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공항으로 들어갈 때 이성일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냈다.
“갈 때 배고프면 먹어. 네가 좋아하는 호빵이다. 따뜻할 때 먹으면 더 좋을 텐데…….”
놈이 꺼낸 것은 그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삼립호빵이었다.
호빵을 내미는 이성일의 눈은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5년 동안 사귀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떨어져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멀리 최강철을 보낸 적도 없기에 그는 마치 친구를 잃은 것처럼 슬픈 눈을 만들었다.
“이 자식아, 불과 20일이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꼭 금메달 따 와라. 여기서 열심히 응원할게.”
“그러다 울겠다. 너 설마 먼 길 떠나는 친구 앞에서 정말 우는 건 아니지?”
“지랄 옆차기…….”
이성일이 시선을 바꾸며 눈을 치켜뜨자 최강철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는 그게 어울려. 언제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마.
담임선생님의 덕담과 친구들의 응원을 들으며 최강철은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수업 때문인지 담임선생은 공항까지 들어오지 않고 친구들을 이끈 채 곧바로 떠났다.
이성일이 아쉬움 가득 담긴 손을 흔드는 걸 보면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다려, 곧 갔다 올게.
김포공항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날 때 그리고 가족들과 큰맘 먹고 놀러갈 때 왔던 곳이다.
윤 관장은 7번 게이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9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는데 그는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강철아, 저쪽에 협회 사무장이 코치진과 함께 선수들을 데리고 있어. 인마, 조금 서두르지 그랬냐. 네가 안 오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눈치를 봤는지 알아?”
“아직 시간은 충분히 여유가 있을 텐데요?”
“몰라. 사무장은 벌써 1시간 전에 와서 설쳤고 나머지도 30분 전에 전부 모였다. 네가 제일 늦었어.”
윤 관장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봤다.
아직 7시가 안 된 시간이었기에 최강철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협회에서 가르쳐 준 일정에는 7시까지 공항에 도착하라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는데 일행이 이렇게 빨리 온 것은 외국에 나가 본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윤 관장과 함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복싱 협회 사무장인 유광호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막내인 최강철이 제일 늦게 온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일행은 윤 관장까지 모두 합해 10명에 불과했다.
최강철을 포함해서 선수가 5명이었고, 사무장과 국가 대표 정식 코치진까지 합해서 3명, 체육관에서 선수를 따라온 사람이 2명이었다.
윤 관장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라이트 웰터급의 기대주 김동길이 소속된 극동체육관의 박태현 코치였는데 극동 쪽에서 모든 경비를 대줬다는 말을 들었다.
선발전을 통해 모든 체급의 국가 대표를 선발했으나 세계 선수권대회에 참석하는 건 오직 5명뿐이었다.
주최 측에서 국가 당 5명의 자격 제한을 두었기 때문인데 복싱 협회에서는 가장 유력한 선수들만 추려서 파견을 결정했다.
최강철이 그런 경쟁을 뚫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내년에 벌어질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의 히로키를 꺾는 게 소원인 사무장 유광호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저녁 88년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든 기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신군사 정권의 작품이다.
그자들은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마침내 성과를 얻은 것 같았다.
* * *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는 처음 들었다.
사무장 유광호는 이번 대회 기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코치들과 선수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했는데 비행기에 탈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울에서 대회가 벌어지는 서독의 뮌헨까지는 중간 경유까지 포함해서 18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막상 뮌헨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불과 시합을 일주일 앞두고 출국하게 된 건 보나마나 예산 문제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한국은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라였다.
윤 관장은 처음 비행기를 타본다더니 좌석에 앉자마자 안절부절못하며 어색해했다.
“왜 그러세요?”
“응, 불편해서.”
하긴 불편하기도 할 거다.
이코노미 좌석은 다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윤 관장에게도 편하지 않았다.
승객이 모두 탑승하고 출발 준비가 끝나자 스튜어디스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짐칸을 정비했고 승객이 안전벨트를 맸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불안에 떨던 윤 관장의 눈이 스튜어디스를 보더니 백 촉짜리 백열등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34살, 아직 노총각인 윤성호에게는 스튜어디스들이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들로 보였을 것이다.
이때의 스튜어디스는 모든 여자에게 꿈의 직업이었다.
정규 대학을 나온 여자들 중에서 뛰어난 몸매와 외모를 지녀야 취업이 되었는데 특히 유럽 쪽에 근무하는 스튜어디스들은 그중에서 탑 클래스여야만 탑승이 가능했다.
그랬으니 윤 관장이 눈이 희멀건 동태 눈알처럼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관장님, 그러다가 눈 돌아가겠습니다.”
“쟤, 정말 예쁘지 않냐. 마치 탤런트 같어. 휴우, 오금이 다 저리네.”
“여기로 오는데요.”
“헉, 저 여자가 여기로 왜 오는 거지?”
“내가 손 들었거든요.”
최강철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처음 스튜어디스를 본 윤 관장에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영광을 주기 위해 이야기하면서 손을 들었는데 그는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봄 햇살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스튜어디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윤 관장이 창문으로 잽싸게 눈을 돌리는 게 보였다.
“손님, 뭐 필요하신 게 있나요?”
“물 좀 주세요. 우리 관장님 가슴이 마구 뛰어서 진정제를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어머,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요?”
“아픈 건 아니고 아무래도 예쁜 스튜어디스 누나를 봐서 그런가 봐요.”
“호호호… 금방 물 갖다 드릴게요.”
최강철의 농담에 스튜어디스가 밝게 웃으며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비행기 창문 밖을 바라보며 죽은 듯이 있었던 윤 관장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도끼눈을 부릅떴다.
“야, 이 미친놈아!”
* * *
길고 긴 여행이었다.
그렇게 오랜 여행을 했는데 뮌헨에 도착했을 때는 다음 날 오후 4시였다.
시차가 8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비행기에서 먹고 마시며 주구장창 잠만 자던 일행은 공항에 도착하자 전신을 주무르며 온몸을 배배 꼬았다.
그만큼 힘든 여행이었다.
유광호의 안내로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숙소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간판은 호텔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우리나라 여관 정도밖에 안 되는 삼류 호텔이었다.
현지 적응 훈련을 시작한 것은 다음 날부터였다.
대회 주최 측이 제공한 훈련 장소는 숙소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하자 꽤 많은 나라의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었다.
최강철은 가볍게 몸을 풀며 말로만 듣던 복싱 선진국 선수들의 몸놀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확실히 다르다.
잘 먹고 자라서 그런가 동양인에 비해 같은 키인데도 리치가 길었고 체력도 뛰어나 보였다.
천재 복서라고 불리는 마크 브릴랜드를 보게 된 것은 대회 3일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체육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최강철도 섀도복싱을 멈추고 입구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키가 180㎝는 훌쩍 넘어 보이는 흑인이 당당한 표정을 지은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꾸준하게 공부해서 이제 거의 모든 영어 회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그가 이번 웰터급을 석권할 것으로 유력하다는 마크 브릴랜드라는 것을 알았다.
“관장님, 쟤가 마크 브릴랜드라네요.”
“저놈이… 정말?”
“날렵하게 생겼네요. 스피드가 상당히 빠르겠어요.”
“야, 최강철. 너 지금 장난하는 거지.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냐?”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인마, 쟤가 마크 브릴랜드라는 걸 어떻게 알아. 너 마크 브릴랜드 얼굴 보기나 해봤어?”
“아뇨.”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쟤가 마크 브릴랜드라고.”
“사람들 누구… 혹시 너 영어할 줄 아는 거냐. 그런 거야?”
“당연하죠. 요즘 영어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겁을 하며 놀라는 윤 관장을 바라보며 최강철이 비행기에서처럼 악마의 웃음을 흘려냈다.
윤 관장의 얼굴이 노랗게 변한 것은 최강철이 영어마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전교 수석을 한다고 이성일에게 전해 들었을 때는 까무러쳐 죽는 줄 알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놈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온몸이 작살나는 복싱을 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댔다.
괜히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 정말 복싱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아마 미쳐죽을지도 몰랐다.
지금의 최강철은 처음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짝 곯았던 몸은 완벽한 균형이 잡혀 흠잡을 데가 없었고 살이 오르면서 얼굴의 윤곽마저 살아나 귀공자를 보는 것과 같았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최강철을 상대하면서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괴물.
최강철의 변화는 그야말로 눈부시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복싱 기술을 익혀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오한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 놈이 전교 수석에 영어까지 능통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힘이 쭈욱 빠져 버렸다.
도대체 이놈의 능력은 어디까진지 알 수 없다.
* * *
“빠르죠?”
“저게 그냥 빠른 걸로 보이냐?”
“관장님 눈에는 안 빠릅니까?”
“쟤는 지금 그냥 몸을 풀고 있는 거야. 진짜 시합에 나가면 지금보다 배는 빠를 것 같다. 타고난 몸을 가졌어. 흑인이라 그런지 유연성도 대단하구만.”
“펀치도 좋군요.”
“스트레이트의 각도 봐라. 그냥 화살처럼 꽂히잖아. 그냥 툭툭 치는 것 같지만 정확한 임팩트를 구사하고 있어.”
윤 관장의 말은 사실이다.
쉬익, 쉬이익.
마크 브릴랜드의 펀치에서 독사의 울음 같은 소리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 말대로 입에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고스란히 펀치의 스피드에 의해 생성된 파공음이었다.
“더군다나 펀치를 날린 후 더킹과 위빙, 스웨잉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져서 맞추기가 어렵겠다.”
“지금 선수 기죽이시는 거죠?”
“인마,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언제 기를 죽였다고 그래!”
“뭐, 코치로서 저한테 해주실 말은 없어요? 이를테면 쟤의 약점이라든가 그런 거요.”
“하관이 날렵해. 목의 길이도 조금 길고. 저런 놈은 턱이 약하다. 분명 맷집이 약할 거야.”
“데뷔 초에 몇 번 진 것 빼고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왜 쳐다봐? 그 눈은 나를 못 믿겠다는 싸가지 없는 시선이잖아. 인마, 너도 봤으면서 그런 걸 물으면 어떡해? 저렇게 빠른 놈을 누가 잡아. 맷집이 약해도 맞아야 지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니냐.”
“그렇다면 저놈은 진짜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군요.”
“당연한 말이지. 야, 너 어디 가?”
윤 관장이 소리치는 걸 흘려들으면서 최강철은 뚜벅뚜벅 걸었다.
마침 마크 브릴랜드가 훈련을 마치고 글러브를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 반갑다. 우리 인사나 하지. 나는 한국의 최강철이다.”
불쑥 손을 내밀자 마크 브릴랜드가 어이없는 눈을 하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상대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리며 벗은 글러브를 자신의 코치에게 던진 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치 코흘리개 꼬마 팬이 귀찮게 구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내민 손이 부끄러웠으나 최강철은 그의 행동을 보며 손을 거둬들인 후 음성을 조금 키웠다.
“강하다고 들었어. 내 행동이 불쾌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링에서 보자. 그때는 우리 정중하게 인사하자고.”
마크 브릴랜드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라고 그런 거다. 나를 기억하게 만들어 불편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지금의 행동은 성공적이다.
도발.
그래, 맞다.
강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방법이 있으나 그중 하나가 바로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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