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3장 신화의 시작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복싱 열기로 인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기 때문에 예선 장소는 산재된 8군데서 벌어졌다.
대부분 대규모 복싱 체육관이었는데 웰터급 시합이 벌어지는 곳은 국내 최대 복싱 체육관 중 하나인 극동중앙체육관이었다.
극동중앙체육관은 올해 초 세계 타이틀전에서 사울 맘비에게 타이틀을 뺏긴 슈퍼 라이트급의 히어로 김상현을 보유한 명문 중의 명문 체육관이었다.
예선전은 워낙 참가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하루에 30경기씩 4일에 걸쳐 벌어지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고 8강전까지는 여기서 모두 끝낸다.
웰터급의 참여 인원은 모두 합해 123명.
1차전을 끝내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2일이 걸릴 만큼 많은 숫자였다.
“엄마, 공부하고 올게요.”
“그려, 몸 좀 생각하면서 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최강철을 향해 어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아직 가족들은 그가 권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말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훈련을 갈 때면 언제나 도서관에 간다는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은 최강철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훈련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오면 방에 들어가 자정까지 공부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가 권투한다는 걸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어도 루시퍼가 선물해 준 강철 같은 체력은 그의 몸을 전혀 지치게 만들지 못했다.
요즘 들어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영어 회화와 앞으로 배워야 할 수학, 물리, 화학 같은 과목들이었다.
영어 회화는 나중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에 테이프를 구해 독학을 했고 다른 과목들은 미리 원리를 파악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집을 나와 체육관에 도착하자 윤 관장과 이성일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을 해왔다.
오히려 그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는데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분위기였다.
이미 다른 체급들의 선수들은 모두 도착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윤 관장의 눈은 오로지 그를 향하고 있었다.
“강철아, 오늘 잘할 수 있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극동이 우리 체육관하고 멀어서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너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너는 성일이하고 가야 될 것 같아.”
윤 관장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주섬거리며 말을 꺼냈다.
마음은 굴뚝처럼 최강철이 시합하는 극동으로 가고 싶었지만 다른 체급의 선수들이 시합하는 장소가 가까운 곳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극동을 포기한 모양이다
아마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관원들이 1차전 치르는 장소를 향해 뛰어다닐 생각인 것 같았다.
“관장님, 화끈하게 이기고 돌아올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나 잘 돌보세요.”
“알았다. 자, 다들 모여봐.”
윤 관장이 최강철에게서 눈을 돌려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눈은 어느새 변해 있었는데 선수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투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오늘, 너희들은 선수로서 처음으로 링에 오른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후회하지 않고 링을 내려오는 것뿐이다. 미친 듯 싸워라. 그리고 이겨주길 바란다. 우리 모두 파이팅을 외치고 출발하자. 파이팅!”
“파이팅!”
최강철은 이성일과 함께 버스를 타고 극동중앙체육관으로 갔다.
정류장에서 내려 10여 분 걸어가자 사람들이 붐비는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체육관은 3층 건물이었는데 그 앞에는 거의 300여 명의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출전하는 선수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대회 진행자가 나타나 선수들의 접수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최강철과 이성일은 그런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계 챔피언을 배출한 명문답게 극동중앙체육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고 한쪽에 마련된 훈련 기구들도 훌륭했다.
변두리 출신인 이성일이 체육관을 둘러보며 거품을 흘려냈다.
놈은 체육관의 규모와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나온 관계자들의 포스에 기가 질렸는지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야, 죽여주는구만. 우리 체육관하고는 게임도 안 되네.”
“세계 챔피언과 동양 챔피언을 여러 명 배출한 곳이라잖아.”
“휴우, 챔피언을 보유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구나.”
“여기 잠깐 서 있어. 접수하고 올 테니까.”
“응.”
촌뜨기처럼 주눅 든 이성일을 남겨두고 접수대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적던 최강철의 눈이 팔짱을 낀 채 링 사이드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한테 고정되었다.
전호연이다. 세계 챔피언 김상현의 매니저이자 챔피언 제조기로 불리는 명조련사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향후 5명의 세계 챔피언과 12명의 동양 챔피언을 길러냈는데 복싱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정해진 접수 시간이 끝나자 대회 진행자의 독려로 인해 곧바로 경기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30경기를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집행부 측에서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강철은 경기가 시작되자 한쪽 구석에 마련된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경기는 12번째였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서서히 몸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체육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쪽에서 몸을 푸는 선수들이 있었고 경기가 치러지자 양쪽을 응원하는 사람들로 인해 체육관이 시장터로 변해 버렸다.
천천히 몸을 풀며 시합을 치르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신인들이 출전했기 때문에 선수들은 종이 울리자마자 죽자 살자 싸웠는데 막 싸움도 이런 막 싸움이 없었다.
대회 입상자들은 대부분 출전하지 않는다더니 선수들의 수준이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보다 한참이나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번째, 6번째, 8번째, 10번째에 시합에서 이긴 자들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RSC로 끝냈는데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자신의 몸을 푸는 데 충실했다.
자신이 미친듯이 훈련을 해온 것은 이번 시합의 우승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 아니다.
복싱의 강자들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으니 이 대회를 발판으로 최단시간 내에 그들을 격파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이윽고 11번째 시합이 끝나고 자신의 차례가 되자 최강철이 링을 향해 다가갔다.
“강철아, 긴장하지 말고 훈련한 대로만 해. 넌 반드시 이길수 있어!”
이성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놈은 초반에 기가 죽었던 모습은 어디로 팽개쳤는지 최강철이 링에 올라가는 순간 미친놈이 되어 있었다.
링에 올라 헤드기어를 끼고 링 중앙에 서자 잡아먹을 듯 자신을 노려보는 상대가 보였다.
놈은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는 권투의 정설을 착실하게 수행하며 눈을 부릅뜬 채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잠깐 바라본 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간단한 심판의 주의 사항을 끝으로 공이 울리며 시합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링 중앙으로 나서자 상대가 황소처럼 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강한 라이트 훅을 시작으로 정신없이 좌우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걸 보며 사이드스텝으로 돌아 나왔다.
빠르지 않다, 그리고 서툴다. 더군다나 상대의 몸은 균형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아 펀치를 날린 후 몸이 휘청거렸다.
쉬익.
최강철이 상대의 안면을 향해 레프트 잽을 던지자 뱀이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번개처럼 터진 레프트 잽에 상대의 얼굴이 뒤로 젖혀지는 걸 확인한 최강철이 전진 스텝을 밟으며 빠르게 다가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작렬시켰다.
콰앙!
밖에서 들으면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겠지만 정타를 허용한 상대의 고막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최강철은 자신의 펀치가 정확하게 들어갔다는 걸 감각으로 확인한 후 상대가 쓰러지는 걸 보며 조용하게 링 코너로 이동했다.
아마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비록 헤드기어를 끼었다고는 하나 워낙 강력한 스트레이트였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
불과 경기 시작한 지 15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닥터가 링으로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이성일이 두 팔을 번쩍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게 보였다.
그런 놈을 향해 웃어주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와 나, 지랄 같았던 우리 인생은 이제 지금부터 새롭게 태어난다.
최강철은 파죽지세로 상대를 쓰러뜨리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4연속 KO 승.
레퍼리가 경기를 중단시킨 RSC가 아니라 상대를 완벽하게 캔버스에 쓰러뜨린 통쾌한 승리들이었다.
윤 관장은 8강전부터 최강철을 따라왔는데 다른 관원들이 전부 예선에서 탈락한 후 본격적으로 세컨을 보기 시작했다.
남은 상대들은 예선에서 완벽하게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도 대회 입상 경력을 지닌 사람은 오직 하나, 조남석뿐이었는데 작년 서울시장 배에서 3위를 차지한 게 다였다.
그럼에도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되었다.
신인 선수권대회 자체의 참가 선수들이 대부분이 초짜였기 때문에 그는 이 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
“강철아, 긴장만 안 하면 된다. 저놈이 경기를 길게 끌고 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고 서두르지 마. 알았어?”
“걱정하지 마세요.”
윤 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강철이 씨익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안다.
지금까지 최강철은 4번의 경기를 모두 1회전 초중반에 끝냈기 때문에 상대가 체력전을 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웃은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력이 약하다고 판단해서 아웃복싱을 구사한다면 상대는 더욱더 커다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각 체급 준결승부터는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벌어졌다.
워낙 복싱 열기가 뜨거워서 아마추어 신인들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언론과 복싱 관계자들이 눈을 빛내며 경기를 관전했다.
프로모션의 관계자들이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은 유망주를 찾아내어 스카웃을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신인급 대회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가끔가다 괴물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복싱 관계자들은 빼놓지 않고 선수들을 체크했다.
준결승답게 선수들의 기량은 예선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플라이급부터 시작된 경기들의 수준은 상당했는데 너무 치열하게 펼쳐져서 관중들의 탄성을 연신 자아낼 정도였다.
* * *
“김 기자, 자네 같은 사람이 이런 데도 다 오고. 별일이네?”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을 발견한 극동프로모션의 정기수가 반갑게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복싱계에서 김도환은 마당발로 통했는데, 워낙 인맥이 넓었고 정보망도 뛰어나서 특A급으로 분류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특급 기자가 신인 대회에 온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지금 현재 복싱에 관한 기사들은 흘러넘칠 정도로 많았고 팬들이 궁금해하는 챔피언들의 근황을 취재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종현이가 전화를 해왔어요. 특이한 놈을 발견했다면서 거품을 물던데요. 오늘따라 시간이 조금 남아서 구경 삼아 온거예요.”
“최강철?”
“정 부장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거 서운한데요. 그런 일이 있으면 전화 달라고 했잖아요.”
“신인 대회에서 반짝한 놈을 가지고 전화했다가 망신살 뻗칠 일 있어. 종현이랑 나는 급이 달라요.”
정기수가 웃으면서 서운한 표정을 짓는 김도환의 어깨를 툭 쳤다.
차종현은 김도환이 복싱계에 심어놓은 수많은 정보원 중 한 명이었지만 정기수는 극동프로모션의 유력한 스카우터였으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완벽한 유망주가 아니면 입에 올리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김도환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 부장님 눈으로 봤을 때 어떻습니까. 제가 괜한 발걸음한 건가요?”
“허어, 그럴 리가 있나. 종현이한테만 들은 이야기 가지고 김 기자가 여기까지 올리는 없잖아. 그만큼 감이 왔다는 얘기겠지.”
“말 돌리지 마시고요.”
“두 놈이 정신을 잃었어. 나머지 둘은 완전히 뻗었고. 김 기자도 잘 알겠지만 아마추어 경기는 헤드기어를 끼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거의 없거든. 그런데 그놈이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거야.”
“주먹의 파괴력이 대단하다는 뜻이군요.”
“빙고.”
“괴물입니까?”
“현재까지는 그래. 하지만 상대들이 워낙 허술해서 놈의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어. 기대하지 말고 자네 말대로 재미 삼아 보라고. 그놈이 결승에 올라서 조남석과 붙으면 정확한 기량을 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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