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유광호는 1차예선 경기를 승리로 마친 선수들과 링 사이드에 자리를 차지한 채 최강철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세컨의 리드는 윤성호가 봤지만 국가 대표 전담 코치인 최철한도 지원하기 위해 코너에 가 있어 이곳에는 그와 선수들밖에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장으로 인해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최강철이 국내에서는 최강자로 등극했으나 세계 대회에 나갈 때마다 국가 대표들이 퍽퍽 나가떨어졌기 때문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로 나온 놈은 백전노장이었고 같은 체급인데도 덩치가 훨씬 더 커 보였다.
“으…….”
1라운드를 지켜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브르노의 주먹은 정통으로 한 대만 맞으면 쓰러질 만큼 강력했는데 놈은 처음에 잠깐 탐색전을 벌이더니 쉴 새 없이 압박을 가하며 최강철을 몰아붙였다.
휴우.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옆에 있는 선수들의 표정을 흘깃 쳐다보자 안색이 잔뜩 흐려져 있는 게 보였다.
그들 역시 게임이 어렵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서서히 패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던 모양이었다.
최강철.
대표 팀의 막내였고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놈인데 이상하게 뭔가가 달랐다.
그를 대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어른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조숙해서 그런 걸까?
지금 옆에 서 있는 선수들이 전부 최강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선배들을 대하는 그의 행동이 언제나 예의 바르고 착했기 때문이다.
2라운드에 들어가자마자 경기의 양상이 바뀌는 걸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아났다.
국내에서 그의 혼을 흔들어놨던 최강철의 패기와 스피드, 그리고 무차별적인 연타 능력까지.
웅성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리는 경기를 하던 최강철이 브르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대회를 관전하기 위해 들어왔던 서독 관중들과 대회 관계자, 심지어 다른 나라의 선수들마저 눈이 둥그렇게 변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브르노를 링 줄에 묶어놓고 빛살처럼 터져 버린 최강철의 콤비네이션 연타 공격에 브르노가 침몰해 버리자 관객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브르노가 쓰러지는 순간 유광호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그 상태 그대로 선수들과 함께 미친 듯이 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막내 귀염둥이. 만세다, 최강철!”
최강철까지 1차 예선을 통과하자 유광호는 없는 주머니를 털어 선수단을 한국 식당으로 데려가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맛보는 불고기는 꿀맛도 그런 꿀맛이 없을 만큼 맛있었다.
윤성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유광호와 어울려 적당히 취할 정도로 소주까지 마셨다.
회식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더없이 즐거워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2차 예선이 치러지면서 점점 무겁게 변하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경량급의 유망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2차 예선을 통과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김동길과 최강철뿐이었다.
김동길은 2차 예선에서도 프랑스의 레오를 레퍼리 스톱으로 때려잡고 8강에 올랐는데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최강철은 김동길보다 훨씬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헝가리의 자노스를 3라운드에서 또다시 KO로 잡아내며 서서히 언론의 관심을 끌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벌써 21연속 KO승.
그의 기록은 3라운드로 치러지는 아마추어 경기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그의 이름이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날아온 세계 언론의 기자들에게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내 언론은 잠잠했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8강에 2명이 올랐지만 국내 언론은 군사정권이 홍보에 열을 올리는 88올림픽 유치 성과에 매달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더불어 그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직 성과가 눈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복싱은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전례가 없었다.
워낙 세계 복싱의 수준이 높았고 경량급의 유망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며 중량급에 해당하는 김동길과 최강철만 남게 되자 경기 결과를 보고 받은 복싱 협회에서 까지 기대감을 슬며시 접고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최강철의 다음 상대는 2년 전 벌어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쿠바의 갤럭시 가르곤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이 유력시되는 절대 강자.
그의 존재는 정보가 부실한 한국 복싱 협회에까지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최강철은 유광호가 주최 측에 부탁해서 겨우 빌린 비디오 플레이어를 통해 가르곤의 경기를 윤 관장과 분석하며 8강전을 기다렸다.
세계적인 선수의 레벨이란 게 어떤 건지 가르곤은 비디오에서 확실하게 눈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번개처럼 빠른 콤비네이션 공격, 끝없이 전진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펀치는 가히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전, 후진 스텝과 사이드스텝의 전환은 또 어떠한가.
상대의 공격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이는 방향 전환, 그리고 반격을 노리는 타이밍이 하나의 정교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완벽에 가까웠다.
아마추어 전적 131승 7패, 85KO승.
전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공산권 국가인 쿠바 출신이 아니었다면 벌써 전향해서 프로 복싱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
“강철아, 놈은 끝없이 전진하면서 상대를 끝장내는 놈이다. 브르노처럼 발도 느리지 않아.”
“그렇네요.”
“서두르면 당할 수도 있어. 철저하게 계산된 복싱을 하는 놈이야. 브르노처럼 콤비네이션의 패턴도 단순하지 않고…….”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니 껄끄러운 이야기인 것 같았다.
짐작이 간다.
그러나 최강철은 모른 체하고 그의 의중을 건드렸다.
“관장님은 제가 이기기를 바라시죠?”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말해보세요. 이 경기 어떻게 치를까요?”
“내 생각에… 이 경기는 아무래도 끝까지 가야 될 것 같다. 강철아 우리 욕심 부리지 말고 철저하게 아웃복싱으로 가자. 권투는 꼭 KO를 시켜야 이기는 경기가 아니야.”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윤 관장의 생각은 최강철의 압도적인 스피드를 이용해서 점수 위주의 경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21경기 연속 KO승을 이어나가는 자신의 선수에게 판정으로 가자는 제안을 한다는 게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긴지 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반드시 상대를 KO 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KO 행진을 이어온 것은 상황이 그렇게 되었고 상대하는 선수들의 레벨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윤 관장을 보면서 여과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좋은 전략이네요.”
“화 안 나냐?”
“왜요?”
“전적으로만 보면 가르곤보다 네 펀치가 더 좋잖아. KO율이 100%인 놈이 아웃복싱을 펼친다는 건 쪽팔리는 일이지.”
“방금 관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철저하게 이기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아웃복싱을 한다고 해서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은 아니죠.”
“애 늙은이 같은 놈. 하여간 네 머릿속에는 능구렁이 열 마리는 들어가 있는 것 같아.”
* * *
김동길이 8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미르첸코를 잡아내고 4강에 오르자 유광호를 비롯한 코치들의 입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그가 이기자 선수들이 2차 예선에서 대거 탈락했기 때문에 잔뜩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
미르첸코는 차기 올림픽에서 메달이 유력시되는 강자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예선전에서 떨어진 선수들이 일찍 귀국했기 때문에 이제 7명만 남은 상태였다.
이윽고 최강철의 순서가 다가왔을 때 4강에 오른 김동길이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워낙 난타전을 벌였기 때문인지 오른쪽 눈이 부어오른 상태였다.
“강철아, 긴장되냐?”
“당연히 긴장되죠.”
“하하… 솔직한 놈. 넌 그런 게 마음에 들어.”
김동길이 최강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동생을 만져주는 손길이었다.
그의 나이는 24살이었으니 최강철보다 6살이나 많다.
“형이 선배니까 조언하나 해줄게. 그래도 되지?”
“그럼요.”
“나는 벌써 권투를 시작하 지 7년이나 되었어. 처음은 너처럼 화려하지 못했다. 지기도 여러 번 졌고 권투가 하기 싫어서 도망 다니기도 했어. 맞고 때려야 한다는 게 지겨웠거든. 하지만 눈을 떠보면 어느샌가 링에 서 있더라. 나한테 권투는 운명이었던 거지. 나는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권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지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거든. 강철아, 이번 경기에서 나는 네가 권투를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운명을 믿는 사람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링은 외로운 곳이잖아. 그 링이 너에게 주는 고독을 꼭 극복해 주기 바란다.”
“고맙습니다. 반드시 기억할게요.”
링에 올라 서서히 걸어 들어오는 가르곤을 바라보자 한 마리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호랑이가 연상되었다.
사람마다 기세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드러움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과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르곤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 줄기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강함뿐이었다.
링에 오른 가르곤이 바짝 다가서자 그 기세가 훨씬 강해졌다.
그는 천천히 최강철을 향해 걸어왔는데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위협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뿜어내는 기세다. 자신의 기를 죽이기 위한.
빙긋 웃어주었다.
그의 압박이 대단했으나 최강철은 하얀 웃음으로 그의 압박을 단숨에 풀어냈다.
이봐, 가르곤.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
권투는 주먹으로 하는 것이지 그런 싸가지 없는 눈빛으로 기를 죽이는 게 아니야.
최강철이 웃었으나 가르곤은 사나운 시선을 풀지 않은 채 눈싸움을 걸어왔다.
심판이 주의 사항을 주고 있었으나 그는 아예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최강철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나에 대한 증오냐, 아니면 네 투지를 끌어 올리기 위한 수단이냐.
나는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네가 가진 어떤 이유보다 더 절박하고, 더 비참했으며, 더 괴로운 것이니까.
심판의 주의 사항을 듣고 코너로 돌아오자 윤 관장이 물병을 내밀어 입술을 축여주었다.
“강철아, 작전대로 하면 이긴다. 알았지?”
“예.”
“절대 무리하지 마.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제가 이기면 우리 불고기 한 번 더 먹어요. 그 집 불고기 죽여주더라고요.”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윤 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대답한 건 링에 가까이 다가와 있던 유광호였다.
“인마, 이기기만 해. 네가 이기면 내가 오늘 그 집 불고기 씨를 말릴 테니까!”
공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링의 중앙으로 나갔다.
가르곤에게는 탐색전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은 모양이다.
전진 스텝을 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탱크를 연상시켰다.
가드가 철저하게 올라가 있었고 거리를 재며 던지는 레프트 잽이 위협적이었다.
파악, 팍, 팍!
레프트 잽에 스토핑을 거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가르곤의 스트레이트가 날아왔다.
암 블로킹으로 차단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가격된 팔뚝이 은은하게 저려올 만큼 위력적인 펀치였다.
브르노의 펀치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르곤의 펀치는 그보다 한 수 위다.
거리를 확보하며 사이드로 돌다가 기습적으로 레프트 잽을 날렸다.
쉭, 쉭.
단 두 번의 레프트 잽.
하지만 그 레프트 잽은 정확하게 가르곤의 전진을 틀어막으며 얼굴을 훑고 나왔다.
가르곤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최강철도 스텝을 멈추고 마우스피스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르곤, 너 그거 알아?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지옥을 선물해 줄게. 네 권투 인생에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지옥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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