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1화 (21/308)

[21]

* * *

선발전의 첫 경기는 강북 4웅의 한 명인 미아체육관 소속 정국영이 판정승으로 이겼다.

비슷한 경기를 펼친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을 보면 꽤나 차이나는 경기였다.

정국영은 체력 안배를 하기 위해선지 적정한 선에서 치고 빠지며 상대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았는데, 방어 기술이 대단해서 거의 펀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강철아, 준비됐지?”

“예.”

“다시 말하지만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면 편해질 거다. 긴장하지 말고 훈련한 대로만 해. 원 없이 싸우다가 내려오란 말이야. 알았어?”

“관장님은 꼭 제가 질 것처럼 말하시네요.”

“누가 지래. 상대가 워낙 강하니까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지.”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어이구, 이 자식아!”

“하하하… 관장님을 위해서 멋지게 싸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15연속 KO승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란 거 저 녀석한테 꼭 보여줘라. 자, 들어가자.”

윤 관장이 링 위로 오르는 김기방을 가리킨 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워낙 수준이 높은 선수들이 출전했기 때문에 져도 괜찮다는 말로 긴장을 풀어줬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승리를 바라는 건 바로 그였다.

국가 대표를 뽑는 선발전이었으나 예선전이었기 때문에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는 없었고 매니저도 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링에 들어가 가볍게 관중들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링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미 심판은 먼저 중앙으로 나온 김기방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일찍 다녀라. 어린놈이 건방지게 선배보다 늦게 오면 돼? 자식이, 겁 대가리 없어…….”

최강철이 중앙으로 나오자 김기방이 이를 드러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불쾌함은 기를 꺾어놓기 위해 고의적으로 보여준 압박임이 분명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복싱은 주먹으로 증명하는 것이지 말이나 눈싸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주의 사항을 심판에게 듣고 코너로 돌아오자 윤 관장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지막 작전 지시를 내렸다.

“강철아, 저놈은 무조건 인파이팅을 펼칠 거다. 거리를 스텝으로 확보하고 기회를 노린 후 공격해. 무슨 소린지 알지?”

“그럼요. 알죠.”

윤 관장의 말을 들은 후 그에게 하얀 미소를 지어주었다.

승리를 바라는 그가 처방할 수 있는 최선의 작전이었겠지만 이번에도 최강철은 그의 작전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띠잉!

공이 울리자 김기방이 곧장 중앙으로 걸어오더니 최강철이 인사하기 위해 내밀었던 주먹을 거칠게 밀쳤다.

그런 후 경기 시작 신호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와 양 훅의 연타 능력이 수준급이라더니 과연 고등부에서 상대했던 놈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났다.

쉬익, 쇄액!

최강철이 늘려놓은 거리를 압축시키며 김기방의 펀치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빠르다, 그리고 강력하다.

그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윤 관장의 말대로 스텝을 이용해서 뒤로 빠지거나 사이드로 돌아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발바닥을 캔버스에 붙인 채 김기방의 공격을 더킹과 위빙으로 흘려보냈다.

적의 전초 공격인 잽은 스토핑과 패닝으로 막았고 주공격인 스트레이트는 몸을 흔드는 스웨잉과 더킹으로 차단했다.

링 중앙에서 황소처럼 붙은 두 사람의 대결에 관중들이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복싱은 빠른 발을 이용해서 공방전을 주고받은 것이 일반적인데, 두 사람의 접전은 프로 복싱의 강력한 인파이터들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것과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끝없이 공격했고 다른 하나는 그 공격을 효율적으로 차단하며 방어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김기방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1라운드 시작과 함께 3분 동안 내리 공격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분노와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고 숨소리는 거칠어져 있었다.

“씨발 놈아, 권투가 춤이냐. 좆 같은 놈이 피하고만 있어. 똑바로 해, 이 새끼야.”

1라운드가 끝나자 스쳐 지나가며 김기방이 악을 썼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열이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고함 소리는 심판이 들을 정도였다.

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자신보다 새까맣게 어린놈한테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헛수고를 했으니 화가 날 만했다.

그러나 김기방은 그래서는 안 됐다.

복서는 어떤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치명적인 독을 숨긴 채 상대방의 명중을 단박에 끊어버릴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면 영원히 패자로 기록될 뿐이다.

2라운드에서도 김기방은 속사포 같은 연타를 날리며 공격해 왔다.

여전히 1라운드와 같은 방식이었는데 단숨에 끝내 버리겠다는 듯이 폭발적으로 파고들었다.

최강철의 방식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링 중앙에서 맞붙은 두 사람에게서 불꽃이 튀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미지를 받고 있는 건 김기방이었다.

최강철은 그의 펀치를 피하면서 간헐적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그때마다 김기방의 안면이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신장과 리치가 좋은 선수들은 아웃복싱을 주 무기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강철은 체구가 좋은 김기방을 상대하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리가 좁혀진 상태였기 때문에 스트레이트는 무력화되었고 미사일 포 같은 양 훅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의 쇼트와 어퍼컷, 그리고 보디 공격이 예리한 각도로 그으며 터질 때마다 김기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친 황소처럼 끝없이 공격하던 김기방이 어퍼컷을 안면에 맞은 후 비틀거리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대미지를 받았음이 분명했다.

역시 김기방은 인성과 실력 면에서 국가 대표가 될 자격이 부족한 놈이다.

저런 실력과 독심으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 대표가 되겠다고 나섰다니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강철은 물러서는 김기방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거리를 좁힌 후, 자신의 주 무기인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양 훅을 폭발시켰다.

이미 대미지를 받아 정신이 반쯤 날아간 김기방이 번개처럼 날아온 펀치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휴우, 상대가 안 되는구만. 김기방이 저 정도밖에 안 됐나?”

“김기방이 약한 게 아니라 최강철이 강한 겁니다. 더군다나 저놈은 역전술에 말려들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아웃복싱을 생각하고 나왔다가 최강철의 인파이팅에 완전히 병신이 된 거죠.”

“그렇군. 맞아, 그것도 원인이겠다. 그래도 근접전을 펼치며 그 많은 펀치를 거의 안 맞았잖아. 정말 대단해.”

“방어 기술도 좋지만 저 신장과 리치를 가지고 쇼트 치는 거 보십시오. 결국 김기방이 진 건 근접전 능력에서 밀렸기 때문입니다.”

“저놈은 갈수록 진화되는 것 같단 말이지. 그것참 갈수록 태산일세.”

유광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정기수의 얼굴에서 웃음이 흘렀다.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갈수록 태산이라뇨. 그 말은 최강철이 잘하는 게 기분 나쁘다는 표현입니다.”

“에이, 이 사람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웰터급에서 히로키를 이길 놈이 나오길 학수고대하는 중이란 거 잘 알잖아.”

“사무장님은 히로키만 이기는 게 소원이세요?”

“나는 다른 거 다 상관없어. 내년에 벌어지는 아시안게임에서 누군가 그놈만 꺾어주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거야.”

“왜 아시안게임만 신경 쓰세요. 4달 후에 세계 선수권대회가 열립니다. 거기엔 세계적인 선수들이 전부 출전한단 말입니다.”

“그거야 워낙 차이가 나니까 그렇지. 웰터급에서 어떻게 쿠바나 미국 놈들을 이겨. 예선 탈락만 안 해도 다행이겠다.”

“하하하…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최강철 다음 상대가 정국영이지?”

“맞습니다. 강북 4웅 중의 하나인 정국영이죠.”

“재밌겠군.”

“재밌을 겁니다. 제가 봤을 때 정국영이도 한 단계 진화되었어요. 1차전에서 하는 걸 보니까 이젠 시합을 읽는 눈이 떠진 것 같아요.”

“최강철이 이길 수 있을까?”

“그건 봐야죠. 정국영 쪽도 시합하는 걸 봤을 테니 김기방이 당한 것처럼 쉽게 끌고 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시합을 끝낸 후 윤 관장에게 모진 잔소리를 들었다.

선수가 작전도 따르지 않는데 내가 여기에 왜 있느냐면서 화를 버럭버럭 내는 통에 그를 달래느라 최강철은 한참 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윤 관장은 입술을 주욱 내밀고 계속 신경질을 부리다가 시합 시간이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전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정국영과의 시합에서 그가 짜놓은 전술은 오히려 인파이팅이었다.

정국영은 스피드가 뛰어나 외곽으로 돌면서 적을 차근차근 요리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죽여 버린다. 강철아, 이 자식아. 너 혹시 관장 말이 우습니?”

“그럴 리가요.”

“그럼 내 말 꼭 잊지 마. 접근전이야, 알았어?”

“예.”

“놈은 포인트 위주로 시합하면서 방어 전술을 쓴단 말이다. 그러니까 과감하게 몰아붙여야 해.”

“알았어요. 죽여놓을게요.”

“어이구, 대답은 붕어처럼 뻐끔뻐끔 잘해요.”

“관장님, 우리 나오라는데요.”

“나도 들었거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성일이 비실비실 웃었다.

그의 역할은 라운드가 끝났을 때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게 주 임무였다.

복싱에 대한 지식이 얕으니 함부로 떠들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면 반드시 한마디 보탰다.

“관장님, 글러브 드릴까요? 저놈 말도 안 듣는데 이 참에 링에 올라서 왕년의 그 화려했던 스트레이트 한번 보여주시죠.”

링에서 마주 선 정국영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추어 전적 78승 9패.

국가 대표에 뽑히지 못하면 곧바로 프로에 데뷔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이번 시합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침착했다.

강북 4웅에 포함된다고 하더니 김기방에 비해 숨겨진 포스가 더욱 진했다.

그러나 침착한 것은 최강철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18살이지만 인생을 산 것은 그보다 훨씬 길고 질겼으니 이 순간 그의 정신은 더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이 울리자 예상했던 것처럼 정국영은 외곽으로 돌면서 레프트 잽을 날려 왔다.

빠르다. 그리고 정확하다.

그의 잽은 스토핑으로 최강철의 왼손을 견제하다가 불시에 날아왔는데 조금이라도 균형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불을 뿜어냈다.

치고 빠지는 작전.

정국영의 코치진은 최강철의 펀치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빠른 발을 이용하는 작전을 수립한 게 분명했다.

계속해서 펀치를 날린 후 외곽으로 돌아나가는 정국영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스피드를 측정했고 펀치의 패턴을 분석하며 고질적인 습관들을 찾아냈다.

그런 후 중반이 지난 후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이전 경기를 보면서 전략을 수립했겠지만 그들은 최강철의 스피드가 정국영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야금야금 접근하며 펀치를 흘려내던 최강철이 폭발적인 스텝을 밟으며 정국영을 추격했다.

놀란 정국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최강철의 스텝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한번 시작된 공격은 무섭도록 정확하고 예리했다.

레프트 잽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 더블. 그리고 공간을 날아든 양 훅이 정국영의 안면에 그대로 작렬했다.

그동안 그의 스텝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퇴로를 가로막아 버렸으니 도망갈 곳도 없다.

무수히 터지는 펀치들.

공격을 시작한 최강철의 펀치는 가드를 뚫고 송곳처럼 파고들어 정국영을 서서히 그로기 상태로 몰아 넣었다.

코너에 몰린 건 지옥에 들어선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좌우 옆구리 공격에 이은 라이트 어퍼컷이 복부 공격에 충격을 받고 가드가 떨어진 정국영의 턱을 박살 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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