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와아, 와아!”
관중들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당당하게 링을 도는 최강철을 향해 뜨거운 함성을 보내주었다.
벌써 22연속 KO승.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RSC와 KO승이 구분되지만 프로 복싱에서는 그에 대한 구분이 없다.
레퍼리 스톱이 되었다는 건 상대가 위험에 처했거나 전투 능력을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KO보다 훨씬 더 일방적인 경기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미국의 스포츠라인 민완 기자 토머스는 이번 세계 선수권을 취재하기 위해 같이 날아온 스포팅뉴스의 할리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10여 명의 기자가 날아왔는데 마크 브릴랜드의 결승 장면을 생중계하기 위해 곧 폭스TV에서도 도착할 예정이었다.
마크 브릴랜드의 상품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차세대 세계 챔피언으로 꼽히는 그의 기량은 미국 언론을 뮌헨으로 집중시킬 만큼 뛰어났다.
할리는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뭔가를 부지런히 적고 있었다.
“이봐, 뭘 그렇게 적어?”
“기사 송부하려고, 크크크……. 이게 웬 횡재인지 모르겠네.”
“최강철에 대한 기사를 보낸다고?”
“당연하잖아. 아트 복서 마크 브릴랜드와 허리케인 최강철. 어때, 제목 근사하지?”
할리가 자랑스럽게 헤드라인 제목을 뽑아냈다.
허리케인.
나중에 최강철을 상징하는 별명은 이때 처음으로 거론된 것이다.
“마치 결승전에서 두 놈이 마주칠 거라 확신하는 것 같구만.”
“최강철은 가르곤까지 잡아냈어. 가르곤이 누구냐, 마크 브릴랜드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한 명이었다고. 그런 놈이 개박살이 났는데 누가 최강철을 잡아? 내가 봤을 때 분명히 결승은 마크와 최강철이 부딪친다.”
“이봐, 속단하지 말라고. 저놈의 준결승 상대는 맨프레드 제론카야. 여긴 제론카의 홈 링이라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더군다나 제론카는 가르곤을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센 놈이라 지켜볼 필요성이 있어.”
“아무리 홈 링이라도 캔버스에 쓰러지면 심판도 어쩔 수 없거든. 더군다나 내가 알기로 제론카의 아내가 암 투병 중이라고 하던데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야. 어제도 병원에서 밤을 새웠다고 하더군.”
“그래? 그럼 준결승 경기는 싱거울 수도 있겠네.”
“토머스, 자넨 마크와 최강철이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나?”
“불행하게도 난 최강철의 시합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야. 이전 시합들을 봤다면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말하기 어렵군.”
토머스의 대답을 들으며 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최강철의 시합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리는 신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복싱은 상대성이 강한 스포츠라서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난 마크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왜?”
“마크의 수비력은 가르곤보다 한 수 위야. 더군다나 스피드가 발군이지. 최강철이 가르곤을 요리할 수 있었던 것은 스피드 면에서 압도했기 때문으로 보여져. 그러나 마크는 최강철보다 더 빠른 놈이라고. 거기에 물러나면서 터지는 카운터는 또 어떻고. 최강철은 결국 마크한테는 안 될 거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어. 자네도 혹시 그런 거 아닌가?”
“이 사람아, 나는 복싱 전문 기자야. 객관적 사실만 가지고 판단해.”
“하하하… 그러길 바라네. 하지만 나는 최강철이 이길 거라고 생각되는군. 마크의 최대 단점은 맷집이 약하다는 거야. 반면에 최강철의 펀치는 면도날 같지. 22연속 KO승이 그냥 나온 게 아니잖아.”
“저녁 내기?”
“콜!”
토머스가 화통하게 외치자 할리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의견은 달랐지만 기대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와 즐거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할리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링 사이드에 있는 톰슨을 확인한 후였다.
톰슨은 세계 최고의 프로모터 돈 킹이 만든 더 럼블의 부사장이었다.
“톰슨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구만. 안 그래?”
“충분히 탐낼 만하잖아. 내가 봐도 상품성은 마크보다 최강철이 좋아.”
“문제는 저놈이 한국인이라는 거야. 한국 놈을 스카우트하기엔 조금 문제가 있지 않겠어? 흥행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야.”
“뭔 소리야. 파나마의 듀란도 있고 푸에르토리코의 베니테스도 있어. 돈 킹은 실력만 있으면 국적은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최강철을 그 사람들과 비교하는 건 너무 심하구만. 듀란과 베니테스는 불세출의 영웅들이야!”
“이 사람 왜 흥분하고 그래. 말이 그렇다는 건데.”
* * *
최강철이 경기에 이기자 전부 링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던 한국 스태프들은 한 뭉치가 되어 라커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직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는데 모두 완벽한 승리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좋아한 사람은 복싱 협회 사무장 유광호였다.
그는 김동길에 이어 최강철까지 4강에 오르자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약속한 대로 오늘 저녁은 불고기 파티할 거니까 전부 기대하고 있어. 난 협회에 보고 좀 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숙소로 같이 이동하자고.”
유광호가 서둘러 라커룸을 나가자 왁자지껄 떠들던 김동길과 코치진이 윤 관장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윤 관장은 경기가 끝나고 라커로 들어온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이 슬그머니 다가가 입을 연 것은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둘만 남았을 때였다.
“화 나셨어요?”
“이 자식아, 말 걸지 마라. 나 정말 화 많이 났거든!”
“에이, 이겼는데 왜 이러세요.”
“코치 말도 안 듣는 놈이 그게 할 소리냐. 이기면 모든 게 용서될 줄 알았어?”
“제가 말을 듣지 않을 게 아니라 작전이 변경된 거죠. 상대가 그로기에 몰리면 공격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거짓말하지 마. 그때 가르곤은 그로기 상태 아니었어. 우리가 경기 들어갈 때 뭐라고 그랬냐. 마지막까지 조심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어!”
“경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그만 화 푸세요.”
“아, 됐고. 말 붙이지 마라. 나 혼자 있고 싶다.”
윤 관장이 최강철에게서 휙 돌아서며 등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애인에게 화내는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다가가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삐졌을 때는 스킨십만큼 좋은 것도 없다.
“코치님, 사랑합니다.”
“지랄하지 마. 안 속아.”
“오늘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내일 준결승 있는데 작전 회의 해야죠. 서독의 제론카는 스트레이트가 좋다면서요.”
“내가 그놈 예선전 시합을 지켜봤는데 스트레이트만 좋은 게 아니야. 스트레이트와 교차하면서 터지는 양 훅의 타이밍이 기가 막혀…….”
슬쩍 준결승 상대인 제론카를 거론하자 등을 돌렸던 윤 관장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분석했던 내용들을 주절주절 꺼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
윤 관장은 누구보다 최강철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었으니 작은 서운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한국의 언론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동길과 최강철의 4강 진입 소식이 복싱 협회를 통해 알려진 후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서독 특파원은 스포츠 전문 기자들이 아니라 국제 정세에 능통한 베테랑 기자들이었기 때문에 복싱에는 문외한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곳을 찾은 것은 본사의 성화가 컸기 때문이다.
자칫 둘 중 하나라도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다면 신문을 보는 독자들에게 망신살을 뻗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취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전문성도 부족할 뿐 아니라 특파원이라는 우월 의식으로 인해 간단한 인터뷰만 마치고 돌아갔다.
대신 성화를 부린 것은 미국과 유럽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김동길과 최강철이 4강에 오르자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취재했는데 불고기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최강철은 더했다.
국내 언론조차 직시하지 않고 있던 22연속 KO승에 대하여 그들은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준결승은 김동길이 출전하는 주니어 웰터급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상대는 유고의 미르코 푸조비치였는데 인파이팅이 강한 걸로 알려진 선수였다.
워낙 강한 상대였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예상은 비관적이었다.
최강철이 라커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김동길이 출전 준비를 하면서 가볍게 섀도복싱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왜 왔어. 너도 바쁠 텐데?”
“응원하려고요.”
“인마, 다음 시합이 너야.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준비 잘해.”
“형, 꼭 이길 겁니다. 형의 투지라면 푸조비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맙다.”
김동길의 웃음을 보면서 최강철은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시합에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의 시합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바로 다음이 그의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 * *
유광호가 펄쩍 펄쩍 뛰면서 김동길이 이겼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기량에서는 딸렸지만 불꽃같은 투혼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푸조비치를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
“강철아, 이제 너만 이기면 된다.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광호가 따라붙으며 계속 떠들었으나 그 목소리는 관중들의 함성에 파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서독 관중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준결승에서 붙는 제론카의 고향이 바로 이곳 뮌헨이었기 때문이다.
락커룸에서 빠져나와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합을 마치고 돌아오는 김동길을 만났다.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격렬한 경기였는지 그의 얼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철아, 잘해.”
“형, 이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열심히 할게요.”
“땀만 닦고 나와서 볼게. 꼭 이겨라.”
“예.”
오고 가는 진심이 따뜻했다.
격려를 하는 김동길도 대답을 하는 최강철의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이 들어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최강철의 KO 행진이 멈춘 것은 바로 제론카에 의해서였다.
1라운드 탐색전에 이어 2라운드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시도했지만 제론카는 완벽한 방어 기술을 선보이며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최강철이 무기력한 경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연신 터지는 그의 활화산 같은 콤비 블로우는 일방적으로 제론카를 응원하는 서독 관중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식혀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론카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글러브의 차이 때문이다.
아마추어 경기는 웰터급의 경우 12온스짜리를 쓰는데, 프로에서 쓰는 8온스 글러브에 비해 크고 너클 파트가 두껍게 제작되어 충격이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제론카처럼 허리를 웅크리고 완벽한 가드 상태에서 시합을 하는 선수는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제론카가 적극적인 공격 대신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 있는 두려움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제론카는 바짝 긴장된 상태로 나섰는데 최강철이 펀치를 낼 때마다 공격을 멈추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홈 관중들 앞에서 쓰러지는 것이 싫었던 걸까?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복싱 선수가 상대가 두려워 맞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은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간 병사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분명 그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사각의 링은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나이들의 세상이다.
자신을 스스로 극복하며 고독과 싸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비정한 세계에서 어떤 이유가 있어야 제론카처럼 슬픈 눈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아쉽다.
마지막 공이 울리는 순간까지 몰아붙였으나 완벽한 방어벽을 치며 시간을 보낸 제론카를 쓰러뜨리지 못하자 진득한 아쉬움이 가슴을 적셨다.
경기는 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워낙 커다란 점수 차이였기 때문에 발표는 금방 되었는데 서독 관중들은 제론카를 향해 무차별적인 야유를 퍼부었다.
제론카는 얼굴을 석상처럼 굳힌 채 승부가 발표나자마자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링을 떠났다.
역시 뭔가가 있다.
윤 관장이 함박웃음을 흘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KO 행진이 깨진 것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그저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지며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래, 그런 거지.
세상이 어찌 내가 생각한 대로만 살아지겠는가.
달려온 윤 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뜨거운 포옹으로 그의 기쁨을 한껏 느꼈다.
이제 한 명만 남았다.
천재 복서라 불리는 마크 브릴랜드.
그는 제론카처럼 경기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 오늘처럼 지루한 경기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너와 나의 마지막 불꽃같은 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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