 삑 사리 내는 놈이 뻔뻔하게 그런 소리가 나와!”

윤 관장이 소리를 빽 지르자 최강철이 배시시 웃었다.

이런 모습만 본다면 영락없이 18살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난 솔직히 말해서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뭔데요?”

“놈의 스피드를 죽이지 못하면 승산이 없어. 하지만 다리를 잡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복부 공격?”

“귀신같은 놈. 내가 가르쳤지만 넌 타고났다. 정말 대단해.”

대답을 들은 윤 관장이 손을 번쩍 들어 최강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었기에 부리나케 물러났으나 이미 윤 관장은 공격을 끝내고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놈이 워낙 빨라서 타이밍을 잡기는 어려울 거다. 하지만 기회는 있어. 바로 놈이 공격을 감행할 때 카운터로 승부를 보는 거야.”

“일단 맞아야겠군요.”

“되로 주고 말로 받아내는 방법이지.”

“어째 작전이 허술한 것 같은데요. 코치가 선수한테 맞으라고 주문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인마, 이것도 비디오를 10번이나 돌려보고 겨우 생각해 낸 거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효율적인 작전을 짜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그러다가 눈탱이 시퍼렇게 부으면 관장님이 책임질 겁니까?”

“이기기만 해. 계란 한 판 사다가 내가 문질러 줄게.”

* * *

시간의 흐름이 두렵다.

결승전의 아침이 밝아오자 한국의 스태프진은 팽팽한 긴장 속에 사로잡혀 농담 한마디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김동길의 코치인 박태현과 최강철의 코치인 윤성호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는데 누군가 말을 붙이면 큰일이라도 낼 것만 같았다.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끝마친 일행이 경기장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 그 긴장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 긴장을 풀어헤친 사람은 바로 일행을 이끄는 사무장 유광호였다.

그는 버스에 일행이 모두 타자 자리에 앉지 않고 운전석 옆에 서서 좌석 옆으로 올라온 기둥을 잡더니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시합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입이 가벼워서 도저히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다. 동길이하고 강철이가 결승전에 올랐다고 회장님한테 보고했더니 쉽게 믿지 않더라. 목소리가 뭘 잘못 먹었냐는 투였는데 보고를 하는 내가 이상해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 그만큼 너희들이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는 거야. 최소한 은메달은 확보해 놨으니 너희들은 한국 복싱 역사를 새롭게 쓴 사람들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이 결승전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가 나오든 우린 최선을 다 했잖아. 결승전이라고 뭐 별거 있냐.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우리 오늘은 축제에 참석한다고 생각하자. 멋있고도 영광스러운 파티 말이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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