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2화 (22/308)

[22] 제4장 창공을 향해

두 사람의 공방전을 긴장 속에 지켜보던 200여 명의 관중들은 정국영이 강력한 어퍼컷을 맞고 고목나무처럼 쓰러지자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아… 와아!”

200명이 내지른 소리가 만 명이 내지른 것처럼 폭발력이 있었다.

그만큼 최강철의 경기가 그들을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벌써 이번 경기까지 17연속 KO승.

이전 대회까지는 수준이 떨어지는 경기라고 폄하할 수 있었으나 전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선수들만 출전하는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강북 4웅의 한 명인 정국영까지 캔버스에 쓰러뜨리자 관중들은 최강철을 연호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환장하겠군. 저놈 저거 끝내주는구먼.”

“어때, 내 말이 맞지?”

“인정한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물건이야.”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조선일보 복싱 담당 기자인 곽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철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경력이 너무 일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프로 복싱의 전성기라 아마추어 국가 대표보다 한국 챔피언의 위상이 훨씬 컸고, 동양 타이틀전과 세계 타이틀전이 줄지어 예정되어 있어 기삿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다.

자신은 복싱 전문 기자였으니 국가 대표 최종 선발전이 치러지는 이곳에 당연히 와야 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이틀 후에 벌어지는 신종섭의 동양 타이틀전에 가 있는 상태라 마음이 붕 떠 있어 선발전을 보면서도 정신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김도환이 오래전부터 떠들던 최강철의 시합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김도환이 거품을 물면서 칭찬했을 때 속으로 웃었다.

수준이 떨어지는 고등부 경기에서 연속 KO승을 거둔 걸 가지고 복싱 전문 기자라는 놈이 설레발치는 모습이 꼭 아이 같았다.

현재 전 국민을 열광시키는 프로 복싱에는 KO 행진을 이어나가는 놈들이 부지기수였으니 아마추어 선수에게 침을 튀기는 김도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허공으로 사라진 건 김기방과의 시합이 끝난 후 부터였다.

비록 기자였지만 오랫동안 복싱을 지켜본 경험으로 웬만한 전문가 뺨치는 식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최강철이 보연준 인파이팅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감탄한 것은 강북 4웅에 포함된 정국영을 단숨에 때려잡은 스피드와 연타 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국영의 스피드는 웰터급에서 최정상급에 속했으나 마지막에 보여준 최강철의 벼락같은 움직임은 그보다 두 배는 더 빨라보였다.

그런 스피드를 펼치며 터뜨린 펀치는 또 어떠한가.

권투의 생명은 균형이다. 다리가 고정된 상태에서 펀치를 날려야만 상대에게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빠른 스텝을 펼칠 때 완벽한 균형을 잡지 못하면 강력한 타격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강철은 그렇게 빠른 이동 중에도 스톱 모션을 걸어 펀치를 쏟아부어 정국영을 기어코 캔버스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수준의 공격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동양 챔피언급이나 가능했다.

“곽 기자, 저놈이 국가 대표가 되어 활동하다가 졸업하고 프로로 데뷔하면 어떨 것 같냐?”

“잘 알잖아. 거의 대부분 아마추어 국가 대표 출신들이 막상 프로에 들어와서는 개박살이 났다는 거. 하지만 저놈은 통할 것 같다. 저런 스피드와 터프함, 그리고 펀치력이라면 지금도 웬만한 놈들은 찜 쪄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재밌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이 너무 좋단 말이지. 어때 우리 쟤 한번 확실하게 띄워볼래?”

“우리 둘이? 여기 온 기자들만 해도 20명이 넘어. 쟤가 금고 속에 들어 있는 골드바도 아닌데 독식이 가능하겠어?”

“당연히 쓰겠지. 하지만 내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단신으로 그칠 거야.”

“음…….”

“잿밥에 파리 떼가 꼬이면 먹기도 전에 상하는 법이야. 금방 잡은 물고기는 즉시 회를 쳐서 먹어야 입맛이 돌잖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우리 포식 한번 하자고.”

“하아, 데스크에서 허락해 줄지 모르겠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난 무조건 할 거니까. 저놈이 장래에 세계 챔피언이 된다면 1면에 대문짝만하게 올려놓은 기사가 나의 탁월한 식견을 증명해 줄 거다. 어때,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아?”

“꿈이 크구만.”

“촉도 상당히 좋은 편이지.”

“무슨 소린지 알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놈이 우승을 해서 국가 대표 타이틀을 달아야 해.”

“그거야 당연한 말씀. 저놈이 깨지면 촉이고 나발이고 다 개소리 아니겠어?”

* * *

윤 관장은 자신의 작전대로 최강철이 근접전을 펼친 끝에 또다시 KO승을 거두자 링 위로 뛰어 올라가 사정없이 만세를 불렀다.

그것은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겨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최강철은 국가 대표 경력까지 있는 정국영을 1라운드 만에 박살 내고 말았다.

“강철아, 이 자식아. 최고다, 최고야!”

윤 관장과 이성일이 몸을 흔들어대는 통해 심판이 겨우 뜯어말린 후 최강철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전부 일어서 있던 관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낸 최강철의 매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한 뭉치가 되어 링을 빠져나온 일행은 즉시 라커로 향한 후 최강철의 주먹에서 붕대를 풀어주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꿈에 그리던 국가 대표가 된다.

더군다나 준결승 상대는 럭키 펀치로 강북 4웅 중 한 명인 유태호을 때려잡은 대구팔공체육관 소속 김만덕이었다.

김만덕은 8강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막판에 휘두른 펀치가 유태호의 복부에 꽂히면서 KO승을 따냈기 때문에 충분히 할 만한 상대였다.

“강철아, 오늘은 내가 큰맘 먹고 좋은 데 가서 소고기 사줄게. 밥 먹고 가자.”

“관장님, 전 오늘 일찍 가봐야 해요.”

“왜?”

“큰형 부부가 온다고 했어요. 조카들도 같이 온다는데 일찍 가봐야죠. 같이 저녁 식사 하기로 했거든요.”

“그럼 할 수 없지. 하지만 내일 중요한 시합 있으니까 절대 이상한 짓 하지 마. 알았어?”

“이상한 짓이 뭔데요?”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란 말이야.”

“걱정도 팔자십니다.”

무슨 뜻인지 알자 어이가 없어 하품이 나왔다.

윤 관장의 눈은 자신의 중요 부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자위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최강철이 짐을 챙긴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장충체육관을 빠져나왔다.

그런 후 이성일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의 시합을 했지만 얼굴은 상처 하나 없었으나 그가 집으로 들어서자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어이구, 강철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는겨?”

“예, 괜찮아요.”

어머니는 시합의 결과보다 아들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혹시 어디라도 다쳤을까 봐 불안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시합이 있을 때마다 권투를 하는 아들이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뒷마당에 물을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셨다.

최강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조카가 뛰어나왔고 큰형 내외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겼냐?”

“예.”

“그럼 국가 대표 된 거야?”

“아뇨, 내일 경기를 더 해야 돼요.”

“그렇구나. 들어가자.”

무뚝뚝한 큰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몸을 돌렸다.

큰형과의 나이는 무려 17살이나 차이가 났는데 아들만 둘을 뒀다.

최강철은 자신을 잘 따르는 큰조카를 번쩍 들어 입맞춤을 해준 후 천천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둘째 조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여전히 병원에 있는 모양이다.

큰형 내외의 얼굴색이 좋지 않은 걸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불현듯 집에 찾아온 이유가 둘째 조카의 병원비 때문이란 것을.

저녁 시간에 맞춰 들어오신 아버지는 최강철이 준결승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뻐하셨다.

“강철아, 수고혔어. 우리 아들 정말 자랑스럽다.”

“아니에요. 전부 아버지 덕분입니다.”

“그런 소리 하덜 말어. 아들 시합하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하구먼. 허어… 먹구사는 게 뭔지……. 내일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가볼라니까 잘 싸워야 한다.”

저녁을 먹으며 한동안 최강철에 관한 이야기로 가족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 웃음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상을 물리자 큰형의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에서 기어코 둘째 조카의 병원비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방구들에 등을 댔다.

전생에서 큰형과 둘째 형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형들은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고생하신 아버지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고, 결국 허름한 이 집을 차지하기 위해 대판 싸운 후 가족들과 절연을 선택했다.

형들이 떠난 후 부모님과 집안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에게 넘어왔다.

힘들고 괴로웠다.

그 역시 물려받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부모님을 부양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자 슬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자신에게는 형들을 미워할 자격이 없다.

그 역시 아버지의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눈물을 흘리시며 버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어머니를 요양원에 짐짝처럼 버려 버린 불효자였으니 말이다.

* * *

최우용은 아침 일찍 회사에 나와 차를 정비하다가 잠시 멈춰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묵직하고 뒷목이 자꾸 당기는 게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는 트럭 운전을 한다.

지금은 국도유지사무소라 불리는 토목광구에서 계약직 임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한 달 월급이 23만 원이었다.

그 돈으로 6남매를 건사하며 아끼고 아껴 지금의 푸른 대문 집을 샀다.

집사람이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내는 그 작은 월급을 쪼개고 쪼개 오랫동안 곗돈을 넣었는데 어느 날 깜짝 놀랄 만한 돈을 내밀며 우리도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손자의 병원비가 부족하다는 큰아들의 말을 들으며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진 돈이 없으니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자신은 빚을 얻어 손자의 병원비를 댈 것이다.

딸들은 결혼을 한 큰아들이 돈을 달랄 때마다 우리 사는 거 안 보이냐며 덤벼들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딸들을 혼내서 방으로 돌려보냈다.

딸들은 모른다.

큰아들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컸는지를.

돈이 없어 학교조차 보내지 못했고 줄줄이 달린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모두 양보한 채 배를 곯으며 담벼락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결국 아들은 19살이란 어린 나이에 한 입이라도 줄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진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자신을 도왔다.

결혼할 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무런 불평조차 하지 않던 아들은 손자들을 낳게 되자 사는 게 힘들었던지 수시로 도움을 청해왔다.

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 노력했으나 서서히 한계가 느껴졌다.

차를 모두 정비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어제 반장에게 미리 말한 대로 반차를 내기 위해 서류를 작성했다.

오늘은 막내아들이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싸우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가볼 생각이었다.

자식들이 성장할 때마다 기뻤지만 요즘처럼 사는 게 행복한 건 처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막내아들이 무사히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게 이젠 버릇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아들.

자식을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최강철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었다.

전교 수석을 하는 아들만큼은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큰아들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그 돈만은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아들은 공부뿐만 아니라 권투에 소질이 있어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더니 결국 국가 대표라는 커다란 영광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최 주임, 이게 뭐요?”

반장에게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서류를 집어 든 김근조가 인상을 찡그리며 신경질이 가득 찬 음성으로 물어 왔다.

그는 운전기사들을 총괄하고 있는 공무원으로 계약직 직원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 이제 겨우 38살이라고 했느니 큰아들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김근조를 볼 때마다 고개를 조아린 채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반장이 보고한다고 했는데 아직 못 했나?

“오늘 아들 시합이 있어서 반차를 내려고요.”

“무슨 시합?”

알면서도 묻는 거다.

그는 운전기사들 집안 내역과 행사에 대해서 구석구석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최강철이 국가 대표 선발전에 나갔다는 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최우용은 새파란 눈으로 노려보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저승사자는 지금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오늘부터 우기 대비해서 집중 작업 한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못하는 거요? 지금 잘리고 싶어서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직 고등학생이라며? 새파랗게 어린놈이 재수가 좋아서 나간 거지, 국가 대표가 무슨 동네 반장도 아니고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해요. 괜히 그 핑계대고 바쁜데 놀 생각이나 하면 다음 계약에서 정말 잘라 버릴 거야.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찬바람을 내며 돌아서는 김근조의 모습을 바라보며 최우용이 무겁고도 긴 한숨을 흘려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깨끗하게 정비된 자신의 차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리가 너무나 무거웠고 한 발 발걸음을 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 오더니 슬그머니 눈물이 주르륵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기다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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