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3화 (23/308)

[23]

장충체육관에 도착한 최강철은 스탠드 한쪽에 자리 잡은 채 현수막을 들고 있는 관원들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국가 대표 선발전에 출전해서 준결승까지 오르자 윤 관장이 관원들을 동원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그랬겠지. 상대 체육관에서는 전세 버스까지 빌려서 응원을 오는데 우리가 가만있는 건 쪽팔리는 짓 아니냐며 코치와 관원들을 닦달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최강철이 국가 대표가 되기를 원하는 건 바로 그였으니까.

오늘은 준결승에 이어 결승전까지 한꺼번에 치러지기 때문에 체육관 안에는 각종 현수막과 응원 문구가 적힌 피켓들이 여기저기 넘실거렸다.

현수막이 촌스럽다. 부랴부랴 만들었기 때문인지 다른 체육관에서 만들어 온 것들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관중들의 숫자는 거의 500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링 사이드에 진을 친 채 사진을 찍었고, 선수들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은 스탠드에서 끼리끼리 모여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마추어 경기는 3분 3라운드로 치러진다.

그 말은 불과 10분 만에 경기 결과가 가려진다는 뜻이고 최강철의 순서도 금방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몸을 푸는 동안, 시합이 펼쳐지는 체육관에서는 연신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나라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국가 대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들이었다.

몸에서 천천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시합을 기다리는 동안 섀도복싱과 가벼운 미트 질로 근육을 이완시키며 뭉친 몸을 풀었다.

먼 곳에서 곧 웰터급 경기가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게 들릴 때 배어 나온 땀을 닦은 최강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관장님, 이제 가시죠?”

“어딜?”

“곧 마현석이 시합합니다. 가서 봐야죠.”

현 웰터급 국가 대표인 마현석의 시합은 그보다 먼저 치러진다.

최강철이 자신의 차례가 아님에도 몸을 일으킨 건 마현석과 정동철의 시합이 그만큼 궁금했기 때문이다.

현 국가 대표 마현석과 전 국가 대표인 정동철의 대결.

두 사람은 강북 4웅으로 불리며 거의 5년 가까이 라이벌을 형성한 채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온 사람들이었다.

“시합을 앞둔 놈이 어딜 간다고 그래. 지금 그놈들 시합이 문제가 아니다. 김만덕을 먼저 이겨야 한다고.”

“이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놈아, 그놈이 유태호를 꺾은 게 전부 운 때문이라고 생각해? 세상에 운으로 이기는 권투는 없다. 김만덕은 하드 펀처야. 잘못 맞으면 너도 유태호 꼴이 날 수 있단 뜻이다. 그래서…….”

“관장님, 저는 마현석의 시합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잖아요. 김만덕을 무시해서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럼 뭐냐, 이놈아!”

“성호체육관에 국가 대표 탄생이라는 현수막 붙이고 싶지 않으세요?”

“험, 험… 그거야 뭐…….”

“그러니까 가자고요. 둘의 경기를 보면서 장단점을 분석해야 이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코앞에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결국 윤 관장은 입맛을 다시며 최강철과 함께 링이 한눈에 보이는 스탠드로 이동했다.

변두리 체육관이었으니 경쟁 선수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다.

커다란 명문 체육관들은 주요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서 면밀히 분석한다고 했는데 윤 관장의 살림 형편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예선전의 경기 모습들을 보면서 어느 정도 전략을 마련했지만 최강철에게는 두 사람의 경기 장면을 직접 보는 것처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스탠드에서 선수들이 출전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강철이 목을 길게 뺀 채 링 사이드는 물론이고 스탠드까지 훑는 게 보였다.

누군가를 찾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강철아, 누구 찾냐. 여자 친구 오기로 했어?”

“저한테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요.”

“그럼 누굴 찾는데.”

“아니에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본 겁니다.”

오시지 않았다.

체육관에 도착한 후 줄 곧 오시기를 기다렸으나 시합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허름한 잠바를 입고 나타나셔야 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몸을 풀면서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권투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가족들은 한 번도 응원을 오지 못했다.

일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버지, 차멀미가 심해서 언제나 걸어 다니시는 어머니는 물론이고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둘째 누나와 이제 막 공장에 취직한 막내 누나도 경기장에 올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매일같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었으니 누굴 탓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제 아버지께서 반드시 응원하러 오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바쁘신데 뭐 하러 오느냐며 손사래를 쳤으나 마음속에는 고마움과 기대감이 가득 찼다.

최근 들어 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시는 게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아들이 국가 대표에 뽑히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 드리고 싶었고, 우승 트로피를 아버지 품에 안겨 드리고 싶었다.

그 영광을, 그 기쁨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 떨려온다.

그래, 어쩌면 유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뻐하신다하면 나는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아버지가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마현석과 정동철의 시합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라이벌답게 일진일퇴의 경기를 펼쳤는데 얼마나 많은 펀치를 주고받았는지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빠르다, 그리고 펀치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강도가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가 마현석에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라운드 중반을 접어든 후부터였다.

정동철은 체력에서 밀렸다.

더불어 마현석의 송곳 같은 스트레이트가 정동철의 스텝을 차단한 채 터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일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연이 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최강철이 느끼기에 마현석이 그랬다.

독기. 그래, 독기다.

주요 시합 때마다 히로키에 패해서 2인자에 머물렀던 그는 온갖 불명예를 떠안은 채 괴로울 세월을 보내왔으니 프로로 전향하기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었을 것이다.

마현석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는 못다 한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심장과 어울려 펀치로 표현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3라운드 1분여를 남겨놓고 심판이 시합을 중지하면서 끝이 났다.

마현석의 RSC승.

스탠드 한쪽에 몰려 있던 20여 명의 응원단이 마현석의 이름을 연호하는 걸 보며 최강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합이 진행되는 동안 마현석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며 특징을 분석했고 그를 잡아낼 대책을 만들었다.

불과 3라운드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준결승.

링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오시지 못하는 걸 보니 무슨 사정이 생긴 것 같았다.

아버지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빈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분이니 자신의 경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상대인 김만덕의 몸은 곰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직했다.

저런 체형을 가진 자는 기술과 스피드가 부족한 대신 윤 관장이 우려한 것처럼 일발필살의 주먹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태호도 거기에 당한 게 틀림없었다.

“강철아, 한 방. 저 새끼 밀고 들어오면서 한 방을 노릴 거야. 그거만 조심하면 된다.”

링 중앙으로 나가는 최강철을 향해 윤 관장이 소리쳤다.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링 중앙으로 나갔다.

다시 인생을 사는 조건으로 루시퍼에게 얻은 강철 같은 심장과 천재적인 머리가 상황을 면밀하게 체크해 나갔다.

그가 링에 오르자 먼저 경기를 마친 마현석이 땀도 닦지 않은 채 코치진과 함께 링 사이드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승전을 대비해서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김만덕이 지닌 한 방과 마현석에게 분석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최단시간 내에 경기를 끝내는 게 유리하다.

부웅.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김만덕이 롱 훅을 날려 왔다.

강북 4웅에 비해 스킬 면에서 조금 부족했지만 선발전에 출전 자격을 얻을 만큼 기본기가 단단하게 잡혀 있는 펀치였다.

하지만 단박에 승부를 보려는 욕심이 과하다. 그리고 자신의 펀치에 대한 자만감으로 롱 훅 위주의 경기를 하다 보니 빈틈이 너무 많이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최강철은 스텝을 이용해서 계속 피하다가 오른손 롱 훅을 더킹으로 제치며 비어 있는 복부에 강력한 주먹을 꽂아 넣었다.

하관이 뭉툭하고 목이 짧은 선수는 턱이 강해서 웬만한 펀치에는 쉽게 충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허억!”

단 한 방의 복부 공격에 김만덕의 입을 통해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가드가 내려와 복부를 방어하는 걸 보면서 최강철의 좌우 스트레이트가 번개같이 김만덕의 얼굴을 찍었다.

휘청 물러서는 김만덕.

맹수는 한번 기회가 오면 상대의 목 줄기를 반드시 끊어놓는다.

최강철은 물러서는 김만덕의 몸통을 상체로 박아 링에 몰아넣은 후 순식간에 20여 차례의 펀치를 쏟아부었다.

양쪽 옆구리에 열 방, 상체를 붙인 채 숏 훅과 어퍼컷의 연사 공격이 각각 다섯 차례씩이었다.

마지막 펀치는 뒤로 한 발 물러선 상태에서 터진 송곳처럼 날카로운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다.

김만덕은 순식간에 퍼부어진 예리한 연타 공격에 충격을 받은 채 무방비 상태에서 강력한 스트레이트에 적중되자 고개가 덜컥 뒤로 꺾어졌다.

허물어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쓴다.

강력한 지진으로 인해 낡은 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처럼 그토록 단단하게 보였던 김만덕의 하체가 상체의 균열을 이겨내지 못한 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불과 경기 시작 1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와아, 와아!”

관중들의 입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함성이 흘러나왔다.

마현석이 승리할 때보다 훨씬 강하고 커다란 함성이었다.

그런 관중들을 향해 최강철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다. 나는 반드시 국가 대표가 되어 내 꿈을 펼쳐 나갈 테니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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