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공식 행사는 언제나 지루하다.
대회의 개최를 알리는 행사는 거의 1시간 가까이 진행되었기에 온몸이 비틀렸다.
각국의 선수들과 코치진이 모두 참석했기 때문에 참석 인원은 700명이 훌쩍 넘었다.
이번 세계 선수권대회는 12체급에서 우승자를 가리는데 체급에 따라 참석 인원이 전부 달랐다.
일부 국가에서 강세를 보이는 슈퍼 헤비급의 참여 인원이 9명으로 가장 적었고 체급이 작아질수록 참여 인원이 많아졌다.
최강철이 출전하는 웰터급은 28명이 참가했는데 경기 시작은 이틀 후부터 벌어지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대회 기간은 모두 11일.
예선전은 8일간에 걸쳐 체급별로 진행되고 3일 동안 준결승과 결승을 치러 우승자를 가려내는 방식이었다.
공식 행사는 거창했다.
세계 아마추어 복싱 협회의 인사들이 대거 등장해서 선수들을 격려했고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역시 복싱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인가 보다.
행사장 주변에는 수많은 기자가 각국에서 날아와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특히 유럽 쪽과 미국의 기자들이 집중적으로 몰렸는데 차세대 세계 챔피언들이 이곳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선수에게 시선이 집중된 건 아니다.
그들은 각 체급에서 우승이 유력한 선수들에게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뜨렸다.
현재 전 세계 권투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웰터급의 차세대 기대주 천재 복서 마크 브릴랜드는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었다.
한국의 대표단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 특히 선진국 쪽의 선수들은 공식 행사를 거행하는 동안에도 웃고 떠들며 즐겼다.
행사가 거행되면 언제나 경직된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한국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담긴 것은 오래된 군사독재에서 비롯된 폐습이 분명했다.
최강철은 행사장에 들어선 후 한 칸 건너 서 있는 일본 대표단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주욱 내밀었다.
그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대표단과 달리 유럽 선수들처럼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잘산다는 건 자부심과 마음의 풍요로움이 공존하는 모양이다.
앞쪽에서 오래 서 있는 게 지루했던지 온몸을 비틀고 있는 유광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한국 킬러라는 히로키의 존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 사무장님, 히로키가 누굽니까?”
“그놈 안 왔다.”
“왜요?”
“시합하다가 다쳤단다. 잘됐지, 뭐. 그 쌍놈의 새끼, 다리몽둥이가 똑 부러져서 이젠 안 봤으면 좋겠어.”
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그만큼 히로키에게 당한 것이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광호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다 안도감이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재수가 없어 이번 대회에서 히로키와 부딪혀 또다시 진다면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낸다 해도 비난을 면치 못할 테니 말이다.
아직도 한국은 일본에 대한 증오와 경쟁심이 지독하리만치 깊었기 때문에 유독 히로키에게 힘 한 번 못 쓰고 나가떨어질 때마다 복싱 협회는 국민들로부터 난타를 당하곤 했다.
최강철은 유광호의 표정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히로키, 재수가 좋은 놈이다. 그리고 유광호는 재수가 없다.
만약 히로키가 이번 대회에 나와서 자신과 부딪혔다면 유광호는 평생의 소원을 풀었을 것이다.
* * *
대회가 시작되어 한국 선수들이 차례대로 출전하자 유광호를 비롯해서 코치진은 팽팽한 긴장 속으로 사로잡혀 갔다.
하지만 시합이 진행될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는 환호가 연신 터져 나왔다.
역시 한국은 경량급이 강했다.
최강철은 제외하고 1차 예선에 출전한 선수들이 모두 승리를 거두자 유광호와 코치진의 입이 전부 헤벌쭉하게 찢어졌다.
특히 우려했던 주니어 웰터급의 김동길이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1차 예선을 통과하자 일행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드디어 최강철의 출전이 다가오자 선수단이 다시 긴장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른 체급은 예선 통과가 예상되었으나 최강철이 출전하는 웰터급은 중량급으로 분류되었고 지금까지 약세를 면치 못해 예선 통과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전을 앞둔 최강철에게 유광호가 슬며시 다가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강철아, 그냥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세계 대회라고 쫄면 가진 기량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알았지?”
“예.”
“져도 좋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사정없이 패버려. 국내에서 하던 것처럼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그를 향해 최강철이 하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이 웃음이 위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의 첫 상대는 이탈리아의 브르노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협회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긴 이해도 된다.
인터넷은 당연히 안 됐고 비디오도 거의 없는 시절이었으니 타국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최강철은 주최 측에서 배포한 자료만 참고해서 시합을 해야 했는데 브르노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복싱 경력이 9년이나 된 베테랑이었다.
128전 102승 26패. 그중 녹아웃이 56번이나 된 걸 보니 펀치력이 강한 선수다.
이번 대회는 국제 룰로 치러지면서 헤드기어를 쓰지 않았다.
헤드기어에 대한 논란은 수도 없이 많다.
과학적 분석으로 봤을 때 일부는 머리를 보호해 준다고 했으나 다른 한쪽은 헤드기어가 뇌에 더 커다란 손상을 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헤드기어를 낄 때보다 펀치를 직접적으로 맞았을 때의 순간 대미지가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펀치력이 강한 선수가 유리한 국면으로 경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 * *
정식 국가 대표 코치가 있었으나 세컨은 윤 관장이 봤다.
누구보다 최강철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국가 대표를 담당하는 최철한 코치는 두말없이 윤 관장에게 세컨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강철아, 사무장이 한 말은 깨끗하게 잊어. 그 사람은 널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내가 봤을 때 넌 어떤 놈도 이길 수 있어. 내 말 믿지?”
“그럼요.”
“씨발, 우리 오늘 화끈하게 사고 한번 치는 거야!
“좋네요. 관장님이 이렇게 펄펄 뛰는 걸 보니까. 주눅 들어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이 자식은 꼭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 어쨌든 1라운드는 탐색전으로 보내. 저 자식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난 후에 때려잡자.”
“알겠습니다.”
최강철은 윤 관장의 주문에 즉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맹수는 아무리 약한 먹이를 잡을 때도 기회를 노리며 끈기 있게 기다리다가 단숨에 목 줄기를 뜯어버린다.
링의 중앙으로 나가자 마주선 브르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홍안의 애송이.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아시아권 선수들은 유럽 쪽에 비해 근본적으로 골격이 왜소한 편이었는데 얼굴마저 어려 보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먹을 부딪쳐 인사를 하는 순간, 그의 얼굴은 어느새 전사의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경험과 관록으로 가득 찬 전사 말이다.
무려 128전을 치렀으니 산전수전 다 경험했겠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프로필에 적혀 있는 자신의 전적을 확인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한국의 중량급 복싱이 볼모지에 가깝다는 것 또한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1라운드가 시작되자 브르노는 성큼성큼 다가와 연속으로 잽을 던지며 거리를 쟀다.
함부로 공격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자신처럼 베일에 가려진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빠르지 않다. 대신 펀치의 중압감이 대단했다.
가볍게 잽을 던지며 접근하던 브르노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순식간에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위잉.
본능적인 감각이 펀치에 맞으면 안 된다는 경고음을 흘려냈다.
그의 펀치는 김기방이 작심하고 던진 강도 이상의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더킹으로 피할 때 귓가를 스쳐 나가는 펀치의 파공음이 육중했다.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브르노의 공격은 언제나 스트레이트와 복부 공격이 콤비네이션으로 터졌고 가끔가다 훅도 섞여 있었다.
더군다나 펀치 강도의 강약 조절이 최강철의 스텝과 방어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되었는데 오랜 경험에서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것 같았다.
최강철은 천천히 외곽으로 돌면서 브르노의 공격 패턴을 읽어 나갔다.
강력한 펀치에 비해 스피드가 느리다. 더군다나 일정한 공격 패턴을 돌아가며 쓰는데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이은 복부 공격이 들어올 때면 왼쪽 어깨가 미리 쳐지는 습관이 있었다.
최강철은 외곽으로 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격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면도날 같은 레프트 잽으로 브르노의 공격에 제동을 걸었고 그의 방어 체계를 확인하기 위해 스트레이트와 양 훅을 번갈아 때렸다.
방어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며 언제나 방어에 이은 공격을 노렸다.
왜 한국 복싱이 세계 대회만 나가면 웰터급에서 죽을 쑤었는지 직접 부딪쳐 보자 알 것 같았다. 브르노의 공격과 방어력은 국가 대표였던 마현석보다 한 단계 위의 수준이었다.
1라운드가 끝나고 코너로 돌아오자 수건을 들고 뛰어든 윤 관장이 물병을 들어 그의 입에 쏟아부으며 팔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잘했다. 힘들지 않냐?”
“괜찮습니다.”
“강철아, 저놈은 일정한 공격 패턴이 있다. 간파했어?”
“예.”
“쟤가 때리는 공격 콤비네이션은 세 가지 패턴이 있어. 좌우 스트레이트에 이은 양쪽 복부공격, 양 훅에 이은 어퍼컷과 따라붙는 라이트스트레이트, 근접했을 때 숏 훅을 때리고 떨어지면서 좌우 스트레이트. 그 공격들의 선봉은 항상 레프트 잽이고.”
역시 왕년의 천재라고 불리던 한국 챔피언다웠다.
윤 관장은 정확하게 브르노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며 파훼책도 함께 이야기했다.
“내가 봤을 때 놈은 숏 훅을 때리고 물러설 때 방어가 가장 취약하더라. 그리고 콤비네이션을 시작할 때 왼쪽 어깨가 내려오는 습관이 있어. 그걸 잡아야 해.”
“알겠습니다.”
즐겁다. 이런 눈을 가진 코치와 함께 시합을 한다는 것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윤 관장의 눈은 자신처럼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공이 울리자 최강철은 1라운드와 달리 본격적으로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브르노의 패턴을 분석하고 방어 기술들을 엿본 것은 완벽하게 시합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지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움직임이 달라졌다.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브르노의 스피드에 맞춰 경기를 진행하던 최강철은 빠른 스텝을 이용하며 면도날 같은 잽을 연사시켰다.
쉬익, 쉬익.
그의 레프트 잽이 날아갈 때마다 독사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윤 관장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최강철의 잽은 스트레이트에 가까울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정확하고 예리한 잽이 연속으로 터지며 브르노의 안면을 흔들어놓았다.
그러자 브르노가 잽을 스토핑으로 막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경험으로 이런 잽을 계속 맞으며 경기를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직감한 것 같았다.
최강철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브르노가 또다시 콤비네이션을 꺼내 들고 접근해 들어왔을 때부터였다.
이미 파악한 단점은 브르노의 목숨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라이트스트레이트에 이어 펀치를 내기 위해 브르노의 왼쪽 어깨가 쳐지는 순간 더킹으로 피했던 최강철의 번개 같은 양 훅이 브르노의 안면에 작렬했다.
주춤 물러서는 브르노. 하지만 브르노의 눈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달려들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 시합을 망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레프트 잽의 연사. 그리고 브르노가 펀치를 낼 때 드러난 약점을 야금야금 물어뜯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브르노의 눈이 당황으로 인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는 최강철의 펀치에 가격될 때마다 물러서는 스텝이 점점 커졌는데 서서히 대미지가 쌓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최강철이 드디어 칼을 뽑아 든 것은 2라운드를 30초 남겨놨을 때였다.
연속으로 터진 스트레이트를 얼굴에 맞고 뒤로 물러나는 브르노의 발걸음이 천근의 무게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사일처럼 터진 라이트 훅이 정확하게 브르노의 얼굴에 작렬하는 순간 최강철이 와락 파고들며 강력한 레프트 보디를 터뜨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숨겨놓았던 콤비네이션이 움직였다.
지난 3개월 동안 이 콤비네이션을 연마하기 위해 흘린 땀을 양으로 따진다면 커다란 대야로 족히 다섯 개는 될 것이다.
복부에 충격을 받은 브르노가 링 줄에 몸을 기대는 순간 벼락같은 최강철의 펀치가 터지기 시작했다.
브로노의 패턴 공격도 위력적이었으나 최강철의 콤비네이션 패턴 펀치는 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전광석화처럼 10여 발 이상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빠른지 관중들의 눈이 홱홱 돌아갈 정도였다
이미 저항력을 상실한 브르노의 턱이 연신 돌아가는 순간 끈질기게 지켜보고 있던 레프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너무 늦었다. 심판이 시합을 중지하기 뛰어들었을 때 이미 브르노의 몸은 짚단처럼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아듀, 브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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